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역사신학

신비의 해석

예림의집 2012. 10. 28. 22:02

신비의 해석

 

  이 교리는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황제는 신자가 되면서 교회가 노쇠해가는 제국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어 주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회 자체가 한데 뭉치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내분이 심하고 서로 당파가 싸우는 교회는 이리저리 찢겨 나가는 모습의 제국을 한데 묶어둘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신학과 교리의 문제로 서로 다툼이 극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골치를 앓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안과 갈레리우스 치하에서 극심한 박해에 시달렸던 바로 그 신자들이 이제는 교리 문제로 이견이 있는 다른 신자들이 교회에서 축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를 위해서 국가의 권력까지도 동원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러한 교회내의 계속적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혹은 신자들이 믿는 바에 함께 동의하도록 하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동방의 가장 극심한 논쟁의 시발점은 알렉산드리아였다. 영향력이 있던 바우칼리스 교회의 목사 아리우스는 그의 감독 알렉산더와 충돌하게 되었다. 318년 경,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셨던 말씀(Logos)은(요 1:14) 기실 진정한 하나님은 아니며 전혀 다른 본질이며, 영원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고 주장함으로써 알렉산드리아의 교사들에게 도전하였다. 아리우스는 신자들이 성자를 하나님이라 부를 때 이는 대개 상징적인 의미이며, 실제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신성을 인정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아리라고 하였다. 그(예수 그리스도)는 신보다 열등한 존재이거나 혹은 반신(half-god)이지, 영원 불변의 창조주 하나님은 아니다. 그는 다시말해 피조된 존재이다. 물론 최초로 지음을 받았으며 가장 위대한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역시 창조 받은 존재이다. 아리우스는 니코메디아 감독 유세비우스에게 자기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아들에게는 시작이 있다. 그러나 ... 하나님에게는 시작이 없다."

  이러한 가르침은 원래 이교도 출신이었던 많은 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쳤다. 이는 그들의 소시적의 종교적 교훈과 너무나 비슷하였다 예를 들어 영지주의는, 우리들이 이미 살펴본 바처럼, 혼자서 독존하시는 한 분의 지존하신 하나님이 계신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의 수하에 몇몇 보다 낮은 존재들이 있어서 하늘과 땅을 왕래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이룬다는 이론이었다. 이교로부터의 개종자들은 말씀이 영원 전부터 존재했으며, 그는 성부 하나님과 동격이라는 기독교의 교훈을 이해하기 힘들어 했다. 아리우스는 이들에게 알고 이해하기 쉬운 기독교를 제시했던 셈이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일종의 신적인 영웅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일반인들보다는 위대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보다는 낮은 위치에 있다는 이론이었다.

  아리우스의 입장은 그가 유창한 설교가였고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가 능숙하였으므로 보다 인기를 끌었다. 논쟁의 초기에 그는 그의 이론에 마치 오늘날의 라디오 선전에 쓰이는 노래처럼 단순한 곡조를 붙여 보급하였다. 그리하여 부두 하역 노동자들이나, 거리의 노점상들, 시내의 어린 학생들이 이를 부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더 감독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320년 경 알렉산들이아에 교회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의 주장을 정죄하고 그를 파문시켜버렸다. 아리우스는 그의 친구였던 니코메디아 감독 유세비우스에게 호소하여 그의 지지를 등에 업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학적 문제의 충돌이 당시 동방에서 가장 강력했던 두 교회들의 세력 다툼의 양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당시 니코메디아는 정치적 수도라면,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의 중심지였다. 아리우스는 지지자들의 세력을 힘입어 알렉산드리아로 귀환하였으며, 이곳에서는 곧 거리에서 폭동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러한 폭발 가능성을 즉각 해소시켜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325년 니코메디아에서 가까운 소 아시아의 니케아에 공이회를 소집하였다. 황제가 최초로 소집한 회의의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참석한 300여명이 감독들은 대부분 박해 시절의 참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은 그 몸에 고문과 투옥의 흔적들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이는 박해로 한 눈을 잃었으며, 또 고문으로 두 손의 기능을 상실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고난의 기간은 영영 지나가버린듯 생각되었다. 감독들은 이전처럼 관헌들의 체포를 두려워하여 비밀리에 니케아를 향해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전처럼 먼 길을 도보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손님들로서 편안하게 마차들을 타고 회의를 향해 갔으며, 그 비용 일체를 초청자인 황제가 부담하였다.

  니케아의 회의장 중앙에는 콘스탄티누스가 좌정하였든데, 처음에 그는 순진하게도 이 모든 문제가 용어 사용의 차이에 불과한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회의를 초기단계에서 주재했던 황제는 현란한 제복을 차려 입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광휘에 밫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전통적인 로마 황제의 소박한 자주빛 제복이 아니라, 보석들을 수 놓고, 여러 가지 색깔로 짠 동양 군주식의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회의 참석다들에게 간단한 연설을 하엿다. 그 내용은 이들을 분열시키고 있는 신학적 문제의 차이를 극복하고 무언가 일치점에 도달해야 한다는 그의 입장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 내의 분열은 전쟁보다 더 악하다고 말했다. 자기의 입장을 명백하게 전달한 황제는 한쪽으로 물러나, 분재의 해결을 교회 지도자들에게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