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에 대한 인내(3:11-4:17)
바로 앞에서 살펴본 3:7-10의 하나님의 출사표는 하나님과 모섹 사이의 아주 긴 대화(3:11-4:17)의 출발점이 된다. 이 대화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 중에 가장 긴 것이다. 이 긴 대화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3:11 모세의 질문("내가 누구이기에")
3:12 하나님의 응답("내가 정녕 너와 함게 있으리라." 증표 제시)
3:13 모세의 질문(하나님의 정체?)
3:14 하나님의 응답(나는 스스로 있는 자)
3:15-22 하나님의 응답
3:15 (나는 조사으이 하나님, 14절의 확장)
3:16-17은 3:7-10의 반복
3:18-22 출애굽까지의 세부적인 계획 지시
3:18 장로들과 함께 바로를 만남
3:19-20 바로의 강퍅과 하나님의 징계
3:21-22 이스라엘이 풍부한 적을 갖고 나갈 것임
4:1 모세의 질문(내 말의 신뢰성을 무엇으로 이스라엘이 인정할까?
4:2-9 하나님의 응답: 세 가지 표징
뱀
문둥병
물이 피가 됨
4:10 모세의 응답(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
4:11-12 하나님의 응답(내가 입의 창조주, 네 입과 함께 하리라)
4:13 모세의 마지막 거부(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4:14-17 하나님의 은답(아론의 동행을 허락)
이 구조에서 보듯이 이 대화는 모세의 질문이나 의사표현에 하나님의 대답이 맞물리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태화의 흐름이 상당히 논리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학자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러나 내용의 흐름을 볼 때 이 대화는 치밀한 논리적 흐름을 갖고 있다.
우선 이 긴 대화의 발단은 3:7-10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데 있어서 자기를 대리자로 임명하셨다는 소리를 들은 모세가 거기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3:11)". 모세의 이 의문에서 방점은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것에 있다. 모세는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이 의문문 속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라고 대답하신다. 하나님의 대답에서 나타난 방점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게 있으리라"에 있다. 즉 모세가 "내가 누구이기에" 그런 일을 맡아야 하느냐고 말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네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점이라고 대답하신다. 그리고 그의 사역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의한 것이라는 증거로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여기에서 "네가 너와 함께 하리라(에흐크 임마크)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이다, 있다"라는 의미를 가진, 즉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하야동사이다. 이 동사는 3:14에서 여호와 혹은 야훼라는 이름의 기초가 되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개역개정판,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번역)라는 표현과 연결된다.
이처럼 하나님이 이 사역에서 중요한 것은 "네가 아니라 바로 나다"라고 대답하시자 모세는 이번에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라고 질문한다. 모세의 질문을 풀어서 말하자면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중요한 것이라면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11절의 질문이 모세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질문이었다면 이 13절의 질문은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잇는 자(에흐예)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대답하신다. 하나님이 자신의 정체를 설명하는 말로 주신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가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방대한 문헌들이 존재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번역은 이 난해한 문장에 대한 하나의 편의적인 해석일 뿐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문장이 당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에 대한 거부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이름을 아는 것은 곧 그 이름을 가진 존재에 대한 통제를 의마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레다임이 잘 지적했듯이 이런 해석은 문맥상, 그리고 구약의 용도상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문맥상 3:14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어떤 보장을 해주셔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문장이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는 의미에서 주어졌다고 보면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는 진행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이어지는 3:15-17에서 하나님은 이 이름을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이름과 동격으로 사용하시고, 또 구원에 대한 보장과 더불어 사용하시고 있다. 그러르모 이 이름은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은 듯하다. 이점은 에흐예란 표현을 "~와 함께"란 표현과 함게 사용하고 있는 현재의 대화 본문 속의 3:12; 4:12, 15 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에 따라 프레다임은 이 이름이 스스로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신의를 지니신 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변덕이나 임의성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여호와 하나님은 신뢰를 할 수 있는 분이다.
3:14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계시는 15-22절의 하나님의 아주 긴 말씀으로 이어진다. 우선 15절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와 관련된 여호와라는 하나님이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임을 밝힌다. 그리고 16-17절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아 놓고 그들엑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고난을 보았으며, 이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천명하도록 지시하신다. 이 16-17절의 말씀은 3:7-10의 말씀과 상응한다. 모세가 자신의 사명과 관련하여 들은 말씀을 이제 그는 이스라엘에게 전하도록 명령을 받은 것이다.
18-22절에서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일 때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 사역이 완수될지를 상세하게 말씀해주신다. 우선 18절 전반절에서 하나님은 장로들이 모세의 말을 순종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18절 후반절에서 하나님은 모세가 이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가서 어떤 식으로 말할 것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신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바로 대신 "애굽 왕"이라는 표현을 쓰신 것은 바로 이어 나오는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과 대비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당분간 하나님은 철저히 히브리인의 하나님으로서 그 대적자인 애굽왕을 처리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 지시를 모세는 나중에 5:3에서 실행한다.
이어지는 19-20절에서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수행한다고 해서 그의 사역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무조건 순탄할 것이라고 결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애굽 왕은 하나님이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모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이스라엘을 보내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세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그에게 무작정 장미빛 희망만을 주신 것은 결코 아니엇다. 하나님은 그가 감당해야할 어려움도 분명하게 그에게 주지시켜 주었다. 그너나 애굽 왕 바로의 반발이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무의미하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21-22절이 밝히고 있듯이 그의 저항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대처의 결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살이의 값을 받아내게 된다.
13-22절의 대화를 정리해보도록 하자. 모세는 13절에서 2절의 하나님의 대답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나와 함께 해주시겠다는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취지로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나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니라"는 대답과 더불어 모세가 해야 할 사역의 총체적인 그림을 제공해주셨다. 이 사역에서 모세가 할 일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가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할 필요도 없고, 자기의 능력으로 마술을 부려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면 나머지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었다.
그러자 4:1에서 모세는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라고 말한다.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정체성의 문제를 핑계 삼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하려다가 실패하자 이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할 때의 신뢰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4:2-9에서 세 가지 이적, 즉 지팡이가 뱀이되는 이적, 손에 문둥벼잉 걸렸다 다시 낫는 이적, 그리고 하수의 물이 피가 되는 이적을 행사하도록 권능을 주신다. 이 이적들은 5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 이었다. 즉 모세의 말의 신뢰성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보여준 이적들을 통해서 증명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다시 한 번 자신의 소명을 회피하는 것을 실패하자 모세는 이번에는 자신의 자격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자신이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니이다"라고 핑계를 댄다(4:10). 그는 자신과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이해하겠고, 하나님이 주신 이적도 인정할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이 그 일에 합당한 능력, 즉 말을 잘 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오랫동안 주석가들은 모세의 이 말의 진실성에 대해서 논구를 하였다. 그러나 모세의 이 말은 그냥 그의 핑계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듯하다. 왜냐하면 최소한 성경 본문 내에서 이 본문 이후로 모세의 말하는 능력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만한 요소는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많은 순간 너무나도 놀라운 언변을 발휘한다. 추애굽기 32-34장의 황금 송아지 사건에 대한 중보기도를 할 때 이 점은 특히 두드러진다. 이런 점에서 볼 때사도행전 7":22의 내용이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모세가 에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이 능하더라."
모세가 이처럼 핑계를 대자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신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는냐 누가 말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는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라고 말씀하신다(11절). 그리고 이어서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12절)" 다시 한 번 모세가 어떤 사람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네 입과 함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있다"는 동사는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다시 한 번 에흐예이다. 즉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리고 하나님이 모세와 함게 하시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모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런 보장을 받았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놀랍게도 모세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12절)". 이 해석하기 까탈스러운 말을 통해서 모세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당신이 보내고 싶은 사람 아무나 사자로 보내시라(Snsd whatever messenger you like)는 말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 말은 사실 지금까지의 하나님과 모세 사이의 대화의 흐름의 핵심을 찌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모세의 이의제게에 대해 하나님게서 하신 대답을 풀어서 옮기자면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중요한 것이다. 너는 그냥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해주마"라는 것이다. 모세는 다시 한 번 이 점을 파고든다.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당신이 중요한 것이라면, 그래서 내가 말 잘하고 못하는 것마저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면 왜 굳이 저여야 합니까? 저랑 이렇게 실랑이 하실 것 없이 그냥 가고 싶어하는 사람을 보내십시오."
그러자 하나님은 드디어 분노를 발하신다(14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종 모세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첫째,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의 종 아론을 대변자로 허락하신다. 이 아론에 대햐어 하나님은 "그가 말 잘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사실 오경 전체를 통해서 아론이 독자적으로 무슨 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는 거의 항상 모세와 함께 있으며, 모세가 시키는 말을 할 뿐이다. 대변자로서 그가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둘째, 하나님은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신다(15절). 여기서 "함께 있어서"란 어구에 다시 한 번 에흐예가 사용되고 있다. 셋째, 아론이 모세의 입을 대신함에 있어서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고 말씀해주신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결코 빈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모세를 하나님처럼 보이게 하겠다는 주제는 출 7:1에도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그리고 출 14:31에서 출애굽의 큰 구원을 보고 "백성이 여호와를 겨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는 언급이 나온다. 이스라엘의 이런 반응은 결국 하나님의 지속적인 의도의 결과임이 출 19:9을 통해서 확인된다.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아 말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믿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넷째, 하나님은 모세가 지금까지 들고 다니던 지팡이를 가지고 이적을 행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지팡이는 모세가 방금 전에 뱀이 되는 이적을 체험했던 그 지팡이다(4:2-4). 이것을 모세에게 허락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실 것을 다시 한 번 그에게 확인시켜준다.
하나님의 이 마지막 말씀(14-17)에 대한 모세의 대답은 본문에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이어지는 4:18-20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애굽으로 가는 것을 볼 때 모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소명을 거부할 명분을 찾지 못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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