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Chapter IV. 그리스도와의 연합

예림의집 2013. 9. 30. 21:23

 

Chapter IV. 그리스도와의 연합                

 

앞 장에서는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구원을 성령이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것에 대해 신약성경이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지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신약성경이 성령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제한적이고 구체적인 성질이 것이었다. 그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을 그리스도의 구원의 일로 이해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면 성령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우리의 구원이 되게 하시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구원을 우리 것이 되도록 충족시킬 마지막 연결고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속사적 결과가 구원론적 은총이 되게 한다. 우리의 논의에 앞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흔히 전통적으로 다루어져 왔던 것처럼, 구원서정 가운데 한 국면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오히려 구원서정 전체를 담고 있는 틀이고 구원서정이 일어나는 환경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찾는 구원서정 논의의 방법론이 된다.

본 장에서 우리가 연합하는 그리스도가 어떤 그리스도이고 그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합하는지 연합의 이론과, 그 연합의 결과가 우리를 위해 어떤 혜택을 낳는지 설명할 것ㅇ이다. 그리고 그 논의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떤 의미에서 앞으로 우리의 구원서정 논의의 방법론이 되는지 설명할 것이다.

 

I. 누구와 연합?

우리는 이제까지 제한적이나마 다룬 본문들을 통해서 신약은 성령의 사역을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을 가져다주는 일을 하시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해될 때 전제되는 특징은 성령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그리스도가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써 우리가 연합하게 되는 그리스도이다. 승천하시고 하늘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지금도 우리를 다스리시는 중보자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하는 데에 연합의 모든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연합의 의미는 우선적으로 연합의 대상, 즉 우리가 누구와 연합하는지를 아는데서 그 연합의 특성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이미(already) 부활을 통해 구원을 완성하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아직(not-yet) 재림을 통한 구원의 최종 완성을 남겨놓고 계시다는 기독론적 이해가 우리가 그 분과의 연합을 통해서 구원론적으로 누리게 되는 구원의 내용과 역동성에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 1장 3-4절은 이 점에 대해서 우리가 연합하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이해하기 위해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이 구절은 기독론 논의에서 그리스도의 양성(신성과 인성)에 대한 근거구절로 이해되어왔다. 3절의 “육신으로는”은 인성을 4절의 “영으로는”은 신성을 말한다는 것이다. 양성의 의미도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이 “영-육”의 대비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시대적 또는 구속사적 대비를 보게 된다. 즉 “육”은 그 자체가 창조된 인간의 존재 방편으로써 그리스도가 입으셨던 인성을 말하는 것으로, 그 인성을 입고 다윗의 혈통으로 나셔서 행하신 사역 전부에 대한 함축적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성육신하시어 죽으시기까지의 과정, 즉 인성을 입으시고 율법 하에 놓이시며 겪으셔야 했던 모든 고난의 질서, 체제, 기간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3절과 대비를 이루는 4절에서 “영”이 함축하고 있는 바가 마찬가지로 단순히 신성의 의미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4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영으로”의 부활은 육을 배제하지 않기에, 영과 육의 대비를 너무 이분법적 도식으로 보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성결의 영”은 그리스도의 신성보다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3절과 대비되어, 부활을 기점으로 성령의 활동을 통해 진행되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새로운 시간, 질서, 체제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영으로”가 함축하는 것이 “능력”과 짝을 이루면서 성령의 사역에서 기대되는 새 시대의 의미가 한층 고조되고 있다. 정리하면, “영”과 “육”의 대비는 육으로 “다윗의 아들”이 되어 이룬 과거의 역사(성육신에서 죽으심까지)와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새로운 역사(부활에서 재림까지)의 대비가 된다. 우리가 연합하게 되는 그리스도에 대해 성경은 두 시대적 대비를 통해 그리스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보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3절과 4절에서 관찰하게 되는 대비가, 시대적 대비이며, 구속사적 대비이며, 종말론적 대비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이해에 중요한 관점을 더함을 알게 된다. 구원서정이 단순히 일련의 시간적 순서가 아닌 것도 우리가 연합할 그리스도가 누구냐의 문제를 정확히 함으로써 동반해소가 가능하다. 부활 이후, 특히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의 시점에서 신약이 이해하는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구도를 전제한 가운데 이해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이다. 즉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성취는 “이미-아직”의 종말론적 역동성을 지니고 있고, 우리는 그 하늘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때문에 그 연합을 통해서 누리게 되는 구원 역시 정적인 것이 아닌 “이미-아직”의 종말론적 역동성과 긴장감을 반영하는 성질이여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서정 논의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을 통해 되어질 때, 즉 우리가 연합하게 되는 그 대상에 대해 신약성경의 의도를 따라 이해하게 될 때, 기독론적-종말론적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하게 된다고 하겠다. 그 유익은 구원서정 논의의 방법에 새로운 방법론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구원의 삶 자체에 대한 새로운 생명력과 긴장감을 주는 유익이 있게 된다. 과거의 정적-순서적 개념의 구원서정 논의가 가져오는 고질적인 문제 중 가장 전형적인 문제 하나만 지적한다면,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순서적으로 이해할 때 오는 반율주의적(antinomian) 태만과 방종이다. 칭의 받았으므로 구원에 대한 확신은 있으나 성화에 대한 기대와 순종은 없는 모습들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생활은 우리가 누구와 연합하였나를 아는데서 출발하며, 그 성격이 결정된다. 우리의 구원의 삶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있기 때문이다.

 

II. 연합의 성질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연합이 소개되고 있다. 연합의 최고의 형태로 삼위 하나님의 연합이 있고(요 17:21),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연합이 있고(요 1:14), 아담과 그 후손 사이의 연합이 있고(롬 5:12-19), 남편과 아내의 연합이 있다(엡 5:22-33). 그 외에도 몸과 지체의 연합이 있고(엡 4:16), 몸과 영혼의 연합이 있고(약 2:26), 포도나무와 가지의 연합이 있고(요 15), 심지어 건물의 터(기초)와 모퉁잇돌의 연합도 등장한다(엡 2:20). 그러나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연합의 경우들은 연합의 성질과 의미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비록 연합이라 하더라도 수사적 유사성일 뿐 동질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생각할 때에 이들 중 어느 한 형태의 연합과 동일시 여긴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가 삼위일체처럼 그리스도와 존재론적 일체를 이루는 거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양성처럼 우리가 인간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와 신성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단지 어떤 수사적-유비적-상징적 강조 정도로만취급 되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단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위에서 말한 연합은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떤 성질의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적인(spiritual) 연합이다. 신약성경에서 “영적”이라는 말은 우리 존재의 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의 관계성에 근거를 두는 말이다. 고전 2:10 이하의 경우처럼, 신약에서 “영저인 사람”이란 성령이 내주하시며 그를 도우시며 다스리시어 그의 삶이 거룩하여져 영적인 것들-하나님의 것들-에 대해 알게 되고 즐거워하고 추구하는 삶이 가능해지는 결과와 그 의미를 내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영적인 연합이라고 할 때, 그 연합은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연합이라는 의미가 우선된다. 앞선 논의에서 이미 확인하였듯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성령의 내주는 그리스도의 영의 내주를 의미한다. 고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논리적 힘에 의한 설득이 아니라, 성령이 이 연합의 실제적 주체(agent)이고 결속(bond)이 되시기 때문이다(고전 6:17, 19, 12:13, 롬 8:9-11, 요일 3:24, 4:13).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킨다. 성령 즉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다(요 15:4, 갈 2:20). 고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영적이란 의미란 우선 연합은 성령이 하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적인 연합은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전인격적 연합을 말한다. 우리 존재의 일부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전부가 연합하는 것이다. 이 의미는 연합의 의미의 결과적 차이를 가져온다. 연합의 효과가 단순히 우리 존재의 일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연합이 전인격적인 차원이라면 그 결과와 변화 또한 전 인격적 차원에서 기대하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 감성만 달구고 행동의 열매가 없는 것은 연합의 결과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영적 연합은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해지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영적인 연합이라는 말은 연합이 성령의 사역인 동시에 성령이 그 연합이 주는 그리스도의 은총의 전부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성령은 선물을 가져다주는 분(giver)이시면서 동시에 가져다주는 선물(gift) 자체이다(눅 11:13, 행 2:38). 신약성경은 성령 즉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그 자체를 구원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주는 구원의 모든 은총이 성령에 의해 소통(communion)되며 동시에 그 소통의 전부 또는 소통 자체가 바로 성령이다. 성령에 의해 연합(union)이 이루어지고 그 연합 안에서 소통(communion)이 있다. 이것을 다시 앞서 논했던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의 관점에서 보면,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구원을 적용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때 성령이 적용하는 구원이란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 연합 안에 구원-즉, 성령이 주시는 해택(benefits), 선물(gift), 소통(communion), 은총(grace)-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떠나서는 구원을 생각할 수 없고, 성령을 떠나서 구원을 생각할 수 없다. 성령에 의해 연합이 이루어지면서 그 연합 속에서 성령이 소통하시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비적(mystical) 연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영적인 연합이라는 말과 궤를 같이 하는 말이다. 즉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연합은 신비적인 연합니다. 흔히 신비라는 단어는 우리의 이해와는 거리가 멀거나 전혀 불가한 경우에 대하여 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성령이 하시는 일이기에 그 자체가 우리에게 전적으로(exhaustively) 이해가 가능한 일은 나닌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설명하면서 그 연합 자체의 “신비가 크다”고 고백하고 있다(엡 5:32). 그리나 특히 로마서 16장 25-26절과 골로새서 1장 26-27절에서 보듯이, 바울이 말하는 “신비”에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 감추어졌던 것이 이제 때가 되어 드러나 알게 되는 의미가 있다. “신비의 계시(롬 16:26)”와 “이 비밀의 영광의 풍경(골 1:26)”이 그렇다. 고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신비적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해가 불가한 “신비”가 아니라, 그 자체가 드러남으로써 경이와 감격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신비”는 구속사적-종말론적 의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되었고(엡 1:3-14), 그리스도와 더불어 장사되고 일어났으며(롬 6:3-11), 지금도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다(갈 2:20). 기독론적 관점에서 그리스도가 구속사적으로 완성하신 구원이 종말론적 역동성을 갖고 우리에게 적용되는 그 자체가 “신비”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바로 “신비”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가 되는 연합은 영적인 연합이고 신비적 연합이다.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와 성도가 연합되기에 영적인 연합이고, 그 자체가 우리의 이성의 범위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드러나는 신비와 경이의 연합이기에 신비적 연합인 것이다.

 

III. 기독론적 근거

우리가 논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서정의 일이다. 구원서정으로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다시 말해, 구원론적 연합은, 우리의 모든 논의 방식이 그러하듯이, 기독론적 근거를 갖고 있음을 강조한다.

먼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원성을 반영한다. 그 영원성은 뒤로는 삼위 간의 교통의 영원성이고 앞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영원성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삼위일체의 영원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 뒤로 영원 전붜 성부와 성자가 누렸던 사랑의 교제를 앞으로 영원히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삼위간의 영원한 교통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궁극적인 동기가 되는 것은 앞선 5절에서도 확인 된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여기에서 지금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두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즉 구속사의 완성을 통해 그리스도가 받으시는 영화가 다른 성질의 영화가 아니라 창세전에 삼위일체 안에 누렸던 영화이다. 그리스도의 기도는 바로 그 영화를 자신에게 속한 자들이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더불어 영원히 누리기를 원하신다는 내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구원의 영원성의 차원이 연결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영원성의 차원을 잘 나타내는 또 다른 본문이 에베소서 1장이다. 에베소서 1장 3-14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가 바울 사상의 중심이 되고 있다. 바울은 편지 서두부터 갑작스럽게 예정론 논의를 하자는 의도가 아니다. 방금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고 문안 인사(1-2절)를 한 바울은 2절에서 14절까지 이어지는 한 문장을 통해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송영(doxology)에 해당된다. 이 송영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우리의 개인적인, 주관적인, 그리고 가변적인 것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에 근거하고 있음을 찬양하고 있다. 즉 구원의 영원성이 바울의 송영의 중심이다. 과거지향적 관점에서, 영원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것에 감사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이 영원한 것에 대한 감사를 돌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의 근원이고 출발이고(fountain), 현장이고 환경이고(reality), 목적이고 방향이다(end). 영원 전부터, 지금 현재에도, 그리고 영원 끝까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구원이 있다.

그 외에도 바울서신 가운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영원성을 말하는 구절로 디모데후서 1장 9절과 로마서 8장 29절을 들 수 있다. 구약에서는 대제사장의 직분을 통해 연합 개념이 전달된다.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대제사장은 백성들과의 연합을 상징한다(레 9장, 히 9:7). 특히 이사야 53장이 묘사하고 있는 고난 받으시는 메시야의 이미지는 연합 개념이 전제되는 것으로, 연합을 통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대속의 개념이 성립된다. 신약의 복음서에서는 연합의 개념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단지 목자와 양, 포도나무와 가지, 등의 비유를 통해서 연합이 구원의 중심적 개념임을 전제하고 있다. 아무래도 연합이 구원을 이해하는데 중심 개념이 되는 것에 대한 설명과 강조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바울을 통해서 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갖고 들어오는 영원성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성취가 영원 전에서 영원 끝까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의 강조이다.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순히 구원의 한 국면이나 체험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을 담고 있는 틀(framework)이라는 점에서 구원의 기독론적 근거를 부각시키는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둘째로, 구원론적 연합은 기독론적 연합 또는 성육신적 연합에 근거한다. 구원론적 차원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 지나칠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사람인 우리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먼저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우리가 그 분과의 연합이 가능한 것을 보이셨다.

로마서 8장 29절, 골로새서 1장 15절, 18절, 히브리서 1장 6절, 요한계시록 1장 5절 등은 그리스도를 “맏아들”, 또는 “먼저 난 자”라고 부르고 있고, 고린도전서 15장 20절, 23절은 그리스도를 “첫 열매”라고 부르고 있다. 로마서 8장 17절은 그리스도와 우리가 같은 “후사”라고 부르고 있다. 이 구절들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인성을 입으시고 하신 모든 것에 대해 우리가 동참 또는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맏아들”, “첫 열매”, “후사” 등은 같은 성질의 것이 맏아들과 한 형제되는 우리들에게서, 첫 열매의 수확으로 시작되는 추수 전체에게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는 우리들에게서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구도에서 발견될 것을 기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때 “맏아들”, “첫 열매”, “후사” 등이 함축하는 기독론적 의미가 우리에게 구원론적 근거가 됨을 보장(guarantee)하는 것은 단순히 유비적 차원에서 갖는 기대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셨기 때문에 우리에 대해서 그리스도가 “맏아들”, “첫 열매”, “후사” 등이 되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그가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셨기에 구속사적으로 이루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을 연합의 관점에서 다시 한다면, 기독론적-성육신적 연합이 구원론적-성령론적 연합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새삼 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기독론적 연합과 구원론적 연합이 같은 성질의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성육신적 연합은 인성과 신성이 공존하는 연합이지만,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가 신성을 갖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구원론적 결과가 우리의 것이 되는 연합니다. 또 한 가지 유념할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연합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취한 인성은 분명히 모든 인류의 인성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그 공통점이 그 연합의 혜택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믿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지 못한다. 성령의 사역에 의한 오직 믿음으로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한 “형제”가 되게 하는 것이다(히 2:14-17).

셋째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를 구속사적 사건과 연결시킨다. 구속사적 사건이라 함은 기독론적 사건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일이 모두 기독론적 사건이지만, 같은 사거들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생각하려는 의도적인 강조이다.

로마서 6장 1-9절은 우리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에 동참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기 위해 중심 되는 개념이 그리스도와의 연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3절)” 세례 받았고, “그와 함께(4절)” 장사되었고, 그의 죽음에 “연합(5절)”하였고,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6절)”, “그리스도와 함께(8절)” 죽었다면, “그와 함께(8절)” 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명시적으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의 논지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바울의 논리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한 것인가? 세례는 지금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교회적으로 확인하며 인치는 의미가 있는 성례이다. 그렇다면 세례는 구원서정에 속하는 일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울은 그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구속사적 사건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한 것이 된다고 말한다. 물에 잠겼다 나오는 예식이 죽음으로 내려갔다가 생명으로 부활하신 사건으로 대비되고 있다. 그러나 그 대비가 단순한 상징이 아닌 것은 연합에 담겨 있는 신비스런 비밀과 그 효과(구원) 때문이다.

바울은 연합을 통해서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고, 또한 부활하였다고 말한다. 4절에서 “장사되다”와 “살리다”가 대비가 되고 있다. 두 동사 모두 과거에 종료된 사건을 의미하는 과거시제로 되어 있다. 문장 상으로는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가 장사된 데에는 연합된 것이 분명하지만, 부활에도 연합된 것인지 정확히 명시적이지는 않다. 단지 본문은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처럼 우리도 살 것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죽음에는 연합되었지만 부활에는 연합된 것이 아니거나 모른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문맥을 볼 때 오히려 자연스럽지 못하다. 우선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별개의 것으로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각기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그래서 하나의 사건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어서 나오는 5저로가 8절이 그에 대해 뒷받침하고 있다. 즉 바울의 논리 가운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연합되었지만, 부활에는 연합되지 않았다는 논증이 더 본문의 의도와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죽음에 연합되었기에 부활에도 연합된 것이 당연한 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울이 대비시키는 것은 일대일의 대비, 즉 세례라는 한 사건과 그리스도의 죽고 부활하신 한 사건이다. 3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세례 때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을 전재하고 있다. 그것은 물에 들어가고 나오는 사건을 따로 따로 구분하여 말한 것이 아니라 세례를 한 사건으로 보고 한 말이다. 즉 우리는 물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모두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 그 연합 자체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한 사건으로 보는 대비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활에도 연합되었다는 논리이다. 단지 6장 전체의 문맥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의 부활에 연합되었으므로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 되었다는 차이점을 강조하고 있기에 표현상 강조가 부활 후의 삶 쪽으로 옮겨졌을 뿐이다. 달라지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우리가 연합되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논리는 연합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우리에게 너무도 놀라운 사실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다고 할 때, 그 연합은 이미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에 우리가 연합되었음을 확인하는 말이다. 용어를 달리 표현하면, 구원서정(ordo salutis)의 연합은 이미 구속사적(historia salutis) 사건 속에서의 연합을 전제 또는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순히 구원서정의 한 국면이 아니라 구원서정과 구속 사건을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구원을 누린다는 의미에서 그 연합은 구원서정의 의미가 되지만, 그 연합은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구속사적 사역과 성취에 동참되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비로소 우리가 애초에 제기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어떻게 2000년 전에 있었던 사건(구원)이 나의 사건(구원)이 되는지 질문했었다. 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2000년 전의 구속사의 구원이 지금 나의 구원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구원서정과 구속사가 나에게서 만나는 것이다.

연합의 구속사적 차원을 말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외에도 그리스도의 승천에도 연합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구원을 누린다고 할 때, 그 말은 구속사적 차원에서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것을 전제한다. 이미 누가복음 24장과 요한복음 14-16장 등을 통해서 살펴 본 것처럼 그리스도가 보내시마 약속하신 성령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다. 좀 전에 성령론적 연합을 위한 근거로 성육신적 연합을 말했다. 부활과 승천의 관점에서도 같은 논리를 발견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고, 이성을 가지신 채로 승천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이 본 그 이성을 가지신 모습으로 다시 오신다고 했다(행 1:11). 몸의 부활과 인성을 지니신 승천은 현재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와 지상에 있는 우리가 연합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근거가 된다. 그의 부활과 승천이 이미 인성을 지니시고 계시기에 우리는 그가 완성하신 구원을 그 영을 통해서 누리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34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음을 말하고 있다. 이때 그리스도가 하신 구속사적 일들이 우리를 위한 것이 되는 것은 1절에서부터 유지되는 전제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8장 전체의 대 전제인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이 주어지고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시는 그리스도의 일이 우리를 위한 것이 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이다.

골로새서 3장 1절에서도 같은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부활에서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전제로 이제 승천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바라볼 것을 권면하고 있다. 로마서 6장에서 보았던 강조와 같은 것으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부활에 연합되었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것을 근거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연합을 통해서 승천하시어 영광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소망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신약 전체가 승천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대 전제로 하고 있지만 특별히 언급할 수 있는 책이 히브리서이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시어 단번에 희생이 되신 영원한 대제사장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전제되어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이다. 1장 3절, 4장 14절, 8장 1절, 10장 12절, 12장 2절 등은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소개되고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강조는 우리가 연합하는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신 대제사장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이제까지 살펴 본 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순한 구원서정의 한 단계나 국면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와 기능을 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구원이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룸으로써 구속사적 성취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구원서정이 일이 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구원서정과 구속사가 연결되고, 구원론과 기독론이 연결되는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연합을 통해 구원서정 논의가 구속사의 근거를 두게 되고, 구원론 논의가 기독론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가 찾고 있는 구원서정 논의의 방법론이 되기에 적합하다는 제안이다.

 

IX. 구원서정 논의의 방법론

이제까지 우리는 성경을 중심으로 구원서정 논의를 위한 방법론을 찾았고, 그 결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결론을 개혁신학 전통과 비교하며 방법론으로써의 정당성과 그 방법론이 주는 의미와 장점을 재차 확인하려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이하 WCF라고 약칭함)를 보면 제 10장에서 15장까지 구원서정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단원(Chapter)은 없다. 이에 대해 우리는 WCF가 구원서정을 논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인식이 없이 진행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앞의 논의와 뒤의 논의가 상호 어떤 연관관계를 갖고 있는 일련의 순서(order)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평가는 좀 성급한 판단이라는 생각이다. 좀 더 큰 틀에서 WCF가 갖는 신학적 구조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구원서정에 앞서 7장과 8장을 보면, WCF는 언약(God's Covenant with Man)과 중보자 그리스도(Christ the Mediator)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점이 우리에게 크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우리가 WCF를 읽을 때 고려해야 하는 것은 신앙고백서는 조직신학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어떤 주제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은 채, 불과 몇 개의 문장으로 압축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위는 신앙고백서를 읽을 때, 그 압축된 문장 속에 담겨있는 사상과 의도를 충분히 찾아내어 반영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런 관점에서, 구원서정 논의에 앞서 7장과 8장이 제시하는 그리스도가 언약신학의 중보자 되심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약 개념이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주는지, 특별히 우리의 관심사인 구원서정을 앞에 두고 언약개념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구약을 지배하는 언약 사상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표현에 잘 나타난다(참고, 출 6:7, 레 26:12, 렘 31:33, 겔 34:30, 36:28, 37:27). 하나님은 스스로 이 약속을 이스라엘과 맺으셨고, 스스로의 약속에 대해 신실하셨으며, 그리스도를 보내시며 그 언약을 성취하셨다. 언약의 특성을 논할 때, 우선적으로 언약은 신적(divine)이고, 주권적(sovereign)이고, 일방적(unilateral)이고, 무조건적(unconditional)이고, 전적으로 하나님 만에 의해(monergistic) 시작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전제하에 언약은 쌍방적(bilateral), 조건적(conditional) 성질을 갖는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에서 보듯이, 언약은 하나님의 우선적이고 일방적 개입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약의 조건을 지키실 것을 요구하셨다. 율법을 주시며 순종하면 복을 주셨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게 하셨다.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시며 언약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셨고, 우리를 부르신 전제 하에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 조건을 제시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신 언약의 핵심 개념은 연합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서 당신을 당신의 백성과 연합하셨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 비로소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이 의도하는 연합이 완성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었던 약속이 구약시대가 지나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고, 그 때의 그 약속은 지금도 유효한 약속이다. 구원론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오늘 우리가 누리는 구원은 그 때 이스라엘에게 했던 약속이 마침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셨던 언약이 이제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통해 완성되었고 그리고 이제 나의 정황 속에서 미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언약을 구현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애초에 원하셨던 당신과의 연합(communion)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언약의 핵심 개념은 연합에 있는 것이다.

다시 WCF로 돌아와 그 구성과 진행을 볼 때, 비록 WCF가 별도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지 않더라도, 이미 제 7장과 8장을 통해서 연합 개념이 전제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제 7장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관계를 맺으셨으며, 제 8장에서는 그 언약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현됨을 천명함으로써 연합 개념이 앞으로 제 10장 이하에서 정의되는 구원서정에 전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신앙고백서로서의 특성상 긴 설명이 없더라도, 우리는 WCF의 구성과 진행이 어떤 의도와 전제를 갖고 움직이는지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WCF를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구원서정 논의와 관련하여 방법론적 측면에서 유익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이 관찰을 통해 이미 WCF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떻게 구원서정 논의에 근간이 되는지 의식하고 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WCF 전통을 따른다고(subscribe) 할 때, 그것은 내용에 대한 동의만이 아니라 WCF가 취하는 논의 방식(method)에도 동의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WCF가 취하는 방법론을 따를 필요가 있다. 그것은 WCF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언약의 역사, 즉 구속사(historia salutis)를 전제하며 구원서정(ordo salutis)을 논하였던 방법론이다. 우리가 구원서정 논의를 위해 애써 찾고 있는 방법론,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을 통해 논하기를 원하는 방법론이, 이미 개혁신학 역사 속에서 WCF를 통해 실천되었던 방법론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서정 논의의 방법론으로서 몇 가지 중요한 유익을 가져다준다. 무엇보다도 구원서정 논의가 그리스도 중심적인 논의가 되게 한다. 즉 기독론적 연관 관계에 무게를 둔 구원론 논의가 되게 한다. 구체적으로 구원서정이 논하는 구원의 각 국면(중생, 칭의, 성화 등)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에 대해 의도적으로 생각의 초점을 맞추려는 효과가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경이 의도하고 있는 구원 역사가 어떤 강조를 갖고 진행하고 있으며, 구원을 어떤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이 성경이 하고 있는 방법에 가장 근접한 것인지를 반영하는 방법이라고 하겠다. 구속 역사의 역동성이 반영된 복음의 제시만이 복음이 갖고 있는 생명력과 역동성을 가장 잘 반영하는 방법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구원의 종말론적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우해 완성하시고 성령이 적용해 주시는 구원은 분명히 “이미와 아직(already and not yet)"의 종말론적 역동성을 갖고 있으며, 기로소 거기에 복음의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이미 칭의 되었으나 아직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소망하는 역동성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있다는 의식과 실천이야말로 신약이 제시하는 구원의 삶의 본질인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의 의미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근거와 확신을 갖게 한다. 많은 경우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본인이 가졌다고 생각하고 마땅히 누려할 구원에 대해 불확실한 경우가 많다. 기독교에서 구원이라는 말처럼 보편적인 말이 없으면서도, 구원처럼 자주 오해되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나의 구원이 정확히 무엇이냐고,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그리므로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등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그리스도와 함께 공유하느냐로 답할 수 있다는 것이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바다.

“경건한 사람들은 이 성례(성찬)를 통해 큰 확신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성찬을 통해 그들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성장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데, 즉 그의 것이면 무엇이든지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확신하게 되는 것은, 그가 상속받은 영생이 우리의 것이며, 그가 이미 들어가신 하늘나라가 그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더 이상 우리로부터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하신 우리의 죄로 인해 정죄될 수 없는 것은 그 죄가 마치 자신의 것인 냥 그가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교통(mirifica commutatio)입니다. 즉 그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으로 그는 우리와 하나가 되셨고, 우리와 같이 인자가 되심으로써 우리를 당신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심으로써 그는 우리를 위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죽음을 취하고 우리에 영생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취하시고 그는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가난을 받으시고 그는 우리를 당신의 부로 부요케 하셨습니다. 우리를 억누르던 무거운 죄를 짊어지고 우리를 당신의 의로 입히셨습니다.”

 

마치 시(詩)처럼 드리는, 이 아름다운 고백은 칼빈이 성찬에 대해 설명하는 중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이 인용이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의 것이 우리의 것이 된다는 칼빈의 강조이다. 칼빈은 자신의 찬 소리로 외쳤다. “그의 것이면 무엇이든지 우리의 것이다(Whatever is his may be called ours).” 그것은 칼빈의 “놀라운 교통(mirifica commutatio)”이라고 표현했다. 영어로는 wonderful exchange로 표현된다. 이 교통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우리와 교류되거나 공유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인성으로 오시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이루신 구속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가 구속사적으로 -구체적으로 성육신에서 부활까지- 담당하시고 성취하신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할 때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칼빈이 볼 때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통해 우리가 누리게 되는 구원인 것이다.

실천적 측면에서, 칼빈이 “놀라운 교통”이라고까지 표현하며 강조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확실한 이해는 우리의 구원의 삶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음에 대해 확신한다면, 그리스도의 것(구원)을 과감하게 추구하며 누리는 활력 있는 신앙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구원은 받았으나 생명력이 없고 실제로 내가 무엇을 누리며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이지 못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칼빈의 구원론의 중심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은 바울이 증거하는 구원의 중심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음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개혁신학의 기초를 놓은 칼빈의 구원론에서 우리는 단적인 증거로나마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historia salutis)과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삶(ordo salutis)이 연결되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관심을 갖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이미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서정을 이해하고 논하는데 방법론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결론이 된다. 그렇다면, 개혁신학 전통은 칼빈을 비롯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이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서정 논의의 방법론으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제가지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구원서정 논의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지 살펴보았고 결국 우리가 찾는 방법론이 됨을 확인하였다. 이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우리의 구원서정 논의의 방법론으로 설정하면서, 구원서정의 국면들에 대한 개별적 논의에 앞서 우리가 어떤 특징들을 주안점으로 삼아야 할지 정리해 보는 것이 유익하겠다.

1. 구원서정의 각 국면들이 종전과 같이 개별적인 논의의 주제가 되기보다는 그리스도와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조명이 중요하다. 그 점에 대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서정의 각 국면을 누리게 하는지 살피는 것이 우선적 관심이 될 것이다.

2. 그 접목의 과정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방법론을 통해 구속사적 내용(historia salutis)이 우리의 구원의 삶(ordo salutis)에 얼마나 생명과 동력이 되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속에서 발견되어야 하는지가 중요한 관심이 될 것이다.

3. 우리의 목표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방법론을 통해서 구원서정의 각 국면을 논하는 것이, 실천적 측면에서, 우리의 구원의 삶에 어떤 차이점을 가져오는지 논할 것이다. 구원서정의 삶이란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사은 것이며, 그렇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방법론이 과연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방법론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