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III. 사도행전 2장 1절-21절

예림의집 2013. 9. 8. 14:17

 

III. 사도행전 2장 1절-21절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누가는 성령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다는 것이 서두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누가복음에서는 -대체로 복음서 전부가 그런 면을 보이는 것이 사실인데- “성령”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다소 자제된 듯한 느낌을 주는 반면, 사도행전은 서두에서부터 “성령”이라는 단어가 거침없이 등장(2, 5, 8절)할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전체에 타나나는 빈도(51회)를 보더라도 그 차이를 쉽게 느낄 수 있다. 특히 누가복음을 마치고 문맥(24:49)에서 분명히 성령을 두고 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았던 것과 대비한다면 분명히 누가가 사도행전을 시작하며 성령에 대해 갖는 기대는 특별하다고 하겠다.

그 특별한 기대는 바로 사도행전 2장의 사건과 연결된다. 흔히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불리는 2:1-13의 본문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 기억하는 본문이다. 요란한 바람소리와 함께 불꽃같은 특이한 모습으로 성령이 강림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상상이 되지는 않지만 나름 하나의 장면을 떠올려 보는 것이 대체로 2장을 기억하는 방식일 것이다. 더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이 방언이다. 사도들이 방언을 하자 모인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말로 이해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조금은 각색되긴 하였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도행전 2장하면 이 정도의 기억을 갖고 있고 그것이 2장에 대한 이해의 전부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2장을 그런 식으로 기억하고 이해해도 되는 것인가? 과연 그것이 전부인가? 정작 중요한 핵심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 핵심의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본문을 차근차근 읽어 보려한다.

 

성령이 강림한 결과에 대해 2장 본문이 제일 먼저 말하는 것이 4절에서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령의 충만함의 결과는 그들이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서 본문은 그들이 다른 언어로 말하게 된 것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되어진 것임을 역설하고 있음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즉 그들이 “다른 언어”로 말하는 현상이 성령 강림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점을 유념하며 본문을 읽어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

여기에서 “언어”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글로싸’라는 단어로 개역성경에서는 “방언”으로 번역되었던 단어이다. 개역성경에서 “방언”이라는 단어가 4절 말고도 6절, 8절, 11절에 등장한다. 그러나 개역개정은 4절과 11절의 ‘글로싸’를 “언어”로 옮기고 있고, 대신 6절과 8절의 “방언”은 “디아렉토스”를 옮긴 것이다. 그렇다면 글로싸와 디아렉토스는 각기 다른 것인가? “언어”와 “방언”으로 구분할 만큼 차이를 두어야 하는가? 사전적 의미로 글로싸는 “혀”, “언어”, “방언” 등의 보다 일반적인 개념을 말한다. 영어의 gloss(혀, 언어) 또는 glossary(어휘, 용어사전) 등이 글로싸에서 온 말이다. 반면, 디아렉토스는 한 나라나 지방의 언어 특성이 반영된 언어활동을 의마한다. 즉 “사투리” 또는 “방언”으로 번역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글로싸나 디아렉토스가 각기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되면서, 흔히 오늘날 은사파 사람들이 구분 짓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언어와 방언으로 구분 짓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글로싸나 디아렉토스가 모두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겟다. 좀 더 구체적인 강조를 하는 문맥에서 “각각 자기의(6절)”, “우리 각 사람이 난 곳(8절)”이라는 한정적/제한적 표현과 함께 디아렉토스 단어가 등장한다. 그러나 11절에서 “우리의 각”이라는 한정적/제한적 의미와 함께 오히려 처음 등장했던 글로싸를 사용하고 있다. 즉 일반적 의미이거나 한정적/제한적 의미이거나 글로싸와 디아렉토스는 상호호환이 가능하다는 결론이다. 두 단어가 각기 갖고 있는 고유의 의미가 은사파에서 말하는 방언의 의미로 갈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고 본문을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령의 강림의 결과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모인 사람들이 다른 언어 즉 자기의 언어(지방 말)로 말을 하기 시작하자 각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언어(지방 말)로 듣게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전하는 것이다. 각자 자기 언어로 말을 하는데 통력의 도움 없이 모두 각자의 언어로 듣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현상이 성령이 하시게 함을 따라 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또 다른 하나가 있는데 “말하다”와 “듣다”의 단어가 역시 반복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헬라어 기초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는 평범한 단어들이다. 이 두 단어에 초점을 두며 본문을 다시 볼 때, 이 본문은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는 매우 단순한 구조를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어떤 의미를 강조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다시 말을 종합하면, 모인 사라들이 각자의 언어 또는 지방 말로 말을 하자, 이것을 보게 된 큰 무리 역시 각자의 언어 또는 지방 말로 듣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은 그들이 각자 자기의 말로 말하고 들었다면 거기에는 언어의 소통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다락방에 모인 자들이 한 말이 청해가 불가능한 잡음이 아니고, 청중들이 들은 것이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충분히 언어 소통이 있었고, 소통을 통해 언어가 담고 있는 내용 또는 사상이 전달이 되었다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어떤 내용이 소통되었을까? 각자의 언어로 말하고 들을 수 있었다면, 서로 어떤 내용을 주고받은 것일까?

누가는 그 내용을 “하나님의 큰 일(11절)”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지나치게 방언이라는 현상에 초점을 두고 필요 이상으로 집중하다보니 그 사건의 핵심적 의도가 “하나님의 큰 일”을 드러내는데 있다는 것은 흔히 간과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본문의 진행은 각자의 언어로 말하고 듣는 소통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이라고 불릴만한 비밀이 소통되고 있음을 드러내는데 그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직은 그 “하나님의 큰 일”이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1-13절까지는 성령 강림으로 인해 빚어진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14절 이하의 베드로의 설교는, 특히 14-21절은 이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14절 이하의 베드로가 상황에 대하여 변론하는 문맥에서, 특히 요엘 인용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큰 일”이 무엇인지 드러난다.

상황이 다소 어수선해지자 14절에서 베드로는 모인 사람들에게 “이 일”에 대하여 말해 주겠다며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본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간단하게 “이 일”로 표기하곤 있지만, “이 일”은 이 상황 속에서 무언가를 밝히려는 중요한 의도를 반영한 표현이라고 보여진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같은 문장 속에 등장하는 “이르되”라는 동사 때문이다. 즉 베드로가 “소리를 높여 이른” 것은 단순한 일상적 대화라기보다는 뭔가 비밀스럽고 감추어졌던 내용을 발설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여진다. 예를 들어, 같은 단어가 앞서 4절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우리는 이제까지 상황의 중심이 되는 언어의 소통이 성령이 “말하게”하심을 따라 시작되었음을 기억한다. 이 때 “말하다”가 14절의 “이르다”와 같은 단어로써 현재의 사건을 통해서 어떤 내용이 계시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사도행전 2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성령 강림의 결과)은 그 자체가 계시적 사건이고, 그 사건이 지니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가 베드로의 입을 통해 해석되는 방법으로 또 역시 계시도고 있다. 1절에서 11절까지는 행위로서의 계시(deed-revelation)라면, 14절에서 21절까지는 -넓게는 36절까지- 행위에 대한 해석의 기능을 하는 말씀으로서의 계시(Word-revelation)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행위 계시와 말씀 계시를 연결하여 하나의 계시 사건이 되도록 연결 하는 기능을 “이 일”이 하고 있다.

그러면 그 “이 일”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 첫째는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 자체를 생각할 수 있다. 1-11절 사이에 진행된 상황 자체가 기이하고 믿기 어렵기도 한 일이기에 그 상황 전부를 “이 일”로 함축하여 받으면서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겠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둘째는 11절의 “하나님의 큰 일”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미 1-11절에서 진행된 상황 속에서 소통된 내용이 “하나님의 큰 일”이었음이 밝혀졌기에 “이 일”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어느 쪽을 택하든지 결론은 같아진다. 왜냐하면 전자와 후자가 서로 별개의 것이거나 산치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전자의 의미를 택한다 해도 결국 전자의 구체적인 의미는 후자를 통해 드러나고, 후자는 전자 속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고로 14절을 다시 읽는다면, 베드로는 모인 사람들에게 지금 진행된 상황(행위 계시)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큰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말씀 계시)하겠다는 뜻이 된다.

베드로는 “이 일”, 즉 “하나님의 큰 일”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한 열쇠로 요엘 선지자의 예언(요엘 2:28-32)을 인용하고 있다. 이 말은 현재 사도행전 2장에서 계시되는 내용과 요엘의 예언을 통해 계시되었던 내용 사이에는 어떤 연속성이 있기 때문임을 짐작케 한다. 그것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어가 “말세에”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요셉이 “그 후에”라고 한 말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요엘의 말을, 단 이 표현에 대해서, 직접인용 했다기 보다는 해석이 가미된 표현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요엘의 “그 후에”와 베드로의 “말세에”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요엘이 말한 “그 후에”는 단순한 미래 시점을 가리키는 부사적 표현이다. 즉, 장차, 먼 훗날,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막연한 미래의 시점을 가리키는 “그 후에”이다. 이에 반해 베드로의 표현은 요엘이 막연한 미래적 사건에 대해 예언했던 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 후에”를 구체적으로 “말세에”로 받고 있다. “그 후에”가 바로 지금이란 의미에서 지금이 바로 요엘이 기다렸던 “끝”이라고 해석해 주고 있다. 즉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통해서 요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요엘은 그 세상 마지막 날들에 대해 무엇을 예언한 것인가? 세상 마지막 날들이 자신의 때와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한마디로 그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준다”는 것이다. 그 “만민”은 “모든 육체”,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말이다. 남자이건 여자이건, 노인이건 젊은이건, 자유자이건 종이건,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건 이방인이건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말이다. 그 때, 즉 만민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는 때가 언제인가 하면, 요엘(구약)의 시점에서는, 먼 훗날일 뿐이었다. 지금은 아닌 장래에 모든 육체에게 하나님의 영(성령)이 임하는 날이 온다는 것이 요엘의 예언가운데 대비되는 특징이다. 그렇다면 요엘의 때, 즉 구약 시대에는 누구에게 하나님이 영이 임했는가?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가끔 여호와의 신이 임한다는 기록을 보게 된다(출 31:3, 삿 3:10, 6:34, 11:29, 13:25, 14:6, 삼상 10:6, 16:13, 대하 20:14, 사11:2, 61:1, 겔 11:5 등).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때에 특정한 목적을 위해 여호와의 신 즉 성령이 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적어도 일반 이스라엘 백성과는 의도적으로 대비시키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여호와의 회중(민 27:17)”에 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특정한 사람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한 경우만이 구약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구약적인 특징이다. 특별한 사명에 앞서 여호와의 신이 임함으로써 그 사람이 특정한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 구약적인 특징이다.

이같은 구약의 일반적인 특징에 반해 요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만민”에게 여호와의 신이 부어지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 이 때 “만민”은 꼭 사사나,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포함된다. 남자가 아닌 여자도 포함되고, 자유자가 아닌 종도 포함되고,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도 포함되는 것을 뜻한다. 요엘의 예언은 당시의 정형(norm)을 넘어서는, 또는 시대적 페러다임(Paradigm)을 깨는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요엘이 활동했던 때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구약 전체의 정서와 기준을 포함하여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적 정서에서 요엘의 예언은 어쩌면 신성모독죄로 몰려 돌에 맞아 죽을수도(레 24:16) 있는 깜짝 놀랄만한 선언인 것이다. 요엘의 사명은 시대적 정서에 맞서 앞으로 그런 때가 올 것을 예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게 되어 무엇이 달라진다는 말인가? “만민”에게 성령이 부어져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 “만민”에 성령이 임하는 때가 앞으로 분명히 오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 일이 가능해진다는 것이 요엘이 대비시키는 차이이다. 즉 그 때가 되면, 지금처럼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부어졌던 것과는 달리, 그 대상이 어떤 직위나 직책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육체로, 즉 이스라엘만이 아닌,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는 일이 보편이 되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내 영을 만민”에 부어주심으로 달라지는 결과이다.

베드로는 이 문맥에서 오엘의 “여호와의 이름(욜 2:32)”을 “주의 이름(행 2:21)”으로 받음으로써, 예수가 요엘이 말했던 여호와임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달성하고 있다. 즉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는 더 이상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의 하나님인 것이다. 36절은 그 점을 다시 각인시키고 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디ㅗ게 하셨느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이제 성령을 보내시어 누구든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의도셨고 하나님이 그렇게 진행하신 일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닌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그러면 베드로가 요엘을 인용함으로써 성취한 것이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베드로는 14절에서 말한 “이 일”, 또는 11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큰 일”이 무엇인지를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즉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육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일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베드로가 변증한 것이다. 바로 이 비밀의 내용이 “하나님의 큰 일”이었고, 2장에서 진행되었던 “이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행전 2장에서 소개되는 성령강림 사건과 이 사건에 대한 해석격인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우리의 구원서정 논의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구속사와 구원서정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구속사의 진행은 구원서정을 예측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구원서정의 사역에 그 성취의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는 한마디로 이것에 대해 변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약(요엘)의 예언은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을 예언하고 있다. 구약의 예언에 따라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강림한 것이 구속사의 일이다. 누가는 그런 의미에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연결하고 있는데 누가복은 24장은 구속사 중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기록하고 있고, 사도행전에서는 그리스도가 말씀하신대로(눅 24:49), 성령이 강림하시는 일 까지가 구속사의 성취임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의 예언은 구속사의 진행이 있을 것을 말했고, 그 예언의 성취는 또 다른 효과를 불러오고 있는데, 그것이 구원서정이다. 이것을 축약하면, 구약이 구원서정을 예언하고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구약의 예언대로 구원서정의 사역이 시작되게(inaugurated) 된 것이다. 이 말을 다른 각도에서 하면 구원서정이라는 구속사의 일에 진전이 있음으로 인해 구원서정의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구원서정 사역에 해당되는 사도들의 사역을 기록하기에 앞서, 어떻게 구원서정의 일이 시작되게 되었는지 즉 어떻게 성령강림이라는 구속사의 일이 구원서정에 근거가 되는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들의 사명이 구원서정의 삼여인 것이 베드로가 32-33절에서 “우리가 이일에 증인”임을 고백하는데서 다시 확인되면, 그 “증인”의 사명을 위해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셨다”고 변증하고 있다. 특히 33절은 2장 앞부분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이라는 말로 받으며 상기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1-11절에 일어나고 있는 언어 소통의 사건을 상기시키고 있다. 결국 베드로의 설교는 구속사의 성취(성령강림)로 인해 구원서정(사도행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을 증거한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구원서정 논의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중요한 시금석이 된다고 판단된다. 보다 성경에 충실한 구원서정 논의의 방법론을 찾고 있는 자에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록을 통해서 성경은 구원서정을 구속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두고 다루고 있음을 배우게 된다. 구속사와 구원서정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인식은 누가만의 특징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