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Chapter V. 유요한 부르심

예림의집 2013. 10. 7. 20:43

 

Chapter V. 유요한 부르심

 

구원서정의 첫 번째 논의로 우리는 유효한 부르심(effectual calling)에서부터 출발하려 한다. 그것은 우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취하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대다수의 개혁주의 고백전통과 신학자들의 주장과 일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본 장을 비롯하여 앞으로의 논의에서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앞선 논의에서 설정한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각 국면을 이해하려는 방법론이다. 본 장에서는 그 연합의 관점에서 유효한 부르심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그런 논의 방법이 구원서정의 삶에 있어서 어떤 실천적 차이를 가져오는지 살펴보려 한다. 유효한 부르심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에 앞서 우리는 부르심 자체에 대한 논의를 먼저 할 필요가 있다.

 

I. 하나님의 부르심의 동작

유효한 부르심은 삼위 하나님의 일반적인 부르심에 포함되는 동작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동작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동사가 구약에서는 카라이고 신약에서는 칼레오이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의미를 한 마디로 압축하면, 그 부르심은 반드시 유효한 결과를 낳았다. 결과에 따라 하나님의 부르심의 사역을 분류하면 크게 넷으로 나눌 수 있다. 창조(creation), 직업(vocation), 사역(ministry) 그리고 구원(salvation)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장). 하나님이 명하셨을 때 그 말씀이 실패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창조라는 유효한 결과를 낳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피조물을 존재케 하는 창조적 능력이었다. 또한 창조의 의미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레 26:12).”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권의 행사였고 그 결과 다윗의 나라를 세우셨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들을 직업으로 부르셨다. 어떤 이는 나라의 지도자로(출 3-4), 어떤 이는 왕으로(삼상 15:17), 어떤 이는 장인(匠人)으로(출 31:1-6, 35:30-35), 그리고 개개인의 생업으로(고전 7:17, 20) 부르셨다.

그 부르심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역(ministry)이기도 했다. 사사로(삿 2:16), 제사장으로(출 28:1), 레위인들을 성전으로 섬기는 직책으로(민 18:1-7), 선지자로(사 6:1-10, 렘 1:5, 암 7:15), 제자와(막 3:14) 사도로(눅 6:13), 특히 바울을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고전 1:1, 딤후 1:11) 부르셨다.

또한 구원으로의 부르심이 있다. 구약의 정황에서 구원의 의미를 지니는 부르심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창 12:1),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며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시며(신 4:20, 왕상 8:51), 도덕적 개혁과 거룩의 촉구(겔 18:30, 호 12:6) 등으로 표현되었다. 신약에서 구원으로의 부르심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로(고전 1:9), 성도로(롬 1:7, 고전 1:2), 빛으로(벧전 2:9), 거룩으로(딤후 1:9), 자유로(갈 5:13), 한 몸으로(골 3:15) 부르신 것 등으로 표현된다.

우리가 본 장에서 논의의 주제로 삼는 것은 구원과 관련이 있는 부르심이다. 부르심의 결과가 구원으로 이어지는 정황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하여 살펴보려한다.

 

II. 복음으로 부르심(Gospel Calling)의 중요성

유효한 부르심(구원)에 앞서 복음이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고 개혁신학 전통은 이것을 중요시 여긴다. 복음을 소개하고 예수께로 초대하는 것을 외적 부르심(external calling) 또는 복음으로의 부르심(gospel calling)이라고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 안에 성령이 내주하심의 결과로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내적 부르심(internal calling), 또는 유효한 부르심(effectual calling)이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은 복음으로의 부르심 또는 초대(gospel calling/invit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변증학적 측면에서 볼 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사람을 복음으로 부르거나 초대한다고 해서 사람이 자유로이 자신의 자율적 의지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복음에 응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죄 가운데 떨어져 있는 인간은 선택과 거절을 임의로 할 수 있는 자유자가 아니다. 그는 절대 자율적으로 복음을 선택하지 못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이 장과 다음 장에서 논할 주제이다.) 용어상 오해의 소지와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전통이 사용해 왔던 이 용어를 우리는 계속해서 사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어 사용에 있어서 잠재되어 있는 신학적 문제(issue)가 무엇인지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자유로이 복음으로 초대와 부르심에 응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공개적으로 차별 없이 복음을 제시하는 것을 기본적 방법으로 하고 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사도들도, 누가 택함을 받은 자인지 먼저 구분하려 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이때 부르심의 공개성/보편성(universality) 또는 무차별성(non-discrimination)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창조 이래 드러나 있으므로 아무도 핑계치 못할 것이며(롬 1:19-20),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의로운 것이다(롬 1-3장). 궁극적으로 택함을 받은 자가 부르심에 응하게 하기 위해 차별 없이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신약의 방법이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며 따라야 할 방법이다. 설교나 전도에 앞서 예정된 자를 구별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택함을 받은 자를 위해 차별 없이 모든 자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문제에 대해 아래서 다시 논할 것이다.)

이제 복음으로의 부르심을 구원서정의 관점에서 논의하려 한다. 복음으로의 부르심 또는 외적 부르심은 한 사람의 구원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다. 구원의 시작을 그리스도아의 연합 여부에 둘 때, 외적 부르심은 이직 그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이 전의 상태, 즉 그리스도 밖에서 되어지는 일이다 엄밀하게 말해 그 외적 부르심 또는 복음으로의 초대 자체가 구원의 -또는 구원은총(saving grace)의- 일부는 아니다. 그러나 그 복음제시가 유효한 구원으로 이어지는 경우에는, 그 외적 부르심의 일은 도구적(instrumental) 기능을 한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에스겔 37:1-14, 사도행전 16:14, 야고보 1:18, 베드로전서 1:23 등은 유효한 구원의 결과에 앞서 말씀 사역이 도구적 차원에서 선행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일컬어 개혁신학 전통은 외적 부르심(말씀 사역)이 중생보다 선행되는 것으로 흔히 말해 왔다. 앞서 여러 차례 한 얘기와 같은 얘기이지만, 우리는 구원서정에서 국면과 국면을 직접적으로 대비시키는 일은 지양(止揚)하려 한다. 대신 각 국면들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이해하려 하며, 뿐만 아니라 국면과 국면 사이의 관계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이해하려는 것이 우리의 시도의 차이점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좁은 의미에서 구원서정에 들지 않는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있는 구원은총이 아닌- 외적 부르심에 대한 논의를 왜 다루어야 하는지 질문을 할 수 있다. 비록 복음의 소개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전의 단계의 일이긴 하지만-개혁신학은 이것을 일반은총(common grace)의 영역으로 분류하는데- 실천적 측면에서 두 가지를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먼저 에큐메니칼(ecumenical) 신학에 대한 경계이다. 혹자는 중생이 무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난다는 교리에 근거하여 이렇게 주장한다. 하나님이 아프리카 외진 곳에 사는 한 번도 예수의 복음을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을 중생시키셨다고 가정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중생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평생 살다가 죽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았을까? 중생되었다는 것은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이므로, 비록 복음을 통해 신앙을 고백할 기회를 평생 갖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구원받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인격적인 신앙고백은 실본 속에서 자신의 구원을 구체화(occasioned)하는 것일 뿐 필수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 셈이다. 이것이 오늘날 선교현장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을 각색한 내용이다. 이 주장의 문제는 중생의 교리에 너무 치우쳐진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무시되거나 보조적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버린데 있다. 이 주장처럼 예수에 대한 지식과 고백 없이도 중생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면 선교는 불필요하거나 매우 낙관적인 일이 될 것이다. 타 종교 안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중생시키시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으므로 굳이 애써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어차피 누가 중생했는지 안 했는지는 사람이 보아서는 알 수 없으므로, 꼭 기독교의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절박성도 없어진다. 선교의 사명도 복음전파 보다는 교육, 복지, 정의 등 다른 일들에 주력하게 될 것이다.

중생은 하나님이 단독으로(monergistically) 무의식의 차원에서 이루시는 것이라는 주장은 맞다. 그러나 개혁신학 전통은 복음의 제시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없이,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부정적일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복음을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구원을 위한 말씀 즉 구원지식의 필요성에 대해 성경은 매우 절대적이다. 사도행전 4:12은 예수 외에는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고, 로마서 10:17은 믿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음에서 나는 것이기에, 앞선 15절에서 복음을 전하러 가는 발걸음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서경은 구원지식에 관한 한 매우 배타적이다.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며, 다른 것이 아닌 오직 예수를 아는 지식에 근거한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한다. 이것만이 복음이다. 비록 선교적 상황에서 타협을 요구하는 압박이 크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는 구원에 대해 관용적일 수는 없다.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종종 칼빈주의자들이 범할 수 있는 외적 부르심의 무용론 즉 복음으로의 초대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칼빈주의 신학의 특징 중의 하나가 하나님 주권에 대한 강조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게 강조하면 신학적 균형을 잃고 오류에 빠지기 마련이다. 개혁신학은 이것을 경계한다. 하나님의 주권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러나 개혁신학 역사 속에 하나님의 주권 사상 강조가 오히려 오류로 빠지는 경우들이 있었는데 역사는 그것을 하이퍼 칼빈주의(Hyper-Calvinism)이라고 불렀다.

간략히 설명하면, 하이퍼 칼빈주의는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제시되어야 하는 복음의 보편적 제시(the universal offer of the gospel)를 불필요한 것으로 본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그 필요성을 부정한다. 신론적 관점에서 말하면,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다분히 타락전예정론(supralapsarian) 경향이 강한 자들로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ion)의 이중예정(double presestiation)의 관점이 사고를 지배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뜻(secret will)과 드러난 뜻(revealed will)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감추어진 뜻(예정교리)을 너무 부각시켜 교회에 주어진 -또는 드러난- 복음전파의 사명과 죄인들이 믿고 회개해야 할 책임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구원론적으로 말하면, 복음에 대해 반응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예정된 사람들로서 중생되었기에 예수를 영접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제시 된 복음에 반응할 수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 밖의 죽은 상태의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기에 복음의 보편적 제시라는 것은 사실상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다. 칼빈주의자들 안에서 대체로 18세기경부터 존재해 온 이들은 특정침례파(Paricular Baptist)나 화란계 개혁주의 계열 가운데 소수가 잔존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강조하였던 칼빈의 입장은 무엇인가? 에스겔 18:23을 주석하며 칼빈은 하나님이 죄인들의 죽음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며 누구든지 회개하면 약속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의 기본적 내용을 상기시키며 감추어진 뜻(이중예정)과 드러난 뜻(복음으로 부르심) 사이에 논리적 모순이 있을 필요가 없음을 역설하였다. “이미 말했듯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불가해적 계획의 애매함에 대해 논쟁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시키시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면, 이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가? 율법이고 선지자이고 복음이다. 이제 모든 사람이 회개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들이 회개할 때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약속되었다. 이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은 돌아오는 죄인 어느 누구도 거절하지 않으신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용서하신다. 반면에 말씀에서 밝히시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 하나님이 창세전에 개개인들에 대해 어떻게 하실지 작정하시지 못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처럼, 선지자는 단지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때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우리를 만나주시고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보이시는 것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없음을 보이려고 한 것뿐이다.” 칼빈이 강조하는 것은 말씀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회개와 믿음)과 창세전에 영원 가운데 정하신 뜻(선택과 유기)이 상호 모순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그가 이 주석 작업에서 강조하는 것은 에스겔을 통해 대언케 한 복음의 메시지는 -감추어진 뜻(선택과 유기) 때문에 자기모순에 빠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언제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맞아 주심을 기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 올 것에 대한 촉구이다. 이것이 곧 복음으로서의 부르심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이다. 칼빈은 마치 자신의 후예들이 빠질 수 있는 논리적 모순을 예견한 것처럼, 영원 가운데 작정하신 이중예정의 교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복음으로의 부르심도 동시에 하나님이 진정한 뜻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자체가 구원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외적 부르심 또는 복음으로의 부르심이 중요한 것은 구원의 일에 있어서 말씀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반증하는 것이 된다. 개혁신학의 특징이 말씀을 앞세우는데 있는 만큼 구원서정을 논하는데 있어서도 말씀의 선포가 강조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시대적으로 밖에서는 에큐메니칼 신학이 복음을 위협하며 말씀사역의 필요성을 크게 격하시키고 있고, 안에서는 꼭 하이퍼 칼빈주의가 아니더라도 하나님 주권사상을 운명론적으로 접근해 전도의 필요성을 사실상 부인하는 도전과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의 구원서정의 논의가 공허한 사변적-이론적 논의가 아니라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목적을 갖고 있는 것임을 상기할 때, 말씀 사역의 우선적 강조는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III. 유효한 부르심(Effectual Calling)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할 우리의 유효한 부르심의 논의는 복음으로의 부르심이 전제 된 가운데 진행될 것이다. 복음 제시가, 위에서 언급한, 도구적 기능을 하는 것을 전제로 한 유효한 부르심이 우리의 논의 주제이다.

신약에서 “부르다(칼레오)” 동사가 몇 가지의 의미로 쓰인다. 그 중에 “부르다”의 결과가 유효하게 구원 또는 영생을 낳는 경우가 우리가 관심을 갖는 부분이다. 마가복음 2:17에서 강조되는 개념은 죄인을 부르셨다는 점이다. 전적 부패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와 대조된다. 인간의 기여와 반응을 부인하는 하나님의 전적인(monergistic) 부르심이 부각된다. 고린도전서 1:9은 유효한 부르심의 의미가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속에서 나누는 교제(communion)를 강조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5:8, 13은 1절 이하의 문맥을 볼 때, 부르심의 유효함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데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에베소서 4:1은 부르심의 유효함을 성도가 추구해야 할 삶의 질(quality)과 연결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6:12은 부르심이 인내하며 싸워 이겨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9:15은 부르심의 근거가 영원한 언약에 있음을 제시한다. 베드로전서 5:10은 부르심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누릴 영광을 바라보게 한다.

이상의 구절들을 통해서 본 바와 같이 신약성경은 유효한 부르심의 의미를 전적 부패, 하나님의 전적 사역,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성도의 삶, 견인의 동력, 영원한 언약, 하늘나라의 영광 등의 관점에서 재해석 하고 있다. 신약성경이 소개하는 구원의 의미가 얼마나 풍요로운지 새삼 공감하면서 우리의 신학화 작업이 그 풍요로움을 제한하는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IX. 예정의 실현

유효한 부르심에서 “유효함”은 신적 기원과 연관이 있다. 로마서 8:28은 우리를 부르심은 “그의 뜻대로” 부르셨다고 하고 있다. 영원 전에 작정하신 그의 뜻이 29-30절에서는 부르심을 낳는 근원임을 밝히고 있다. “그의 뜻대로(28절)” “미리 아신 자들을 … 미리 정하셨으니(29절)”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셨다(30절).” 이 부르심은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출발한다. 그 뜻은 우리를 부르시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미 정(예정)하신 그들을 부르셨다. 예정의 구현이 바로 유효한 부르심이다. 뒤집어 말하면, 부르심이 유효한 것은 영원 전에 우리를 택하신 예정에 그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8:28-30의 유효한 부르심의 신적 기원의 의미를 에베소서 1:3-4을 통해 좀 더 상세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에베소서 1:3-14이 유효한 부르심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구원의 근거가 하나님의 작정에 있음에 대한 강조는 결국 유효한 부르심의 관점에서도 동일하다. “그 기쁘신 뜻(5절)” “그 뜻의 비밀(9절)” “그의 뜻의 결정대로(11절) 등은 유효한 부르심이 영원 전에 작정하신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함을 뒷받침한다. 하나님의 뜻의 기뻐하심과 그의 뜻의 비밀스러움과 굳은 결의가 곧 유효한 부르심이 예정하시는 하나님의 신성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유효한 부르심의 신적 기원을 뒷받침한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의지와 계획에 따라 결국 유효한 부르심이 나의 정황 속에서 실현된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유효한 부르심의 신적 기원을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된다. 유효한 부르심의 기원이 신적이고 영원하다는 강조가 이 일을 성부 하님의 일로만 치우쳐 생각하게 할 수 있겠지만, 삼위 하나님의 관여가 명백하다. 즉 삼위 하나님 모두의 사역이 유효한 부르심과 연관이 있다. 유효한 부르심을 위해 성부는 예정을(5절), 성자는 예정에 따른 구속을(7절), 성령은 구속의 결과의 적용(13절)을 하셨다.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삼위일체의 구도에서 사고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주요하다. 마찬가지로 이 본문을 통해서 삼위 하나님이 어떻게 유효한 부르심에 관여 하시는지 조명할 수 있다. (반복을 피하기 위해 구체적 설명은 아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논하는 맥락에서 하기로 한다.) 삼위일체의 구도에서 사고한다는 것은 유효한 부르심의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단동적으로(單動的, monergistically) 하님이 하시는 것임에 대한 강조이다(참고, 롬 9:11, 갈 1:15-16, 딤후 1:9). 삼위 하나님은 오직 당신만의 능력으로 창세전의 예정을 시간 속에서 실현하신 것이다.

WCF 10:1 첫 줄에서 유효한 부르심의 기원이 성부의 예정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이 생명으로 예정하신 모두를 그리고 그들만을” 유효하게 부르셨다고 적고 있다. 즉 WCF는 영원 전의 예정이 있기에 유효한 부르심이 구체적으로 실현된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그 유효한 방식은 우리의 마음을 밝히시고, 신적이고 영적인 일들에 대해 이해케 하시며, 의지를 새롭게 하여 선한 일을 도모하여, 유효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신다는 말로써 “유효함”의 의미를 서술하고 있다.

또한 WCF 10:1의 설명은 의도적으로 삼위의 기능을 구분하여 설명하는 특징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앞선 우리의 설명이 삼위일체의 관점을 취한 것도 이와 무관한 거시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WCF 10:2에서 유효한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특별 은총으로 되어진 것일 뿐 절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가치가 근거가 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내용도 앞서 우리가 논한 내용을 뒷받침한다.

 

V. 말씀과 성령의 방법

유효한 부르심은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되는 것이다. 유효한 부르심에 삼위가 관여하는 내용에 대해 방금 논의하였다. 여기에 우리는 삼위 외적 오소, 즉 말씀이 더불어 강조되는 특징을 살펴보려 한다.

유효한 부르심이 말씀과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강조가 신약성경에서 그리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행 2:41)”,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살후 2:14)” 등은 성령의 구원 적용 사역이 말씀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우리가 성령과 함께 말씀의 중요성을 의식하게 되는 것은 WCF의 기여임이 틀림없다. WCF 10:1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정하시고 수락하신 시간에 당신의 말씀과 성령으로(by his Word and Spirit) 유효하게 부르셨다”고 기술하고 있다. 참고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이하 소요리문답이라고 함) 제 31문은 유효한 부르심을 “성령의 사역(the work of the Holy Spirit)”이라고 적고 있다. WCF이 삼위일체의 관점으로 설명한데 비해, 소요리문답은 유효한 부르심이 그리스도의 은총의 일부라는 관점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유효한 부르심이 성령의 일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개혁신학 전통은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에 있어서 WCF는 좀 더 구체적인 언급을 한다. 성령과 더불어 말씀의 강조가 함께 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말씀과 성령으로”라는 공식이다. 성령과 말씀이 떨어지지 않는 구도에서, 성령에 대한 강조가 당연한 만큼 말씀이 강조되고 있다고 주석할 수 있다. 그것은 유효한 부르심이 성령의 사역임이 틀림없지만, 성령이 일하실 때 말씀과 분리되지 않은 관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의도이다.

성령에 대한 언급과 함께 말씀을 구지 언급하는 것은 WCF의 강한 의지라고 판단된다. 앞서 언급하였지만, 구원이 성령을 통해 적용되는 것이 사실이고, 특히 중생의 관점에서 보면 더더욱 무의식의 차원이 강조되어 말씀의 종요성이 간과될 수 있기에 WCF가 기술하는 방식에는 독특한 점이 있다. 굳이 중생의 장(chapter)이 별도로 없는 점도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중생 또한 말씀의 사역과 밀접한 거리에 두는 의미에서 유효한 부르심의 결과(제 2항)로 다룬 것은 중요한 의도가 있어 보인다.

WCF는 성령을 통해 구원은총이 분배될 때, 특히 유효한 부르심이나 중생과 같은 초기적 관점에서 볼 때, 말씀 사역이 선행되어야 함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WCF가 제1장에서 우선적으로 성경(The Holy Scriptures)에 대해 기술하였던 그 독특성(uniqueness)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는 판단이다. 특별히 WCF 1:5을 보면, 성경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유일한 길”이 된다는 강조와 함께 그에 대한 내적 증거는 성령에 의한 것임이 함께 강조되고 있다. WCF 10:1에서 말씀과 성령을 함께 묶은 것과 같은 정신이다. 그렇다면 WCF는 모든 논의를 말씀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는 의지가 확실하다. WCF 10:1에서 하나의 공식(formula이 된 “말씀과 성령으로”는 WCF 1:5에 비추어 해석할 때 그 의도를 한층 더 분명히 할 수 있다.

유효한 부르심에서 성령의 강조만큼 말씀에 대한 강조가 있어야 하는 것은 말씀은 초청(invitation)이면서 동시에 명령(command)이기 때문이다(마 4:17, 11:28-30, 눅 14:17, 고후 5:11, 20, 계 22:17). 이 초청과 명령의 사역은 특별히 사도를 통해 그리고 사도들의 기초위에 세워진 교회(엡 2:20)를 통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유효한 부르심의 교리가 담당하는 복음사역이라는 외적 부르심의 사명을 한 층 더 고취시킨다고 하겠다.

 

VI.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구체화

에베소서 1:3-14을 통해 놀랍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유효한 부르심의 기원이 성부에게 있음이 크게 부각되면서, 그 일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중심이 되는 특징이다. 부르심이 유효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를 우리의 실존적 정황 속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데 있다. 놀라운 것은 유효한 부르심이 실현하고자 하는 그 자체(연합)가 아미 창세전의 성부의 작정(예정)에서부터 작용하였다는 사실이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심과 지금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일이 유효하게 연결된다. 다시 강조하면, 부르심이 유효한 것은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일이 비로써 시간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다시 삼위의 구도로 말하면, 제 1위 성부의 작정이 제 3위 성령의 능력을 통해 제 2위 성자와의 연합으로 실현된다. (이것은 앞서 유효한 부르심의 신적 기원을 말하며 삼위일체의 구도를 설명한 것과 연관이 있다.) 유효함을 효과의 관점에서 다시 조명한다면, 성부의 계획이 있었기에, 성령이 에이전트(agent)가 되시어 단동적(monergistic) 신적 권능으로 우리를 정자와 연합케 하여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유효한 부르심)을 주신 것이다.

우리가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었다는 시실은 반드시 유효한 결과(구원)를 가져온다는 것이 바울이 이 본문에서 강조하는 사상이다. 그 유효한 신적 작정과 권능에 의해 영원 전의 연합이 시간대 속에서 나에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Westminster Larger Catechism, 이하 대요리문답이라고 함) 66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유효한 부르심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소요리문답 30문은 “유효한 부르심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신다.”고 적고 있다. 유효한 부르심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케 되는데 그 의미가 있다. 유효한 부르심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는 이 연결은 거절할(irresistivle) 수도, 번복될(irreversible) 수도 없고, 깨어지지도 안는(invincible) 연합의 힘을 말한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약속하신 언약이 바로 이 연합의 힘을 담보하여, 비로써 유효한 부르심을 통해서 성취된다. 앞 장에서 언약의 중심 사상은 연합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 유효한 부르심이 낳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구약백성과 맺으셨던 그 언약이 이제 나에게도 유효한 언약이 되며, 그 약속의 내용이 내게도 유효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연합을 통해서 오늘날 나도 언약백성임이 구체화되는 것이다.

유효한 부르심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는 구원서정의 각 국면들을 연계해서 생각할 수 있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유효한 부르심과 다른 구원서정의 은총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

유효한 부르심이란 성부의 작정에 따라 말씀을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성자와 연합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성령의 전적인 신적 능력을 통해 복음으로의 부르심(gospel calling)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순종하기 위해서 -또는 믿기 위해서- 중생의 필요가 제기될 수 있다. 중생하였기에 믿음의 반응, 즉 부르심에 순종하는 반응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옳은 말이다. WCF 10:2는 이에 대해 유효한 부르심이 말씀과 성령을 통해 중생(quickened)과 성화(renewed)와 그리고 이 복음으로의 부르심에 반응(answer)하며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embrace) 결과로 이어진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구도에서, 흔히 관심을 갖는, 어느 시점에 중생이 있는지에 대해서 WCF는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WCF 10:2는 주생, 성화, 순종, 믿음 등 구원서정의 각양 은총들과 유기적 연관성을 언급하고 있다. 별도로 중생의 장이 없이도 유효한 부르심으로 구체화된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구원서정의 각 은총들을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고 있다. 꼭 중생을 기점으로 삼아 구원서정 논의를 시작해야 할 논리적 부담을 극복한 것이라고 하겠다. WCF 10:2를 근거하여 유효한 부르심은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중생으로 그리고 의식의 차원에서는 믿음과 회개로 이어진다고 정리할 수 있다. 무의식의 차원은 인간의 의식과 무관하게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의미인 것을 이미 설명하였다. 의식의 차원은 인간의 차원에서 반응이 수반되는 것을 말한다. 의식의 차원은 교회론적 관점에서 보여지는 차원이며 확인이 가능한 차원이므로 공적 차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런 구분이 어떤 시간적 선후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하 안에서 다양한 은총의 국면들을 각기 다른 강조와 관점에 따라 사고하는 것뿐이다. 하나님이 부르심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와 묶으셨기에(연합), 그리스도 안에서 각양 은총을 누리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에 속해 있음이(연합)확인되는 것이다.

 

VII. 실천적 효과

유효한 부르심의 특징인 유효성(efficacy)의 강조가 자칫 유효한 부르심의 실천적 명령을 간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인(altogether passive) 반면 하나님은 단독적-전적 능력만이 부각되는 것이 유효성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대로, 부르심의 유효성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표출되는데 그 중요성을 둔다면, 부름을 받은 자의 삶이 연합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은 자연스런 기대이다. 요한복음 15:5의 강조처럼 연합은 풍성한 열매를 약속하고 있다. 그에 대한 바울식의 표현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한 은혜(엡 1:7, 빌 4:19, 골 1:27)를 누리는 삶이다. 정리하면,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것이 연합의 삶의 특징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지속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기를 촉구한다(엡 1:18). 이 풍성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4).”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삶이 우리의 삶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구약 이스라엘과 맺으셨던 그 언약의 모든 성취가 내게도 풍성하리라는 기대와 소망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합(union) 속에서 누리는 교통(communion)의 삶이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심이 그리스도 안에서 유효하게 우리가 언약의 풍성한 열매를 누리도록 부르셨다. 이것이 유효한 부르심을 믿는 우리가 믿고 붙잡아야 할 약속이며 삶 속에서 누려야 할 풍성인 것이다.

또한 유효한 부르심은 거룩의 부르심이다. 신약성경은 부르심과 거룩이 병행해서 서로를 수식(qualify)하는 특징을 보인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오직 너희를 부르신 것처럼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리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5-16).” 바울과 베드로 모두에게 부르심과 거룩은, 기원과 내용의 관점에서 볼 때, 상호 수직적이라는 것이 공통적으로 부각되는 사상이다. 특히 에베소서 4:1에 비추어 위의 본문들을 함께 생각할 때,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특징이 되는 거룩의 기준이 부르신 자에게서 오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엡 4:1)” 거룩하신 하나님이 부르셨으므로 우리에게서 거룩이 요청된다. 즉 부르심은 그 기원과 내용에 있어서 거룩이 그 속성이 되므로 그 부르심의 속성이 우리의 삶에 실천적으로 반영이 되어야 할 명분이 더욱 뚜렷해진다.

우리를 유효하게 부르셨기 때문에 거룩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가 우리에게 부담이 될 필요는 없다. 거룩으로의 명령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기 때문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4-45)”는 말씀이 우리를 죽이는 율법(고후 3:6)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명령은 원래 제사의 정황에서 주신 말씀이다. 레위기서에서 매우 자세하게 -그래서 너무 복잡하게 느껴질 정도로- 제사제도를 주시는 것은 우리를 힘들게 만드시려는 데에 하나님의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 죄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 올 수 없었던 자들을 하나님께 나아 올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주시기 위하여 만드신 제도가 제사이다. 그렇다면 그 꼼꼼하고 복잡하게 보이는 제사제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하는 것이 맞다.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시기 위해 마련된 사랑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서에서 로마서 1:7의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라는 표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로마에 있는 교인들과 거룩하다고 불리는 자들을 등치시키고 있다. 거룩하다고 불리는 자들이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다. 즉 거룩으로의 부르심 뒤에 하나님의 사랑이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유효하게 부르신 것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거룩으로의 부르심이 죽이는 율법이 아니라 살리는 복음인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효한 부르심의 결과는 매우 결정적(definitive)이고 단절적(discontinuous)이다. 이 의미에 대해서는 나중에 성화를 논할 때 자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부르심의 관점에서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부르심이 유효한 것은 그 결과가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어서 점차적으로 완성되어야 하거나 두고 봐야 알 수 있는 그런 어떤 여지도 부정한다. 신약에서 말하는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르시고, 죄에서 구원으로 부르신 것은 분명히 단정적이고 단절적 의미이다. 더 이상 죽음 가운데 있지 않고 더 이상 죄 가운데 버려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유효한 부르심에 대한 실천적 반영이 절실히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