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구약신학

진정한 구속사적 영웅의 등장(2:23-25)-②

예림의집 2012. 10. 10. 20:58

진정한 구속사적 영웅의 등장(2:23-25)-②

 

  이 24-25절에는 문법적으로 특이한 사항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앞의 세 문장에는 다 목적어가 있는데, 마지막 문장에만 목적어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사실 마지막 문장은 타동사에 목적어가 빠져 있기 때문에 완전한 문장이라고 할 수가 없다. 마지막 문장의 이런 문법적인 파격 때문에 성경번역사 및 해석사 속에서는 다양한 해결책들이 동원되었다. 예를 들어 개역한글판 성경은 25절의 두 문장을 하나로 뭉뚱그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다"로 번역하였다. 개역개정판은 두 개의 문장의 틀은 유지하고 있지만 본문의 동사에 부연적인 의미를 추가하여 매끄럽게 보이려는 시도를 하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너무 지나친 의역을 하는 경향이 있는 표준새번역은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라고 아예 풀어쓰기를 해버렸다. 고대의 아람어 역본인 탈굼 옹켈로스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더라"고 부연해서 해석하였다. 칠십인경은 마지막의 동사를 수동태로 처리하여 "(하나님이) 그들에게 알려졌더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파격적인 문장 역시 24-25절의 다른 특징들과 마찬가지로 내레이터의 수사학적인 천략이라고 생각한다. 내레이터는 지금까지 자신의 내레이션을 집중해서 따라오던 청중들에게 의도적으로 목적어를 빠뜨린 이 불완전한 문장으로 이 단락을 마무리한다. "하나님이 아셨다." 독자들은 당연히 물을 수 밖에 없다. "무엇을, 도대체 무엇을 아셨단 말인가?"

  내레이터의 이런 수사학적인 장치를 고려할 때 3:1의 모세의 모습은 더욱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2:24-25에서 하나님이 고통받는 이스라엘 자손을 "보셨고, 아셨다"라고 할 때 당연히 독자들은 그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특단의 조치가 내려질 것을 디대할 것이다. 그러나 3장 서두의 모세의 모습은 어떤가? 그는 당대의 초강대국 애굽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내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하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자의 기대를 저버림으로써 내레이터는 엄청난 서스펜스를 창출해낸다. 어떤 이론가의 말을 빌려서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성경본문의 생존전략이다. 성경본문은 이런 식으로 역동적으로 독자를 안달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에게로 그들을 끌어드리나. 성경본문은 결코 수동적으로 독자의 관심을 바기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다. 독자의 관심을 지배하려 들고, 또 실재로 탁월한 기법들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 능동적인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