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구약신학

출애굽기 산책

예림의집 2012. 10. 15. 20:20

나는 본문을 최대한 회손 하지 않는 방법으로 정리하고, 글의 대한 짧은 코멘트를 각주를 이용하여 적으려 한다. 그리고 말미에 본서를 읽으면서 의문점이나 감탄한 점, 반대적인 생각들을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지면 관계상 앞부분이 자세히 정리하였고, interaction 또한 그곳에 집중되어 있다.

 

머리말: 출애굽기 산책

저자는 이 글이 주석으로 의도된 책이 아니라 책 제목 그대로 “산책”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저자의 의도에 따라 출애굽기의 모든 것들을 자세히 다루지 않고, 자유롭게 산책하듯이 풀어나갈 것이라고 소개한다. 저자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저자가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난감한 경험들이 결국은 그를 더 깊은 감동으로 이끌어주었기 때문이며, 이 책의 독자들 역시 그런 과정에 대한 이해가 더 깊은 감동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는 또한, 이 책이 이런 성격을 띠게 된 이유는 이 책이 지난 몇 년 동안 축적해 온 출애굽기 강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책은 2009년 5, 6월호의 매일 성경 출애굽기 본문 해설을 집필하면서 얻은 통찰들과 박사학위 논문, 거기에서 빠진 사항들을 2009년 봄 학기에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출애굽기 강의를 하면서 보충시켰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부분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독자들이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점들이라고 여긴 것들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했음을 말한다.

 

1장 서론

저자는 출애굽기는 "노역에서 예배로", 그리고 하나님의 "부재에서 임재로, "하나님에 대한 앎에서 하나님에 대한 섬김으로의 틀을 갖고 있다고 규정한다. 즉 출애굽기는 바로 섬기는 것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끝이 나며, 하나님의 손길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암울함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느껴지는 찬란함으로 끝을 맺는다고 설명한다. 또한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 중에 출애굽의 이야기, 광야에서의 돌보심, 언약과 율법, 성막 건설 등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고 말하며. 이런 면에서 출애굽기는 신앙과 신학의 보고라고 천명한다.

저자는 출애굽기의 제목을 설명하면서 서론을 시작한다. “출애굽기의 히브리어 제목은 쉐모트이다. 이것은 고대의 책들에 제목을 붙이는 전통을 따라서 이 책의 첫 문장인 엘레 쉐모트에서 따온 것이다. 쉐모트란 단어의 뜻은 "이름들"이다. 출애굽기 저자는 책의 서두인 1:1-5에서 창 46:8-27의 족보를 요약하고 있는데, 이 족보 본문이 바로 엘레 쉐모트란 문구로 시작된다. 불행히도 이 히브리어 제목은 이 책의 성격을 그다지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라고 말함으로서 히브리어 제목에 대한 부적절성을 지적하고 있단. 반면, “현재의 성경 번역본들에서 표준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제목인 "출애굽기란 제목은 헬라어 역본인 칠십인경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즉 헬라어 제목인 엑서더스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 단어는 "나감(going out)"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구약개론들은 이 제목이 출애굽기와 잘 어울린다는 주장을 많이 하는데 이 헬라어 제목이 히브리어 제목보다 나은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이 책의 제목으로서는 그다지 적절한 것 같지는 않다.”고 지적하면서 그렇지만 유구한 역사를 가진 전통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편의상 그냥 이 제목을 따라 쓰고자 한다고 설명한다.

이어서 저자는 구약 내에서의 출애굽의 위치, 출애굽기의 구조 및 내용 개관, 등을 설명한다.

 

2장 출애굽기 1:1-7

저자는 출애굽기를 구약의 책들 중에서 가장 독특한 서론을 가진 책이라고 소개한다. 1:1-7은 비록 짧지만 당당하게 하나의 독차적인 단원으로서의 가치가 있고, 그 이유는 저자가 이 단원을 창세기와 출애굽기 사이의 가교(架橋)의 역할을 하도록 의도했기 때문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첫째, 창세기로부터 출애굽기로의 몇 백 년의 시간을 건너뜀으로써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린다. 둘째, 이 단원은 이미 몇 백 년의 시간동안 야곱의 열두 아들과 그 부양가족들(1:1)이 하나의 큰 민족(1:7)으로 성장한 것을 언급한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내레이터는 무심하게 몇 백 년의 기간을 건너뛰어 버리는 듯 하지만 사실 이 기간을 결코 무의미한 시간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다. 내레이터가 이 여백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첫째, 1절과 7절의 브네 이스라엘( בְּנֵי יִשְׂרָאֵל)이라는 어구이다. 둘째, 내레이터는 7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선언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전체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약속하셨던 "생육과 번성"의 모든 축복들을 이스라엘이 이미 성취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한 가족이 한 큰 민족으로 바뀌는 기간이었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조상들의 모든 축복들을 성취하는 기간이었다. 즉 이 기간은 의미가 충만한 기간이었다. 생략된 몇 백 년의 기간은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기간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나가시는 기간이었다.

3장. 출애굽기 1:8-15:21

저자는 3장을 통해 모세의 탄생에서부터 그의 도피, 부르심, 애굽 왕 바로와의 대결, 유월절, 이스라엘의 해방 등 방대한 분량을 다루고 있다. 그 내용들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저자는 이스라엘에게 닥친 위기와 이 위기 속에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밀한 은혜를 다루고 있는 이 단원은 출 3-4장의 모세의 소명에 대한 본문과 그 이 후의 다른 본문들의 배경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단락은 크게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게 된 배경적 상황을 서술하고 있으며, 작게는 모세의 탄생시의 상황을 제공해주고 있다. 우선 이스라엘이 바로의 폭정 아래서 겪은 고통과 강제노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시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또한 이 억압의 상황은 종 모세가 탄생하는 배경을 제공해준다. 본문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출 1:1-7을 제외하면 출애굽기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1:8에서 내레이터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라는 문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첫째, "새 왕" 이라는 표현 자체가 지금까지의 상황에 대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날 것임을 예고해준다. 둘째, 이러한 불길한 느낌을 더욱 두드러지게 해주는 것은 이 왕이 "요셉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애굽의 새 왕이 "알지" 못해서 발생한 문제는 하나님이 "알게" 됨으로써 해결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처럼 "알지 못하다"와 "알다"가 충돌하면서 플롯을 진행시킨다.

새 바로는 이스라엘에 대한 실체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제거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1장은 그가 단계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단계의 방법을 시행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은밀하고 우회적인 것이었다. 이 방법은 강도 높은 노동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생식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만다. 두 번째 방법은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동원하여 히브리인들을 말살하는 일에 히브리인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히브리 산파"들이 "애굽 왕"인 그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 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는" 것을 다시 한 번 목도하게 되었다. 세 번째 방법은 히브리인의 모든 남자 아이를 무조건 죽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절제절명의 상황 가운데 모세가 탄생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 아들을 세 달 동안 숨겼다. 그리고 아들을 숨기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졌을 때 두 번째 수단으로 갈대 상자에 담아서 나일 강에 띄워 보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바로의 딸에게 발견되었고 그의 누이의 기지로 친 어머니의 품에서 양육 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멀리”라는 표현을 물리적으로는 멀지만 심리적으로는 가까움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모세는 젓을 댄 후 바로의 딸에게로 가게 되며 그 곳에서 40년 동안 살게 된다.

모세는 바로의 딸에게 입양되기 전까지 자신을 길러주었던 친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동족 히브리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보여준다. 출애굽기 2:11은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표현은 "자기 형제들"이라는 표현과 "보더니"라는 표현이다. 모세는 자기 형제들을 보러갔다가 한 애굽 사람이 히브리인을 때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애굽 사람을 처 죽였다. 이후 동족간이 싸움을 말리다가 이 사실이 발각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모세는 좌절에 부딪쳤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의 좌절을 하나님의 좌절이나 구속사의 좌절로 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모세의 좌절을 초월해서 흘러간다. 인간의 낙심으로 인해 시계가 멈춘 것처럼 보이는 때에도 하나님의 구속사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애굽에서 도망을 친 모세는 미디안 땅에 이르러 한 우물에서. 자기 아내가 될 여인을 만나고, 장인 이드로의 집에서 살게 된다. 저자는 이 장면에서 “우물가 이야기 타입신” 에 대해 소개한다.

 

저자는 출애굽기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결코 무대 중심에 서지 않으셨고, 숨어계셨다고 말하며.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의 중심 무대에서 숨어 있으시되 결코 활동하지 않으신 분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제 저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의 전면으로 나오시는지 설명한다. 드디어 40년의 세월을 지나 진정한 역사의 영웅이신 하나님께서 베일을 벗고 등장하신다. 모세가 한숨을 쉬면서 흘러 보낸 40년의 세월의 틈을 뚫고 진정한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움직이기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보고 움직이기 시작하시는 것을 네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그 언약을 기억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보셨고, 하나님이 아셨다.” 우리의 절망이 하나님의 절망은 아니다. 우리에게 낙심과 절망의 순간이 하나님에게는 변화와 능력의 순간일 수 있다.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하나님에게는 시작의 순간일 수 있다.

3:1-2는 두개의 인식론적인 차원을 담고 있다. 모세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비범한 일을 다루고 있는 3장의 처음 두 절은 이런 면에서 무척 흥미롭다. 평범과 비범이 충돌하는 것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산"이란 표현은 모세라는 인간의 시각과 그 인간을 만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시각을 나누어 놓는다. 모세라는 인간의 시각 속에서 볼 때 그는 전혀 색다를 것이 없는 또 하나의 하루를 양치기로 살기 위해 호렙이란 산에 이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 날은 무턱이나 특별한 날이다. 이 날은 이스라엘의 처지를 돌아보신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벌떡 일어나시는 날이다. 곧 인간 대리자를 불러 세우시는 날이요 역사가 완전히 달라지는 날이다. 모세의 이 제한된 시점으로 볼 때는 떨기나무 불꽃은 신기한 현상, 곧 "큰 광경"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그는 왜 떨기나무가 불타 없어지지 않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직 모세는 이 "큰 광경" 뒤에 하나님이 숨어 계심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호기심만으로도 하나님의 사역은 성공을 향해 가고 있다. 무의식적으로나마 그가 하나님 존전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3:4에서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다. 이처럼 두 번 이름을 부르는 것은 상황의 긴박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모세를 두 번 급히 부르신 후에 하나님은 이어서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명령하신다. 이어서 하나님은 자신을 "네 조상의 하나님" 이라고 밝히시다. 이에 대한 모세의 반응은 급히 얼굴을 가린다. 모세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킨 하나님은 이제부터 당신께서 모세를 통해 하실 일을 천명하신다. 하나님의 출사표는 크게 7-8절과 9-10절의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이 두 부분은 그 내용이 거의 같다. 7, 9절은 이스라엘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인식을 담고 있고, 8, 10절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를 담고 있다. 하나님의 출사표에 나타난 사항 중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으로부터(from)'의 성격을 가질 뿐만 아니라 또한 '어떤 것을 향한(to)'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모세가 어느 날 하루 동안 경험한 사건은 그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는다. 애굽 왕자에서 어느 광야 미디안 부족의 양치기가 되었던 모세는 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양치기이자 지도자로 거듭난다. 광야의 보잘것없는 떨기나무에 붙은 불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아무리 평범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임재는 모든 것을 뒤흔드는 능력을 갖고 있다. 평범한 떨기나무 하나가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모세의 삶을 바꾸었듯이, 평범한 모세 역시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인류의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기는 자로 탈바꿈하게 된다.

3:7-10의 하나님의 출사표는 하나님과 모세 사이의 아주 긴 대화의 출발점이 된다. 이 대화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중에 가장 긴 것이다. 이 긴 대화는 모세의 질문이나 의사표현에 하나님의 대답이 맞물리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대화의 흐름이 상당히 논리적이다. 내용의 흐름을 볼 때 이 대화는 치밀한 논리적 흐름을 갖고 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선 이 긴 대화의 발단은 3:7-10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데 있어서 자기를 대리자로 임명하셨다는 소리를 들은 모세가 거기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모세의 이 의문에서 방점은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것에 있다. 모세는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에 있다. 네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점이라고 대답하신다.

둘째,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답하신다. 3:14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계시는 15-22절의 하나님의 아주 긴 말씀으로 이어진다.

셋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할 때의 신뢰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 손에 문둥병이 걸렸다 다시 낫는 이적, 그리고 하수의 물이 피가 되는 이적을 행사하도록 권능을 주신다.

넷째, 자신의 자격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자신이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니이다"라고 핑계를 댄다. 모세는 그의 말대로 말을 잘 못하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다섯째, 놀랍게도 모세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당신이 중요한 것이라면, 그래서 내가 말 잘하고 못하는 것마저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면 왜 굳이 저여야 합니까? 저랑 이렇게 실랑이 하실 것 없이 그냥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을 보내십시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드디어 분노를 발하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종 모세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첫째, 아론을 대변자로 허락하신다. 둘째, 하나님은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신다. 셋째, 아론이 모세의 입을 대신함에 있어서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고 말씀해주신다. 하나님의 이 마지막 말씀에 대한 모세의 대답은 본문에 나와 있지 않다. 마지막 말씀을 통해 모세에게 사역의 동반자로 아론을 허락하시고, 모세에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이적의 권능을 확인시켜주는 지팡이까지 허락하시자 모세는 드디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인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내레이터가 20절은 애굽을 향해 가는 모세의 모습을 그리면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언급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사실 이 지팡이는 모세가 들고 다녔던 그 자신의 지팡이였지만, 이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여서 사역지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그리면서 내레이터는 이것을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부르고 있다. 표현은 모세의 달라진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모세의 지팡이는 그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냥 그의 지팡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그것은 이적을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모세 역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그냥 미디안의 한 양치기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후 그는 자기 형과 애굽 왕 바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마치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5장부터는 본격적으로 하나님과 애굽 왕 바로와의 대결, 하나님의 구원과 출애굽 사건을 설명한다. 저자는 5-15장을 “해결적 플롯”과 “드러냄의 플롯”으로 읽힐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는 본문을 드러냄의 플롯으로 읽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알다”라는 단어라고 말한다. 바로는 여호와를 알지 못함으로 모세의 말을 듣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증명하신다. 저자는 또한 바로의 강퍅함이 하나님의 예정된 섭리인지, 아니면 그 자신의 스스로 엮은 올가미인지를 심도 있게 다룬다.

저자는 출애굽기 11:1-13:16의 유월절 본문에 대한 해석을 저자가 목회와 신학에 발표한 글을 읽어보기를 권하며 설명하고 있다. 단지 본문에서는 “피를 보시면”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간략하게 요셉의 뼈,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다루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홍해의 기적을 통한 마지막 결전에 대해 설명한다.

 

4장 출애굽기 15:22-18:33

저자는 본문에서 새로운 시작이라는 개념으로 광야 생활을 조명하고 있다. 저자는 앞의 단원들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설명한 후, 모세오경의 광야사건의 구조 및 이해를 설명한다. 광야사건에 대한 내용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바로 시내산 이전 부분과 시내산 이후 부분이다. 저자는 모세오경의 광야 시대 사건들의 구조를 도형과 표를 통하여 자세히 설명한다.

이어서 광야 사건들의 특징들을 설명하는데 첫째, 이 사건들은 배열에 있어서 시간적 순서 보다는 주제적 요소가 더 중요하다. 둘째, 문제발생,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 모세의 중재 혹은 기도, 하나님의 구원 응답 등의 공통적인 패턴을 갖는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에 따라 하나님의 징벌이 따르기도 한다. 넷째, 시내산 이전의 광야사건들 속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등이다.

저자는 이어서 광야 사건의 중요한 어휘들을 설명한다. 은 “투덜거리다, 불평하다”, 야아드는 “(정해진 장소에) 모이다”, 딥베르는 “말하다”, 나사는 “시험하다”란 의미이다.

저자는 물과 치료자에 대한 내용을 분석하고, 물로 시험하시는 한님과 순종을 설명한다. 또한 만나와 메추라기의 설명을 통하여 식량의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설명한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의 동반자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아말렉과의 전쟁, 이방인인 이드로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 이스라엘 관리 제도를 설명하고 광야시기를 긍정적인 관점과 부정적인 관점에서 정리함으로 이 단락을 마친다.

 

5장 출애굽기 19:1-24:11

본 장은 십계명이 주어지는 장면이다. 저자는 19-40장을 이중 인클루지오 구조로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19:1-24:11과 24:12-40:38의 두 부분으로 나누고, “새로운 문맥적인 맥”과 “시간의 틈”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이중 인클루지오를 출 19:7, 8과 출 24:3,7의 내용을 도표로 비교하며 설명한다.

저자는 언약과 거룩을 설명하고 있고, 이스라엘과 제사상 하나님의 도표와 세상, 이스라엘, 하나님의 도표를 비교하고 연관시켜 설명한다. 저자는 언약식의 조건으로 첫째,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거룩함을 갖추어야만 한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셋째, 거룩함을 갖추고 하나님께 정하신 때에 하나님을 만나는 경우에도 인간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십계명에 대해 의외로 간략하게 설명한다. 십계명의 핵심은 결국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십계명을 요약해서 말씀하실 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으로 요약하신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십계명 본문 자체에서도 잘 드러난다.

두려워말고 두려워하라는 계념을 자세한 예를 들어 설명한다. 이어서 언약의 책으로 불리는 20:2-23:19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16가지의 율법을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노예에 대한 율법, 동해동형법,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등을 설명하고 언약의 체결 과정을 설명함으로 본 장을 마친다.

 

6장 출애굽기 24:12-40:38

본문은 크게 성막이야기와 황금 송아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두 이야기의 서론, 성막건설의 자세한 하나님의 명령, 대제사장과 제사장의 의복 및 위임식, 분향단에 대한 설명, 성막 건설 이야기, 황금 송아지 이야기 등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interaction

 

1. 각 주제마다 저자의 의견 및 강조점을 설명하는 부분은 일반 책에서 접할 수 없는 독특하고 유익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많은 부분에서 동의가 되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이렇게 함으로서 독자들이 어긋나지 않고 저자와 함께 출애굽기를 산책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2. 머리말의 이 책의 집필 배경을 친절하게 설명한 부분은 본받을 만하다. 그러나 책의 집필의 도움을 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글이 너무 길지 않은가 생각된다. 물론 이 부분은 저자의 자유이고 권리이나 너무 길면 앞서 읽은 부분들을 놓쳐버리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 부분 “이 책이 징검다리가 되어….”는 감동적이다.

 

3. 출애굽기 1:1-7절을 다루면서 저자는 줄기차게 하나님의 창조 명령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완성되었다고 주장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일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이 명령은 꼭 이스라엘 민족들만이 아닌, 모든 인간들이, 그리고 지금 나도 완성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저자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완성되었다고 하는 주장의 의미를 더 알고 싶다.

 

4. 이와 연관해서 저자는 바로의 박해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하였는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바로의 그러한 행동은 자기 민족에 대한 본능적인 방어행위가 아닐까 생각된다. 저자의 말은 너무 구속사적인 틀에 바로의 자기 방어를 끼어 넣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애굽 민족의 번성 또한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한 도전이 아닌 순응이 아닐까?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5. 한 가지 중대한 오타를 발견하였다. 저자가 “알다”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 본문을 소개할 때 1:8절을 “야곱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라고 요셉을 야곱으로 잘못 표기함으로서 순간 당황하게 되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로 정정해야 할 것이다.

 

6. 42p에 이 책 중에서 가장 멋진 문구를 발견하였다. 모세의 탄생 배경을 마태복음 2장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배경과 연결시키는 부분은 출애굽기를 떠나 구약을 읽으면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한다고 보겠다. “하나님의 역사는 구속사의 진행을 막으려는 대적자들의 집요한 방해를 뚫고 성취된다.”는 글을 읽을 때 소름이 돋았다.

 

7. 저자는 모세의 이름을 설명하면서 52-53p의 두 번째 주앙에 대한 반박 글에서 예를 든 왕 23:34와 24:17이 내용은 본문과 너무 거리가 먼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수 백 년이 흐른 시대의 사상적 개념과 본문을 연결시키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지 않을까? 앞의 사건들이 후에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어도, 후에 일어난 일이 앞의 일을 설명해 줄 수는 없지 않을까? 외국의 통치자들이 유다의 왕들을 다른 히브리어 이름으로 개명시킨 경우들이 바로의 딸이 히브리인들에게 자문을 구해서 모세에게 히브리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빈약해 보인다. 나는 저자의 글에서 어떤 연관성도 발견할 수 없었다.

 

8. 57p의 다음 문구는 수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이처럼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제거될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문맥의 정황상 주체는 애굽의 적자 왕자들일 것이다. 주체를 모세로 본다면 제거되는 것이 좋은 핑계라는 이상한 말이 되어 버린다. 아마도 모세의 이런 잘못이 그의 정적으로 하여금 그를 “제거할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9. 86p에서 저자는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질문과 응답)를 설명하며 일관되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맞는 이야기이지만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생각을 해 보았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가 스며있지 않을까, 하나님의 이러한 부르심은 인생의 패배자로 끝날 수도 있었던 모세에 대한 개인적인 구원의 의미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10. 저자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내러티브 기법상 모세의 달라진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부분은 저자의 탁월한 적용이라고 생각한다. 적용면에서도 “지팡이가 결코 교만할 수가 없듯이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는 자들도 결코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11. “드러냄의 플롯”이란 생소한 용어를 접하며 기뻤다. 그러나 그 용어를 다 이해 하기에는 내 지식이 너무 짧았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인클루지오”라는 용어는 너무 생소했다. 본문에서도 자세한 설명이 없기에 사전을 찾아보았다. 바로 수미쌍관법을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말이 있는데 구지 이렇게 생소하고 어려운 단어를 써야 하나 싶다. 하지만, 덕분에 “인클루지오”라는 용어를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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