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V. 요한복음 20장 19절-23절

예림의집 2013. 9. 9. 18:09

 

V. 요한복음 20장 19절-23절

 

이 본문 또한 우리가 관심을 갖는 구속사와 구원서정의 관계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본문의 사건이 부활 이후의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실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첫 마디가 “평강이 있을지어다.”샬롬의 인사였다(19절).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인사려니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자리에서 말씀을 하시다 말고 다시 샬롬의 인사를 또 하셨다(22절). 우리 식으로 생각하며, 처음 나타나셨을 때 “안녕하세요?” 하셨는데, 말씀하시던 중간에 다시 “안녕하세요?” 하시는 격이다. 왠지 좀 이상하게 느껴진다.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전형적인 유대인들의 인사이다. 만나면 서로에게 “샬롬”을 기원하는 인사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인사말이 요한복음 전체 가운데 이곳에만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실 복음서 전체 가운데도 기원의 형태로 “평강”을 기록하고 있는 곳이 매우 드물다. 그런데 특히 누가복음 10;5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활 사건 이후의 정황에서 한 인사이다. 물론 누가복음 10:5도 직접적인 인사가 아닌 가르침 속에서 말씀인 점을 감안하면, 예수님이 실제로 “평강”의 인사를 하신 것이 신약성경에 기록된 것은 모두 부활 이후의 정황에서이다. 특히 요한의 경우는 부활 직후의 정황인 이 본문과 여드레가 지나 도마도 같이 있을 때 나타나셨던 경우(26절)에서만 예수님의 인사를 기록하고 있는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평소에 “샬롬”이란 인사를 전혀 하지 않으시다가 부활하신 이후부터 처음 하시어서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것인가? 예수님도 유대인으로 사셨고, 특히 공생애 이전의 30년간이나 공생애 동안에도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분명히 유대인이셨으므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는 거 같다.

그렇다면 요한이 여기에서 굳이 “샬롬”을 기록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샬롬”에 대한 논의가 우리의 직접적인 주제는 아니므로 깊은 논의는 하지 않을 것이나, 우리의 관심사인 구속사와 구원서정의 관계와 연관하여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요한이 부활 이후의 정황에서만 “평강(평화}”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의도적이라는 판단이다. 이 기록은 “평강”이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의미를 반영하고 있다. 즉, 부활로 말미암아 완성된 이 “평강”은 단순한 인사말을 넘어서는 구속사적(redemptive-historical) 평강인 것이다. “평강(평화)”이 구속사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평강(평화)과 연결시키고 있는 지 생각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수긍이 가는 말이다.

구약에서 평강(평화)은 매우 큰 주제이다. 특히 그리스도와 연관할 때 더욱 그렇다. 하나님은 오히려 원수의 위치에 있는 당신의 백성에게 평강을 주시겠다고 언약을 세우셨다(민 25:12, 말 2:5). 그리고 그 평강을 성취하기 위해 메시야가 오실 것이 예언되어 있다(사 9:6, 미 5:5). 아기 예수의 탄생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화를 성취하기 위한 목적을 담고 있기에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평화를 완성하기 위해 오셨고, 이제 부활로 말미암아 그 평화는 성취된 것이다. 즉 20:19 이하에서 예수님이 “평강”이라고 하신 것은 누가복음 2:14을 입증하는 의미인 것이다.

구속사적으로 -즉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완성된 평강을 주시면서 예수님은 동시에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이제 비로소 구속사와 구원서정이 연결된다. 평강을 말하다가 갑자기 “성령을 받으라”는 것은 구속사와 구원서정이 연결되기 위해서 필요하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평강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평강은 구속사의 결과물이다. 그 결과물을 우리가 받는 것은 구원서정이다. 시간과 공간적으로 떨어져 일어난 일(구속사)을 내가 받는 것(구원서정)이 가능한 것은 성려이 그 연결이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정황에서 바로 그 연결을 위해 성령이 필요함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좀 더 구체적이고 특별한 사건을 염두에 두시고 계신 듯하다. “받으라” 동사는 과거시제 명령형이다. 흔히 과거시제 명령형의 동작은 단회적 동작을 의미할 때 사용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은 지속적으로 성령을 받으라는 말이 아니라, 단회적으로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이 된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예수님은 이 사건 속에서 사도행전 2장에 있을 단회적 구속사건으로서의 오순절 강림사건을 생각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흔히 이 본문을 가리켜 “요한복음의 성령강림 사건(Johannine Pentecost)”이라고 별명을 붙인다. 예수님은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오시는 것을 구원서정의 차원고는 다른 구속사적 일로 보셨고, 따라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일이 아닌 단회적 사건이므로 과거시제의 “라베테” 명령형 동사를 사용하신 것이다.

이제 “성령을 받으라”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를 종합하면, 성령을 받는 것이 평강을 누리기 위한 우선 조건이 된다. 성령을 받는 구속사의 일이 우선시되어야 우리가 평강을 누리는 구원서정의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성령이 오시는 데까지 구속사의 일이 진행이 되어야,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평강을 우리가 구원서정의 차원에서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3절은 22절을 근거로 한 구원서정의 사역에 대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22절에서 말한 성령 강림의 구속사가 전제될 때, 사도들의 구원서정 사역이 있게 된다는 말씀이다. 23절에서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그들에게 죄 용서의 권세가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 물론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22절 이후에 23절이 왜 필요한가? 마치 문맥과 불연속적인 말씀을 왜 하신 것일까? 23절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너희가 죄 용서의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는 죄 용서의 일이 일어나겠지만, 전하지 않는 곳에서는 그들의 죄가 용서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즉 말씀의 초점은 죄 용서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 용서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사명에 있다. 사도들이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구원서정의 일이기에, 구속사의 차원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할 수 있다는 뜻의 말씀이다. 즉 누가복음 24:44이하에서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구속사)과 죄 용서(구원서정)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기위해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시는 말씀과 동일하다.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하시는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예수님은 구속사와 구원서정의 구분을 유지하고 계실 뿐 아니라, 둘 사이에 어떤 순서로 일이 진해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계심을 확인하였다. 구원서정 논의의 방법론을 찾고 있는 우리에게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단초가 된다.

 

VI. 요약 및 결론

 

본 장에서는 성경을 중심으로 구원서정이 구속사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살펴보았다. 구원서정은 신약만의 현상이 아니라 이미 구약이 알고 있었고, 고개하던 것임을 확인하였다. 그 말은 결국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한 구속사의 성취는 구속사의 성취로써 끝이 난 것이 아님을 보았다. 그리스도께서 여러 정황에서 성령의 구원서정 사역을 말씀하셨고, 사도의 사역은 곧 그 연장선상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한 구원서정의 사역인 것이다.

이제 이것은 우리가 구원서정 논의를 위한 방법론을 찾는 노력에 있어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이미 성경이 구원서정을 소개하고 제시하는 방법이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방법을 따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구원서정 논의가 과거 개혁신학 방식보다는 더 성경에 충실한 논의가 될 것이다.

사실 본 장의 논의 속에서 설명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마치 자명한 사실처럼 전제되었던 것이 있다.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이다. 존재론적(ontological) 관계가 아니라, 사역적(economical) 관계를 말한다. 우리의 논의를 위해 특별히 구원 사역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성령은 그리스도에 대해 누구이신지 설명이 필요하다. 구속사와 구원서정이 연결된다는 의미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에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어떻게 성령이 그리스도의 구원(구속사)을 각 사람에게 적용(구원서정)하는 일을 하시는지 살피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