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윤리학 시험 예제 및 예답
①윤리학은 무엇이며, 윤리와 도덕의 차이는 무엇인가 설명하라.
윤리학이란 일정한 사회 안에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행동을 일정한 규범의 빛 안에서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작업이다. 윤리와 도덕은 일상에서는 교육적으로 의미의 차이 없이 서로 사용되곤 하지만 도덕은 윤리학에서 기술적 진술이라고 하고 윤리는 규범적 진술이라고 한다. 기술적 진술은 객관적 의식을 배제하고 서술하는 것으로서 옳은가 그른가의 질문을 제시하면서 당시의 규범과 통념 등을 살펴보면서 비판하고 평가를 내리는 것이고, 윤리는 일정한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행동을 옳은가 그른가를 반성하는 작업으로 그 판단 기준은 규범이다.
②윤리적 반성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행동에 대해 논하라
인간의 하나의 행동은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인간은 하루에 5만 가지의 생각의 단편들이 지나간다. 때로는 행동을 하고도 왜 행동을 했는지 모를 때도 있다. 그러므로 윤리적 반성의 대상은 사람이다. 하나님, 천사, 사탄은 윤리적 반성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윤리학은 신학이라고 보기보다 인간학의 범주에 있다. 그러나 신학 또한 하나님을 판단하는 학문은 아니다. 예배나 기도 등의 하나님을 향해서 인간이 보여주는 행동은 윤리적 반성의 대상이 된다. 동물들의 행동은 윤리적 반성의 대상이 아니다. 동물 윤리라 함은 사람이 동물에 대해서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는 윤리이다. 생물 자체의 생태나 먹이사슬 등을 연구하는 것은 윤리학이 아니라 생물학이다. 환경 윤리는 생태학, 지구과학, 기상학 등이 아니라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관한 윤리를 말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의 행동이 윤리적 반성이 되지는 않는다. 중증 침해에 걸린 사람이나, 정신 질환자, 몽유병 환자 등의 행동은 윤리적 반성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 행동을 자기가 자유롭게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행동이어야 자유와 책임의 원칙하에 윤리적 반성의 대상이 된다. 또한 자유로운 선택을 행사할 수 없는 행동한 상황이라도 음주운전, 강제 살인, 졸음운전 등 그 원인을 초래했다면 윤리적 반성의 대상이 된다.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서 행하는 행동도 경우에 따라서 윤리적인 반성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동물의 경우는 비판하지 않지만, 사람의 경우는 동물과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성적인 욕구를 들자면, 동물일 경우 그 발동과 통제가 본능 안에 함께 있지만, 삶의 경우에는 발동과 통제가 본능 안에는 미약하게 들어 있고, 인간의 인격적인 결단에 의해서 결정된다. 인간은 결단과 의지로 성적인 욕구를 통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욕은 윤리적 반성의 대상이 된다. 식욕도 마찬가지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행동과 도덕적 상상력, 인격적 결단이 윤리적 반성의 대상이 된다.
③인간의 도덕적 행동의 3요소를 설명하라.
인간의 도덕적 행동의 3요소는 의도, 행동, 결과이다. 자율신경계의 작용을 제외한 윤리적인 행동들은 자율신경계의 작용과 반대로 사전에 행동을 하기 위한 생각과 계획과 결정이 선행된다. 인간은 사전에 동기와 내적 자질, 능력, 시성, 덕성이 형성되어 있을 때 행동이 이루어진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윤리적인 행동은 사전에 충분한 교육과 훈련과 고민이 선행되어 현장에서는 거의 즉흥적으로 판단과 행동이 나와야 한다.
④공동체주의 윤리사상을 설명하라.
공동체주의 윤리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 사상을 현대화 한 것이다. 윤리적인 실천이란 공동체에서 부여하는 의무를 실천하는 것으로 그것은 내적인 덕이다. 심지어 정의도 내적인 덕이다. 공동체의 전통과 사회학적 메커니즘(학교, 가정)에 의해서 사전에 충분한 교육과 훈련을 받음으로서 내적 자질과 소양을 가추고 있으면,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인터넷의 발달로 해동이 결과가 미치는 영향은 거의 무한대이다. 그것이 평가의 대상은 아니지만 커먼센스의 선 안에서 그 결과를 예측하면서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한다. 특히 설교자로서 영향력이 지대한 우리들은 더욱 그리해야 한다.
⑤철학적 윤리학을 분석하고 평가하라.
철학적 윤리학은 크게 두 가지 전통으로 나뉜다. 첫 번째, 의무론적인 전통으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임마누엘 칸트가 발전시킨 것으로서 그 행동이 바른 동기에 의해서 바른 원칙에 따라 행해지기만 한다면 그 결과와 상관없이 그 행동은 윤리적으로 올바르다는 명제이다. 두 번째, 결과론적인 전통으로 소피스트들의 주장으로 일종의 실용주의 이다. 그 행동이 어떤 동기에 의해서 행해졌던 간에 관계없이 그 행동이 좋은 결과만 도출한다면 그 행동은 윤리적으로 올바르다는 명제이다.
두 윤리학은 도덕적 행동의 3요소(의도+행위+결과)로 볼 때 말이 안 된다. 우리는 이 잘못된 두 전통 속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일정한 조건 하에서는 의무론적인 전통이 기독교 윤리와 가깝지만, 규범을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자율적으로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규범 안에서 그 명령을 순종해서 행동 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떻든지 그 행동은 올바른 행동인 것이다. 예를 들어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은 정당하다.
⑥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와의 관계를 설명하라.
개인윤리는 한 개인의 결단에 의해서 행해지는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반성하는 것이고, 사회 윤리는 집단의 결단에 의해서 행해지는 인간의 행동에 옳고 그름을 반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 윤리든 사회 윤리든 간에 모든 인간의 행동은 사회성을 가지고 있다. 사회적 행동이라는 말은 인격적 존재와 서로 관계를 하면서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이다. 사회적 행동은 이웃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있을 때 형성된다. 개인이 결단을 할 때는 그 사람의 세계관, 인생철학, 윤리적인 입장, 내적인 신성, 내적인 덕이 직접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집단의 결단은 여러 가지 집단원이 의견을 제시하여 다수결, 만자일치, 독제적인 방법 등으로 하나의 안을 선택하여 결정된 사항이다. 합의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이 집단의 행동이고, 구성원의 이견 수렵을 제대로 했는지, 합의한 내용을 잘 이행하는지 등을 반성하는 것이 사회 윤리이다. 집단이 합의한 행동 규약들은 체제, 법, 구조, 정관, 내규, 학칙 등이 있는데 이를 통 털어 사회 제도라 한다. 사회 제도도 하나님의 법에 어긋날 수 있고 그럴 때에는 얼마든지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며 사회적 제도도 기독교 윤리의 반성 작업에 들어간다. 지금은 낙태문제, 정치문제, 경제 문제 등에서 개인적 윤리와 사회적 윤리가 동시에 필요하다.
두 윤리 중에 개인 윤리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개인의 마음이 변화를 받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마음이 변화해야 사회가 변한다는 논리는 끝까지 견지해야 할 것이다. 마음의 변화는 사회 구조 변화의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개인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의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은 늘어났지만 사회는 더 악해지고, 동성애 문제. 이혼율 증가, 자살률 증가, 성 윤리의 타락, 국가 부패지수의 증가, 교단이나 교회의 사회적 이미지 하락 등이 그렇다. 또한 변화된 기독교인의 수가 늘어나는 것에 정비례하여 반 기독교적 사회 구조가 강화되고 있다. 이와 같이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 사이에 괴리가 있을 수 있으며 이를 극복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⑦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 사이의 괴리를 설명하고 의견을 제시하시오.
인간은 개인의 품성의 힘을 가지고 사회 구조를 변화시킬 수도 있는 존재이지만, 오히려 사회 구조의 영향을 가지고 개인의 품성이 명령을 받는 힘이 더 강한 존재이다. 신전통주의 신학자인 디버는 모든 집단은 전부 집단 이기주의를 추구하며, 악한 집단과 선한 품성을 가진 개인이 부딪히면 선한 품성을 가진 개인이 패한다고 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괴리로 인하여 개인의 품성을 가지고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려고 하면 집단의 힘에 의해 함몰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남경 대 학살사건을 저지른 일본의 만행이나, 나치 군의 유대인 학살, 북한 주민들의 주체사상 교육 등이 좋은 예이다.
개인이 잘못 결정을 해서 잘못된 행동을 할 때는 개인의 생각을 바꾸면 되지만, 집단의 결단을 바꾸는 것은 물리적으로 힘들다. 또한 어떤 사람이 어떤 원칙에 따라서 개인적인 결단과 행동을 했을 때 윤리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해서, 그 원칙을 가지고 사회 구조의 영역에 그대로 적용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를 낸다고 볼 수 없다. 개인 활동의 원리가 항상 구조의 원리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고, 개인적인 영역에서와 구조적인 원리에서의 행동 원칙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원리에 의해서 행동해야 할까? 이에는 맥시맥스 원리와 맥시민 원리가 있다. 맥시맥스 원리란 어떤 행동을 할 때 최선의 상황을 극대화 하는 행동 원리이고, 이와 반대로 최악의 상황에 대한 대비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결정하는 행동 원리가 맥시민 원리이다. 대체적으로 맥시맥스의 원리에 의해서 결정을 해야 하지만, 구조적 차원에서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국가 정책의 예로 들자면, 맥시맥스 원리는 그 나라의 생산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안으로 정책을 결정한다. 국가 전체의 생산 총량을 늘리려 할 것이고, 약자 계층이 소외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제 3공화국 경제계발 계획이 그 좋은 예로 성장 일방적인 정책이다. 반면에 맥시민의 원리를 적용하면 약자 계층의 기본권 보장에 초점을 맞추어 정책을 결정한다. 건강한 사람들도 언제든지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전재로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복지 시스템을 구성하고 그 터전 위에 창의적으로 국가 정책을 수립하려 할 것이다. 윤리적으로 볼 때 맥시민 국가 정책이 좋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개인적인 결정은 맥시맥스, 집단의 결정은 맥시민의 원리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⑧규범에 문제에 대해서 논하라.
성경은 율법이라는 말로 규범을 설명하는데, 율법이 없어도, 자기의 양심으로 인하요 스스로에게 규범이 되는 것이고, 율법이 잇는 자들에게는 특히 십계명이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생활 규범과 밀접하게 일치되는 부분들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는데, 양심은 인간 자아의 중심이며, 인간의 인격이 가진 여러 기능들 즉, 이성, 감성, 의지, 모성, 부성, 감각 등을 통일시키고,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양심의 기준은 도덕법이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마음에 새긴 율법은 도덕을 이야기하는데 이에 대해 칸트는 인간 자신의 이성의 사유를 통해 자율적으로 생성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새겨졌다고 믿는다. 이성은 단지 이미 새겨져 있는 율법(도덕)을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이다. 양쪽 다 도덕법이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은 동일하게 인정한다. 성경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양심에 따라 심판을 받지만 믿는 우리는 양심과 성경, 두 가지 표증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인간의 타락 전에는 마음에 새겨진 도덕법만 가지고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타락의 영향으로 마음의 도덕법과 양심에도 큰 타격을 주어서 뒤틀려졌다. 우리의 마음속은 토사물 같이 더러워졌다.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덩어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이 인류 사회인 것이다. 그렇지만 타락 이후에도 도덕법은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 아니라 칼빈의 답변에 의하면 인간이 스스로 죄인임을 자인하기에 충분할 만큼 남아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모르고 죽은 사람도 핑계하지 못할 만큼 남아 있다. 또한 인간의 마음속의 악을 억제하여 살만한 사회를 만들 정도로 남아있다. 이를 시민적 의라 한다.
인간을 통제하는 방법으로는 일차적으로 마음 속 도덕법과 양심이 있다. 이차적으로는 사회적 도덕법인 성문화된 관습, 관행, 체면, 교육 등이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하여 삼차적 통제 기능인 강제적 규범을 만들어서 지킨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로 인간의 악을 억제하고 통제한다.
⑨규범에 대한 개혁주의 입장을 소개하고, 성경이 제시하는 규범들을 설명하라.
인간의 타락과 함께 그 도덕법 또한 심각하게 외곡 되어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또한 외곡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해관계가 개입 되지 않은 일반적인 일에서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막상 자기의 이해가 개입 되면 자기 합리화에 빠져들게 된다. 인간의 모든 창작품은 자기 합리화의 작업이다.
그러므로 도덕법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대체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66권이다. 성경과 도덕법의 관계를 설명하는 의견들은 첫째, 마음(철학적)과 성경(신학적)이 내용이 같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는 전재가 있어야만 한다. 실질적으로 철학적 윤리에 기독교적 사상의 껍질을 입힌 것에 불과하여 결국 성경적 윤리관을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두 번째는 마음은 심각한 외곡이 되었음으로 성경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주장이다. 사회 윤리와 성경적 윤리는 서로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겹치지 않는다. 일상적인 삶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규범 제시 때에는 철학적 윤리학만으로 충분하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종교적 의는 상실됐지만 인간의 지성은 전혀 타락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본다. 칼빈주의를 기본으로 한 우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성경에 제시된 덕목이 철학적 윤리학 안에서 별로 발견되지 않지만, 성경도 철학적 윤리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세 번째로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인간의 지성은 초토화가 되어 버렸다는 주장이다. 타락으로 인해 망가진 철학적 윤리학은 싹 버리고 성경적 윤리학만 가지고 기독교 윤리학을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했다고 해서 철학적 윤리학의 기능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적 입장은 무엇인가? 성경은 구원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지식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의 문헌을 참고할 수 없다. 그러나 도덕적 입장에서는 다르다. 유전 공학의 세계, 과학 기술의 세계, 새로운 정치 구조, 새로운 금융 구조 등이 그렇다. 예를 들어, 성경 안에 결혼생활에 대한 강령은 있지만, 인터넷 세상에 대한 강령이나 지침은 없다. 성경은 구속사 적인 예언을 제외하고는 성경 기자들이 인지하는 상태에서 기록된 것이다. 윤리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저자가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기록되지 않았다. 현대 시대에 예외들은 그 지식에 대한 정통한 사회 윤리적인 도움을 받아야 한다. 성경적 윤리학에 철학적 윤리학을 포괄적으로 도움 받아야 한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이성의 타락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수용, 수정, 버림). 성경이 제시한 윤리를 1차 규범으로 삼고 철학적 윤리를 비판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한다.
⑩기독교 세계관을 설명하라.
세계관이란 이 세계에 대한 포괄적인 해석 체계이다. 중심은 인간으로서, 인간의 기원과 인간의 힘과 과정을 거치면서 활동, 행동, 작용을 하고 있는가를 말하며, 인간의 미래는 어떻게 전계될 것인가를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세계관이 있고, 주체사상과 유사종교화 된 진화론, 마르크스주의 등도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윤리학은 그 자체로서 세계관의 틀 안에서 그 성격이 결정되는 학문이다. 이 세계관에 의하여 윤리적 판단의 방향이 결정된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첫째, 인간 상태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면, 세계의 기원은 하나님에 의한 천지창조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현재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데, 인간 안에는 선한 창조물의 모습과 타락한 모습이 뒤섞여 있다. 인간이란 존재는 대단히 복잡하여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고,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해방의 길이 열렸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미래가 보장되었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복잡한 존재가 되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 하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문질 세계는 선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그의 죽으심은 인간의 구원은 오직 값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를 의지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오직 은혜로만 가능하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의 구속, 미래에 대한 유일한 증거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한계성이 있다. 당장의 우리의 구원은 영혼에만 제한되어 있다. 육체의 구원은 여전히 실현되어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육체는 소멸되고 이 육체의 구원은 예수님의 재림 시까지 유보되어 있다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새롭고 완전한 육체로 다시 부활한다. 영혼 또한 완전히 구원받은 상태가 아니라 부분적이고 불안전하다.
사도바울은 인간을 속사람과, 겉 사람으로 설명하였다. 성령의 내주하심, 성령 세례는 속사람의 문제이다. 인간 스스로 중생 자체는 경험할 수 없다. 중생을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중생 하였다 하더라도 겉 사람은 그대로 남아 있다. 속사람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겉 사람에게 작용하는 과정이 성령충만인 것이다. 이 과정을 성화라 한다. 속사람이 변화되는 과정은 단번에 일어난다. 겉 사람이 변화되어지는 과정은 조건이 있다. 인간의 반응에 의해서 그 결과가 달라진다. 이는 인간의 인격을 존중하는 인격체이신 성령이기 때문이다. 성화의 삶이란 속사람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겉 사람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인간은 완전하거나 온전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해서만 영화롭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 웨슬레의 완전주의를 배격(거부)한다. 칭의는 완전하지만 성화는 항상 불완전하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칼빈주의 기독교 세계관이다.
⑪성경상의 행위 규범에 관해 설명하라.
행위 규범이란 행동으로 말이 없이 직접 시범을 보여 주면서 어떤 사람의 행동 지침을 짓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 안에는 말씀 규범도 있지만 행위 규범도 있다.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 하나님의 속성과 행위들 중에는 도저히 본받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나님의 편재성, 전지·전능성은 본받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대속의 죽음)은 본받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유 적 속성(사랑, 공의, 거룩, 선하심)은 본받을 수 있으며 본받아야 한다. 성경에는 신앙의 인물들의 삶과 행동들도 롤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 있는 본받을 수 있는 것과 본받을 수 없는 것들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성령이 감당하는 규범들이 있다. 성령은 성화된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하신다. 우리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살고 결정할 것인가를 지도하는 지침을 제시한다. 우리는 성령의 지침을 기도로 간구해야 한다. 그러나 재세례파 등이 주장 하는 성령의 직통계시 등은 위험하다. 성령의 안내하심은 성경으로 확증되어져야 한다. 원칙을 찾아내 일반화 시켜서도 안 된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해야 하는가? 성령의 지도는 개별적이다.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성령의 지도하심은 주관적으로 나의 내면에 역사하시는데, 성령의 주관이신지 나의 심리적 작용인지, 마귀의 속삭임인지 구분이 안 된다.
성경에 기록된 명제 형태의 규범들이 있다. 바로 율법이다. 율법은 첫째 거울로써의 기능을 한다. 율법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한다.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발견하게 한다. 죄를 깨닫게 하고 정죄 속에 빠지게 한다.
의로움이 없고, 해방시킬 구원의 능력이 없는 나의 실상을 깨닫게 한다. 그리하여, 참된 구원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게 함으로 율법은 무익한 것이 아니라 유익하다. 둘째로, 율법은 법적 통제 장치로서의 기능을 한다. 셋째, 생활 지침의 기능을 한다. 율법은 그 특성상 인간의 행동을 속박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형식상으로는 속박으로 보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다. 교통신호가 우리의 행동의 자유를 속박하지만 그것은 심각한 사고를 피하게 하기 위해서이듯, 율법은 신앙생활 가운데서 위험한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 때는 막아주고, 제거가 되면 자유롭게 가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⑫민주주의에 대한 기독교 관점을 설명하라.
성경은 헌법적 민주주의 정치제도라 할지라도 비판적 권위 관을 유지한다. 그 이유는 첫째, 민주주의는 정치 주권의 기원을 국민에게서 찾는다(주권제민). 하지만 우리는 정치적 주권의 원천을 하나님으로 보고 국민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한 주권이 정치가에게 전달되어지는 통로로 본다. 둘째, 다수결의 원리이다. 12정탐꾼 이야기에서 보듯 다수가 항상 옳지 않을 경우가 있다. 성경은 다수를 일방적으로 지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수의 독제로 나아갈 수 있다. 셋째, 민주주의의 배경이 기본적으로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기 때문이다. 이를 우리는 기독교는 받아드릴 수 없다.
⑬기독교 도덕법으로서 사랑의 대 강령에 대해 설명하라.
마 22:37-40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를 우리는 사랑의 대강령이라 한다. 이 말씀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나이까?” 하는 바리새인의 질문 대한 답변으로 제시되었다. 그들의 질문에는 심각한 당시 세대의 고민이 담겨져 있다. 그들은 모세 율법을 지침으로 삼아서 살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멸망 후, 이주 정책과 혼합 정책으로 인해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생겼다. 이를 보안하기 위해 그들은 탈무드와 미드라쉬(주석)를 만들었으나 그 방대한 분량으로 인하여 포인트를 못 잡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심각한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레위기와 신명기의 말씀을 들어 대답한 것이다. 이 대답으로 율법의 해석 체계가 정립되고 질서가 잡혔다.
이 사랑의 대강령은 아가페 사랑으로 집약되어진다. 아가페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그 의미는 첫째, 호감을 받을 만한 것이 전혀 없는데 호감을 받을 대상으로 여겨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이신칭의 교리와도 통한다. 이신칭의는 인간이 완전히 불의한 존재인대, 예수 그리스도를 매개로 해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가 전가되어 우리를 완전히 의로운 자로 여기심을 말하는 법정적 사건이다. 하나님의 심판대의 선 인간은 완벽한 불의한 자이지만 예수님의 의로 덧입어 의로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도 호감을 받을만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것이 아가페의 실천이다. 이것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고, 살리는 역할이 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부부관계에서부터 실현되어져야 하는 사랑이다. 둘째, 자기를 철저하게 희생하고 타인의 유익을 철저하게 구함으로 실연된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성품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타인을 희생시켜 가면서 까지)자기의 이익을 구하게끔 되어 있다.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사역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이다. 이 죽음은 100% 완벽하게 인류를 위한 죽음이었다.
이 사랑은 에로스 사랑과 대조된다. 에로스는 타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기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목회, 성행위, 공부 등에도 두 가지의 태도가 있다. 우린 잠자리에서부터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 남자와 여자는 성감을 느끼는 곳과 방법과 과정이 다르다. 남자의 아가페적 태도로 여자를 대해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인간이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가페로 사랑할 수 없다. 아가페를 쓸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도 은혜이다. 사도 바울은 사랑 대신 믿음이란 말을 많이 쓴다.
예수님은 또한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의 뜻은 첫째는 자기 몸을 사랑하고 그런 다음에 두 번째로 이웃도 사랑하라는 이중적 명령이 아니다. 내 몸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성. 자기 생존을 위해서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돌보도록 하는 본성으로 부여된 것이다. 본성이기 때문에 따로 명령할 필요가 없다. 똑 같은 사랑을 타인에게 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명령된다. 자기 사랑은 본성적으로, 자연적으로 되는 것인 반면,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의지적으로, 순종으로 행해야 하는 대강령인 것이다.
⑭기독교 도덕법으로서 황금률에 대해 설명하라.
황금률이란 마테복음 7장 12절의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말한다. 이 말씀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을 출발점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토대로 나온 것이다. 황금률은 사랑의 대강령과 같은 비중을 가지며 조화를 이룬다. 예수님의 성육신(인 카네이션)은 인간의 입장을 완벽하게 아시는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실제로 인간이 되신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온전히 알 수 없다. 타락한 본정을 지닌 인간은 근본적으로 황금률을 실천하는데 한계가 있다. 우리는 은혜 받을 때에도 황금률의 원리에 따라서 은혜를 받는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사랑받지 못할 존재임에도 은혜로 사랑받는 자임을 인식하고, 항상 피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을 가지고 은혜를 받으며,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⑮기독교 도덕법으로서 십계명에 대해 설명하라
성경의 십계명은 보편화된 도덕 윤리로서 사랑이라는 도덕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본성과 사역에서 출원되었다. 십계명의 1-4개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5-9계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마지막 10계명은 서론에 상응하는 결론적 개념이다.
십계명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서론은 각론보다 우선한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사역에 은혜를 입은 자들만이 지킬 수 있는 생활 규범이다. 그러므로 서론과 각론의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 또한 인간의 윤리적 방법이 먼저 앞서고, 구원의 사역이 뒤에 오면 안 된다.그러면 인간이 윤리적 실천을 함으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행위구원론이 되어 버린다. 구원론은 이신칭의가 되어야 하고 이행칭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 규범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 규범보다 우선한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하나님과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십계명의 의미를 각각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 일 계명은 피조물을 하나님의 자리로 끌어 올리지 말라는 뜻이다. 제 이 계명은 하나님을 피조물의 자리로 끌어 내리지 말라는 뜻이다. 제 삼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뜻이다. 제 사 계명은 하나님을 섬김에 최소한의 행위로 안식을 지키라는 뜻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말하는 동시에 인간을 위한 계명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과의 관계로의 전환점, 고리 역할을 한다. 제 오 계명은 내 부모를 공경하라 이다. 부모는 생물학적 면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이후로 부모를 통해서 인간을 창조하신다. 하나님과의 공동창조자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부모의 교훈 또한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다. 부모는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하게 하는 유비이다. 제 육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 이다.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넘어서서는 안 될 마지노선을 제시한다. 인간에게는 내가 좋아하는 관계와 내가 싫어하는 관계가 공존한다. 나의 생존에 필요한 관계는 싫어하는 관계이다. 좋아하는 관계는 대체로 도움이 안 되는 관계이다. 마음속에 있는 미움과 살인이 멀지 않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확실히 이별하는 방법이 살인인 것이다. 제 칠 계명은 간음하지 말라 이다. 인간은 평생 이성 관계를 피해갈 수 없다. 이는 남, 여, 노, 소를 가리지 않는다. 다른 성이 가질 수 있는 성의 차이에 뒤따르는 매력, 성적인 요소들이 완전히 배제될 수 없고 삶의 중심에 있다. 인간은 100% 자유로울 수 없고, 때로는 성 차이에서 나오는 매력이 공동체의 활력소가 된다. 이성에 대한 관심은 우리로 하여금 창조력과 활기,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건전한 것이다.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이성간의 마지노선이다. 우리는 일정한 보호 장치(결혼)를 가지기 전 까지는 성관계를 기지면 안 된다. 보호 장치 없이 성관계를 갖게 되면 심각한 후유증이 뒤따른다. 그 후유증으로는 성적 욕구가 인간의 인격성과 연관되어 있어, 그 인격성이 성욕을 남용하는 계기를 주기도 한다. 성적인 쾌락이라는 것이 남자의 경우 상당히 짧고, 여성은 남성보다 오래 가지만 순간성을 벗어날 수 없다. 반면 인간의 정신은 성적 쾌락을 오래 동안 누리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이 인격적인 수요와 생물학적 욕구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다. 엄청난 허탈감, 이성에 대한 분노, 미움의 감정을 갖게 된다. 또한 이성에 대한 실망감과 허탈감이 깊이 찾아오게 된다. 결혼한 관계가 아니라면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성은 처녀성을 상실하고 평생에 깊은 상처로 남는다. 그러나 정상적인 결혼은 체면과 의무감, 토막의 욕구 충족, 또 다른 기대감 때문에 유지된다. 제 팔 계명은 이웃의 유형의 자산을 도둑질하지 말라 이다. 제 구 계명은 거짓증거 함으로 이웃의 무형적 자산을 파괴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지막 제 십 계명으로 탐내지 말라는 것은 부록과 같은 계명이 아니고, 위의 아홉 개의 계명 전체를 합친 것과 같은 비중을 가지고 10계명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위의 모든 계명을 어김이 바로 인간의 탐욕에서 나온다는 것을 직시하는 것으로 십계명을 닫아주는 역할을 한다.
⑯성윤리로서 성욕에 대해 설명하라.
성욕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주신 축복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인간의 성욕은 다른 피조물의 본능에 의한 성욕이 아니기 때문에 본능에 의해 해결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서 해결되어야 한다. 성 관계를 결혼이라는 제도적 장치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 안에서 성관계를 가져야 하는 이유는 동물의 경우 생물학적으로 성욕의 충적이 되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연애할 때 성욕에 대한 기대가 있다. 장기간 영원히 누리고자 하는 기대와 뒤섞인다. 실제적으로 성관계가 줄 수 있는 쾌락의 기간은 너무 짧다. 순간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성관계 후 마음속의 허탈함과 속은 기분이 들면서 분노가 끓어오른다. 급격하게 상대방에 대한 높은 애정이 순식간에 식어버린다. 상대방에 대한 인식이 이전과 같이 않게 된다. 그러므로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경우 파국으로 치닫게 될 가능성이 크다. 실상에서 보듯 혼전 성관계는 후유증이 굉장히 크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관계는 제도적 장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결혼은 실망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눈총이 통제력을 발휘하여 물릴 수 없게 한다. 또한 성 관계에서의 쾌락이 비록 짧지만 안정적으로 자주 할 수 있다는 위로를 기대할 수 있다.
⑰성윤리로서 동성애 대해 설명하라.
동성애에는 이성이 아닌 동성을 향한 성적, 감정적 사랑을 갖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이성애적인, 동성애적인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주장한다. 동성애 찬성론자들은 동성애가 선천적 성적 지향임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부 조작이거나, 표본조사의 미흡함을 들어낸다. 그들은 성경에 동성애를 비판하는 구절들을 전부 동성애를 지원하는 구절들로 변경시켰다. 그들은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동성애 관계로 해석한다. 그러나 동성에는 선천적 성적 지향이 아니다. 생물학 적으로 봤을 때, 성적인 정체성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 결정된다. 첫째는 유전자의 결정으로 병리학적인 특징으로 나타난다. 둘째는 미세한 신호에 의한 남성, 여성 태아의 발전이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평범하지만, 성애만 반대가 되는 것은 후천적이다.
또 어떤 이들은 동성애는 특별한 일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모든 남자와 여성이 동성애를 할 수 있다. 동성애는 전적으로 후천적이고, 환경적인 것이다. 남성의 경우는 성감대가 남성의 생식기에만 있는 것만 아니라 항문 근처에 있는 관략근 까지 분포가 되어 있다. 그 근육을 자극을 하면 80%이상 성감대를 느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서 전신이 다 성감대이다. 그래서 여성의 신체 구조를 잘 아는 여성이 터치하는 것이 더 성감대를 자극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남성과 여성이 동성애에 열려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동성애를 하지 않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생식 질서에 반하는 것이다. 또한 의학적으로 심각한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항문성교는 인체에 해로운 세균이 서식하는 곳을 통하기 때문에 병리학적 문제를 낳게 된다. 누구나 동성에 대한 좋은 감정은 조금씩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성애를 선택 안하는 것이다.
요즘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커밍아웃을 한다. 그들은 동성에는 습관과 환경에 의한 후천적인 것인데, 내가 주관적으로 동성을 향해서 강한 성욕을 느끼는 성의식을 통제하지 않고 따라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전환을 통해 이성이 되겠다고 결심한다. 실제 이러한 유혹이 왔을 때에 10명중 9명은 절제, 1명은 커밍아웃을 한다. 그러나 성 전환 수술을 한다고 해서 그 고유의 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여성은 난자를 생산하고, 남성은 정자를 생산해야 정상적인 여성과 남성인데 수술을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될 수 없다. 단지, 성적 불구자를 만드는 것이다. 그럼으로 의미상으로 완벽한 성전환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어떤 한 사람의 성 정체성은 그의 생식기 구조, 주관적인 성의식, 호르몬 분배 문제, 생리적 종족 보존 능력 등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동성애자를 대하는 교회는 동성애자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소외시하면 안 된다. 교정을 전제로 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도 끝까지 동성애를 고집하면, 교회에서 축출해야 한다. 이것은 구원의 문제와는 다른 것으로 지교회의 교리적, 진리적 순결성을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⑱성윤리로서 이혼문제에 대해 설명하라.
어떤 사람들은 이혼문제에 대하여 신명기 24장 1-4절을 들어 수치가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할 때 이혼증서를 써서 내보내라고 했음으로 율법도 이혼에 대해 허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이다. 본문의 1-3절은 실제로 문제가 되었던 한 케이스를 예로 들은 것이지 규범이 아니다. 4절만이 주절로 이혼을 허용하는 내용이 없다. 즉 본문은 이혼을 허용하는 규범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이 본문을 악용하여 혼탁한 사회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모순이 있다. 첫째, 수치 되는 일이 무엇을 말하는 지 너무 애매모호하고, 오로지 남자의 판단에 마끼게 된다. 둘째, 이혼증서 제도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당시 주변 이방민족에서 시행하던 것을 부득불 차용한 것일 뿐이다. 이혼증서를 내어줌으로써 이 여자가 도덕적인 실수를 해서 나온 것이 아니고 남자 마음에 안 들어서 나온 것을 증명하고, 창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며, 처가로 돌아가 살 수도 있고, 재혼을 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도의 안전장치였던 것이다. *간음은 이혼과 상관없다. 바로 죽인다. 하나님은 이혼증서법을 재정한 적이 없다. 수치 되는 일은 하나님의 법에는 이혼 사유가 아니다. 본문은 재재혼을 금지시키는 규정. 하나님은 이혼을 허락한 적이 없고 이혼증서는 백성의 완악함 때문에 온 것이다. 단, 음행을 한 경우. 배우자와 신앙이 다른 경우 상대편이 이혼을 주장하는 경우, 배우자의 생명에 심각한 위험이 찾아올 때 등에 한해서 이혼을 허용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어떤 이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결혼관계는 목회의 소명보다 더 중요하다.
⑲법으로서 제 6계명인 살인에 대해 설명하라.
성경은 모든 형태의 살인을 다 경계하는 것은 아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규범의 범주는 첫째, 보복살인의 경우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원수를 갚는 것은 공의의 하나님의 속성상 정의 실현에 해당되어 합법적인 것이다. 그러나 친히 개인적, 사적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한다. 왜냐하면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원수를 갚는 시스템은 국가 권력이 법으로 국가 기관에 맡겨야 한다. 성경이 보복살인을 금지한 이유는 원수 갚으려고 하는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사람이 나 보다 힘이 쌘 경우와 원한이 마음에 가득하면 본인이 몸이 상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원수를 갚게 되면 은원의 고리에 빠져들게 된다.
둘째로, 고의적인 살인이다. 성경은 고의적인 살인에 대해서 단호하게 징벌한다.
⑳개혁주의 입방에서 전쟁에 대하여 설명하라
전쟁은 어떤 면에서 대규모의 살인 행위이다.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뒤따르지만 궁극적으로 국가 간의 이기심과 탐욕의 발로이다. 우리는 정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첫째, 평화주의이다. 성경은 평화를 명시적으로 명령하지만, 전쟁은 명시적으로 명령하지 않기 때문에 안 된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이 직접 전쟁을 명하신 경우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개인과 교회는 폭력에 맞대어 싸워서는 안 된다. 철저하게 평화 주의적, 비폭력적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쟁은 개인논리가 아니라 사회논리이다. 국가는 법적인 강제력을 가지고 죄의 세력을 억제하는 경찰력, 군사력을 가지고 이 땅위에 정의를 실현함으로 국민들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기독교인들도 국가의 일원으로 의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그들은 인간 생명의 가치는 무한한 가치이기 때문에 전쟁을 반대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뜻보다도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둘째로, 정당전쟁론이다. 영토와 국민을 방어하기 위해서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전쟁은 협상, 분쟁 등의 최후의 노력 후에 있는 것이다. 전쟁을 하더라도 비 군인, 포로 들을 보호해야 한다. 전쟁의 목적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셋째, 대의전쟁론이다. 전쟁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반적인 전쟁과 대의명분이 뚜렷한 전쟁을 구별한다. 1, 2차 전쟁의 미군참여, 한국전쟁 참여들이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후세인 독제 정권을 무너트리고 민주정부를 세우는 대의정쟁이라고 주장하지만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대의전쟁론의 주의 점은 그 대의가 어는 한 세력의 일방적인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십자군 원정과 종교전쟁 등이 비판을 받는 이유이다.
전쟁이론들이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건실한 인간관의 토대위에 수립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전쟁에 대한 기독교적 이론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현 실태를 반드시 고려한 이론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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