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본문 중심으로 본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와 사랑
박형대(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라는 질문은 신학의 기초를 세워가는 데 꼭 필요한
질문이다. 특별히 조직신학에서 ‘하나님의 윤리적 속성’ 견지에서 다뤄지는 하나님
의 거룩하심과 공의와 사랑에 대해, 앞선 글에서는 주로 구약성경본문에 근거하여
기술되었다. 여기서는 세 글에 기초하여 신약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거룩하시고 공
의로우시며 사랑이신 하나님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세 성품 중 각자에게 가장 잘 다가오는 성품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
려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르되,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공의로우
신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불러보면 될 것 같다. ‘아버
지’는 ‘사랑의 하나님’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마
저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어쩌면 ‘공의의 하나님’에는 ‘아버지’를 붙이지 않는 게 더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물론,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우리의 편견 때문에 생긴 것일 수
있다. 이러한 편견이 1세기 당시에도 있었는지, 베드로 사도는 거룩함에 대한 명령
(벧전 1:16)과 함께,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
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17)라며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아버지’를 연결 짓는다.
세상과 구별되어 계시면서 하시는 모든 일에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
공평한 법을 제정하시되 그 법을 친히 지키시고 그 법에 따라 판단하시는 공의의
하나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에도 불구하고 거저주시는 아낌없는 사랑으로 구원
을 작정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신약성경의 기도문에는 어떻게 불리
는가? 또한 어떤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가?
1. 주기도문에서
우선, 마태복음 산상설교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
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로 부르라신다. 직역하면 ‘우리 아버지
거1) 하늘 안의 분’이다. 하늘이 ‘참’ 성소이기에 ‘하늘 안의 분’에는 하나님의 ‘거룩
하심’이 강조되어있다고 하겠다. 이어지는 기도에 등장하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6:9)를 통해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거룩한 그 분의 나라와 뜻이
땅에 임하고 땅에서 이뤄지기를 간구한 다음(6:10),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가 땅에서 ‘아버지’의 거룩하심 안에 살아갈 수 있기를 간구한다. 이를
위해 “일용할 양식”, 죄 용서[빚 탕감], 시험에 들지 않는 것, 악한 자에게서 건짐을
1) 헬라어 관사를 ‘거’로 번역하였다. ‘거’는 ‘그거’의 준말로 뭔가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헬라어 관사를 ‘거시기’나 ‘거’로 번역할 수 있다는 필자의 논문에 기초하여,
‘거 있잖아’의 의미로 ‘거’를 사용하였다. “거 하늘 안에 [계신] 분”은 “거 있잖아요!
하늘에 계신 분!”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박형대, ‘성경 헬라어 관사 번역에
대한 교육적 제안’, 「성경원문연구」24 (2009), 93-109쪽 참고.
얻는 것이 필요하다(6:11-13). 여기서 ‘죄 용서’와 관계된 “우리 또한 우리의 빚진
사람들을 용서한 것처럼 우리의 빚을 용서해 주시며”에는2) ‘빚 탕감’과 ‘빚 탕감’이
대비됨으로써 ‘공평’한 대접이 강조되어있다.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
님의 자녀로서 제자들이 힘써야 할 것이 ‘죄 용서’임을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서도
‘잘못’과 ‘잘못’이 대비된다(6:14-15).
한편, 누가복음 11장 2-4절의 기도문을 통해서는, 이 땅에 하나님의 거룩하
심이 임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나눔’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11:5-8). 여행 중에 굶주린 벗을 위한 벗의 간청으로 말씀이 이어지고, 거룩한 영
[성령]을 주시는 “하늘 아버지”로 결론지어지기 때문이다(11:13). ‘죄 용서’에 대한
언급도 있지만, 마태복음과는 달리 “우리 자신도 우리에게 빚진 모두를 용서하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라는3) 기도에서는 우리의 ‘빚 탕감’과 하나님의 ‘죄 용
서’가 대비된다. 우리는 빚을 탕감해주지만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
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이 땅에 임하는데 여러 가지가 필요하지만
마태복음에는 공평한 ‘죄 용서’가, 누가복음에는 사랑의 ‘나눔’이 강조되고 있는 것
이다. 이러한 강조는 두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태복음에만 기
록되어있는 예배 전 형제와의 화해(5:23-24), 교회 내 형제의 죄 용서 과정
(18:15-17), 죄 용서 횟수와 일만 달란트의 비유(18:21-35) 등에는 ‘죄 용서’ 주
제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2:13-21), 부자와 나사
로의 비유(16:19-31), 삭개오 기사(19:1-10) 등에는 ‘나눔’ 주제가 부각된다. 누
가복음과 연결되는 사도행전에도 ‘나눔’에 대한 강조가 계속 나타난다(2:44-46;
4:32-37).4) 예를 들어, 일만 달란트 비유와 삭개오 기사를 비교해보면, 전자에는
일만 달란트나 탕감 받았으면서도 백 데니리온도 탕감해 주지 않는, 공평하지 않은
종에 대한 심판이, 후자에는 네 배 보상(출 22:1)뿐 아니라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는(눅 19:8), 다시 말해 율법이 규정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나누겠
다는 삭개오의 고백이 등장한다.
하늘에 계신 거룩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이 땅에 임하도록 힘써야 하는데, 특히 ‘죄 용서’와 ‘나눔’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죄 용서’는 ‘사랑에 기초한 공의’와, ‘나눔’은 ‘공의에 기초한 사랑’과 잘 연결될 것
같다. ‘용서’라는 게 사랑해야 가능한데 마태복음에는 용서를 통한 공평[균형]의 회
복이 강조되고, 누가복음의 ‘나눔’에는 공평하지[균형 잡히지] 않은 상태를 공평하
2) 이러한 번역과 누가복음 주기도문 부분과의 비교에 대해서는 정훈택,
『새로 번역한 공관복음 대조성경』(서울: 민영사, 2008), 71쪽을 보라.
3) 정훈택, 『새로 번역한 공관복음 대조성경』, 71.
4) 이두희(“누가-행전에 나타난 나눔의 윤리”, 「신약논단」18.3 [2011], 721-728)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눔’이 강조되어 있음을 “세레자 요한의 선포: 회개의 열매로서 재물을 나눔(눅 3:7-14)”,
“부자 관리와 삭개오 이야기(눅 18:18-30; 19:1-10)”, “바나바와 아나니아-삽비라 이야기
(행 4:32-5:11)”를 중심으로 기술한다.
게 함으로써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에
는 하나님의 ‘공의’가,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좀 더 강조되었을 것으로 기
대하게 된다. 실제로 마태복음에는 ‘율법’에 대한 논의가 많다.5) 예수님의 세례와
관련해서도,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하셨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3:15)라는 내용은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누가
복음에 강조된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방문’을 통해 강조되어있다. “하나님의 긍
휼로”(1:78)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하나님의 돌봄을 받는다. 하나님은 가브리엘
(1:19, 26)을 비롯해 여러 천사(2:9-14; 22:43; 24:4)를 보내셔서 백성을 만나주
신다. 예수께서 나인 성 과부의 독자 청년을 살려주셨을 때,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
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
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였다(7:16). 여기서 ‘돌보셨다’라고 번역된 헬라
어는 ‘에피스켑토마이’(evpiske,ptomai)로 신약성경에서 11회 사용되는데, 누가행전에만
7회 나온다(눅 1:68, 78; 7:11; 행 6:3; 7:23; 15:14, 36). 이 구절들에는 하나님과
그 분의 대리자들의, 돌봄을 위한 방문이 소개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방문을 하시는
분이고, 그 분의 일꾼들도 사랑의 방문을 일삼는 자들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
의 여행(9:51-19:46)도6) 대리자를 통해 백성을 만나주시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으
로 읽을 수 있다. 특히, 잃은 것들[양, 드라크마, 아들]의 비유가 있는 15장에 등장
하는 탕자의 아버지를 통해서, 누가복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하나님 ‘사랑’을
읽을수 있다.
지금까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차이점을 통
해, 두 복음서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이 땅에 ‘죄 용서’와 ‘나눔’으로, 또한 ‘공의’
와 ‘사랑’으로 실현되어야 함이 강조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공관복
음서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2. 사도행전의 기도문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배운 제자들의 기도문이 사도행전에
몇 개 소개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이 땅에 실현되기를 원하는 제
자들은 어떤 기도를 드렸는가? 우선, 1장 24-25절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
신 성령을 기다리는 제자들의 기도가 나온다.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
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
이다 하고”.
열두 명으로 구성된 사도조직에 결원이 생겼다.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위해
5) 마태복음의 ‘율법’에 대해서는 양용의, “마태복음과 토라”, 「Canon&Culture」
9 (2011), 37-79쪽을 참고하라.
6)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에 대해서는 박형대, “설교를 위한 신약 내러티브
본문 주해: 예루살렘으로 가
는 길에서(눅 9:51-13:21)”, 「헤르메네이아 투데이」51 (2011), 137-155쪽을 참고하라.
사도조직 재정비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가 불쌍하게 죽었으니
사도로 불리도록 해주자”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의 직분
을 타인이 취해야 한다는 말씀(1:20; 시 109:8 인용)에 기초하여 “우리와 함께 다
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
게 하여야 하리라”(행 1:22)라고 주장한다. 인간적인 정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말씀에 기초하여 원칙대로 처리한다. 사도조직 재정비를 위해 기도할 때 제자들이
부른 하나님은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이다. 가룟 유다의 마음도 아시고,
유다 대신 사도 직무를 수행할 자로 추천된 바사바와 맛디아의 마음도 아시는 분으
로서, 누구를 선택하셨는지 보여 달라 한다. 한 사람이 선택되면 다른 한 사람은 선
택될 수 없다. 선택된 사람까지 포함해서 ‘열둘’이 되는 것이다. 말씀의 성취적용을
기대하는 그들의 기도에서 하나님 ‘공의’ 실현 기대를 발견하게 된다.
다음으로, 4장 23-31절에 나오는 제자들의 합심기도는 교회에 박해가 시작
된 다음에 드려진 기도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하루 동안 옥에 갇혔다가(4:3) 공회
에서 위협을 받고(4:21) 돌아왔다. 박해와 위협에 대한 그들의 간구는 “주여 이제
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 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
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
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4:29-30)였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4:27), 대
제사장 문중과 관리와 장로와 서기관(4:5-6)에 대한 심판 요구가 아니었다. 하나
님의 거룩하심이 그 땅 예루살렘에 이뤄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말씀 선포와, 기사
와 표적을 통한 회복[치유]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담대함’이었다.
미움에 기초한 원수 갚음이 아니었다. 하나님 의(義)의 선포, 사랑에 기초한 회복
사역이었다. 그래서 ‘담대함’이 필요했다.
이 때 그들이 부른 하나님은 “대주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신 분이었다
(4:24-25). ‘대주재’는 “하나님의 전적 주권(God's absolute sovereignty)”을 단언
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7)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는 구약성경에서 반복적으로 제시
되는(출 20:11; 왕하 19:15; 느 9:6; 시 146:6; 사 37:16)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기술이다. 출애굽기 20장 11절에서는 십계명 중 제4계명인 안식일 규례와 관련하
여 나타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쉬시고 그 날을 복되게 하여 거룩하
게 하셨기에,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도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한다
(20:8-11). 여기에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거룩케 하심과 거룩함에의 요구를
읽을 수 있다.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무언가를 거룩하게 만드시고, 특별히 자기
백성에게는 거룩함을 지켜나가도록 명령하신다. 열왕기하 19장 15절과 이사야 37
장 16절은 동일한 사건에 대한 말씀으로, 앗수르 왕 산헤립의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 놓고 기도하는 히스기야 왕의 기도부분이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간구
7) Darrell L. Bock, Act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7), 204.
하였다 느헤미야 . 9장 6절은 예루살렘 성벽건축이 끝난 후 학사 에스라의 율법책
낭독을 듣고 회개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의 기도부분이다. 출애굽기 20장 11절은 언
약서의 핵심이 되는 십계명과, 다른 세 곳은 그 언약에 근거한 기도와 연관된다. 특
별히 시편 146편 6절에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정의
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와 연결된다. 이 점에서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공의’를 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신 분에
서는 종을 통해 말씀하시고 메시야를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엿볼 수 있
다. ‘제왕시’ 혹은 ‘등극시’로 불리는 시편 2편 중 사도행전 4장 25-26절에 인용된
내용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과 자신이 기름 부은 메시야에 대해 열방이 분노하고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며 세상의 군왕들이 싸우려고 나서고 관리들이 함께 모여
대적하는 것을 용납하는 분이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용납하심이 없다면 엘리
후의 말처럼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욥 34:14-15). 예수님은 공생애 동
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도 가르침을 베푸시고 회개의 기회를 주셨고(예. 눅
7:36-50),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본질을 알면서도 참으셨으며(예. 22:21-23,
31-34),8) 대제사장과 빌라도에게도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셨다(22:66-23:3).
정리하면, 사도행전 4장 24-25절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세 가지 표현을
‘온전한 주권을 가지고 거룩하게 하시고 거룩할 것을 명하시며 언약에 근거하여 공
평과 정의를 행하시는 하나님, 온전한 주권을 가지시고 공의를 행하면서도 종을 통
해 성령으로 말씀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이 온전히 이뤄지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으로 종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도들과 그와 함께한 제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하
심과 공의와 사랑에 기초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기도는 순교할 때 스데반이 한 기도이다. “그들이 돌로 스데
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
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7:59-60). 여기서 스데반은 ‘주 예수’께 기도한다. 그 분은 “하나님 우편에
서신” 인자이다(7:55).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 곧 하나님의
‘거룩함’을 눈으로 본 스데반은 ‘공평’한 죄 용서가 아니라 ‘사랑’의 죄 용서를 한다.
이는 역대하 24장 20-22절에 기록된 스가랴[누가복음 11장 51절의 ‘사가랴’]와
비교되는 점이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선을 악으로 갚는 요아스로 인해 죽으
면서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감찰’과 ‘신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보다’(har)와 ‘구하다/조사하다’(vrd)이다. 두 번째 단어가 칠
십인역에는 ‘판단하다’(kri,nw)로 번역되었다. 스가랴는 ‘공평한 판단’을 구하였다. 하
지만 스데반은 ‘사랑의 용서’를 구한다.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7:60).
8) 이에 대해서는 박형대, “성찬 설교를 위한 본문 주해”,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48 (2009), 115-118쪽을참고하라.
여기서 ‘돌리지’에 해당하는 단어는 ‘세우다/부과하다’(i[sthmi)이다.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죽이는 행위로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지만 그 벌을 부과하지 말 것을 기도한
것이다. 지고(至高)의 거룩함을 맛보았기에 공평을 넘어서는 죄 용서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사도행전에 소개된 마지막 기도문은 바울 일행의 기도이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21:13-14). 아마도,
제자들의 네 가지 기도 중 주기도문과 가장 유사한 형태의 기도가 여기에 소개된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tou/ kuri,ou to. qe,lhma gine,sqw)”일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는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에게도 결박과 환란이 예상된다. 바
울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20:22),9) 예루살렘에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행들은 마치 베드로가 예수께 그러했던 것처럼(마 16:22),10) 바울
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뜻을 굽히지 않는 바울을 보며 그들은 주께서 가르
쳐주신 기도를 드린 것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바울이 죽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
도(“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 22:42)를 연상케
한다. 이렇게 기도하는 그들에게서 공의와 사랑을 넘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실현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복음에 헌신된 사랑하는 지도자의 죽음까지라도 받아
들이겠다는 그들에게서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거룩함을 발견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사도행전에 소개된 네 기도 속에서 뭔가 변화를 감지하
게 된다. ‘공의’가 중요했던 맛디아 선출기도(1:24-25)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
의와 사랑이 실현되기를 원했던 기도(4:23-31)로, 공평한 죄 용서가 아니라 사랑
의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7:60)로, 하나님의 거룩함이 죽음을 통해서라도 이뤄지
기를 바라는 기도(21:14)로 발전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시된 바울 일행의
기도가 마태복음 6장 10절(“[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
루어지이다”)에는 있지만 누가복음 11장 2절과 3절 사이에는 없는 것을 생각할
때,11) 누가복음에 소개된 주기도문은 누가복음 22장 42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겟세
9)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박형대, “마지막 때를 사는 교회”, 「헤르메네이아
투데이」41 (2007), 119-120쪽을 보라.
10) 누가복음에는 베드로의 예루살렘 행 반대(“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16:22)가 소개되지 않는다. 아마도, 마태복음에는 하나님 공의의
실현이 중요하게 다뤄지기에 베드로의 반대가 소개되고, 누가복음의 강조는 하나님 사랑
실천에 있기에 베드로의 반대가 소개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11) 물론, 고대사본 중 시내산 사본 외에도 중요한 사본과 역본에 ‘하나님 뜻의 성취’에
대한 부분이 누가복음에도 나타나지만, 파피루스 75번과 바티칸 사본과 같이 중요한
사본과 불가타 등 여러 역본 전통에 이 부분이나타나지 않기에, 메츠거(브루스 M.
메츠거, 『신약 그리스어 본문 주석』, 제2판, 장동수 역 [서울: 대한성서공회 성경원문연구소,
2005], 127)가 지적하듯 “여러 사본들과 같은 다양한 증거 사본들에서 그것이 빠진 것
을 설명하는 합당한 논리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뜻의 성취’에 대한 부분이
누가복음 주기도문에마네 기도 및 사도행전 21장 14절에 소개된 바울 일행의 기도와
함께 완성되는 게아닌가 싶다.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뤄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 뭘의미하는지 분명해진다.
공의롭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구속사 가운데에서 성취되는 것이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하고 제자들이 많은 환란을 당해야 한다는 것(행 14:22)을 의미한다.
3. 바울서신의 기도문에서
이제, 사도행전에 소개된 제자들의 네 기도문 중 마지막과 연관되는 바울의
기도에 하나님이 어떻게 불리는지, 어떤 기도가 드려졌는지 살펴보자.
우선,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 약 55/56년경에 마게도냐에서 기록된 고린도
후서와, 57년경에 아가야 특히 고린도에서 기록되었다고 여겨지는 로마서에 바울
자신에 대한 기도가 등장한다. 고린도후서의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한(12:8) 기도는 “바울의 ‘약함’이 자랑거리이자 기쁨의 이유
가 될 뿐만 아니라,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을 보여주는 증
거”로 소개되었다.12) 바울은 자신의 연약한 상태를 벗어나고자 세 번이나 주께 간
구하였다. 그런데, 연약함으로부터 회복되는 것이 주님의 뜻은 아니었다. 사실 말씀
에 순종하는 바울이기에 말씀(레 26장; 신 28장 등)에 근거하여 건강을 간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주께서 원하신 것은 그 이상이었다.
이러한 점을 깨달은 바울이 로마서를 기술할 당시에 드리던 기도가 무엇인
가? “너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9:3)이다. “나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헤렘되기를 기
도한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 기도에서 우리는 바울 헌신의 정도를 느낄 수 있다.13)
바울은 … 자신을 그리스도에게서, 다시 말해 “새 언약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무리로부터” 자발적 헤렘을 시킴으로써 하나님께 구별된 자가 되고자
기도한다. 비록 이러한 헌신의 결과가 죽음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겠지만(레 27:29)
골육 친척을 위해 헌신의 기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거나(14:19, teqnhke,nai), 죽을 뻔한 경우(21:32)가 있
었다. 더불어 그의 서신 곳곳에서 바울의 사역이 죽음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에서 행해졌음을 읽을 수 있다(예. 고후 4:9-12; 6:9; 11:23). 바울의 순교를 생각할
때, 로마서 9:3의 바울의 기도는 긍정적으로 응답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온전한
헌신을 구하며 이에 부합한 삶을 산 바울이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롬 8:18)과
없는 것이 원문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12) 고린도후서 11-13장에 대해서는 박형대, “개인 고난에 관한 신약 본문 주해”,
「헤르메네이아 투데이」53(2012), 98-99쪽을 참고하라.
13) 로마서 9장 3절의 바울의 기도에 사용된 ‘아나쎄마’(avna,qema)에 대해서는
박형대, “바울서신의 avna,qema”, 「신약연구」6.2 (2007), 336-340쪽을 참고하라.
‘의의 면류관’(딤후 4:8)을 받는 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할 것이다.14)
바울 자신과 관계된 두 기도에서 우리는 기도내용의 변화를 발견하게 된다.
앞선 기도가 그의 연약함을 벗고자 하는, 어떤 면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기도인 반
면, 로마서 9장 3절의 기도는 “내가 남을 위해 약해지겠다.”라는, “생명을 드리겠
다.”라는 기도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바울의 이런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본문이
있다. 사도행전 26장 29절이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
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
나이다”. 사람들 앞에서 한 말이지만 바울이 기도하기를 원하는 바가15) 무엇인가?
자신을 재판하고 판단하고자 모인 사람들에 대한 축복이다. 스데반이 공평을 넘어
서는 용서를 한 것처럼, 바울도 일면 분에 넘치는 축복을 하고 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로마에 간 바울이 옥중서신 중 골로새 교회에 보낸 서신
에서 ‘전도’와 ‘방문’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또한 우
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
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골 4:3).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가갈 수 있기
를 바라노라”(몬 22). 감옥에 있지만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 던 ”
(행 28:31) 바울이 원하던 것은 자신과 동료들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군인이든, 죄인이든 가리지 않고 전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복음을 전했
던 오네시모를 위해 빌레몬에게 쓴 빌레몬서에는, 오네시모와 관계된 사안을 위해,
바울의 골로새 방문을 원하는 골로새 성도들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원한다고까지 말
한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삼 년간 사역할 때도 에바브로에게 맡기고
가지 않았던 교회이다(골 1:7). 그리고 로마감옥에서 풀려난 후 바울이 골로새가
있는 아시아로 향할 경우, 본래 계획했던 서바나 방문(롬 15:23)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목회서신을 통해서 볼 때 바울은 로마에서 풀려난 후 그레데
(딛 1:5)와 니고볼리(3:12)를 거쳐 아시아의 에베소(딤전 1:3)로 간 것 같다. 아마
도 이 때 바울이 골로새교회를 방문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6)
바울 자신을 위한 기도를 정리해보면, 연약함으로부터의 회복을 위한 간구에
서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라도 드리는 간구로 발전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아그립바 법정에서 한 그의 축복과 죄인이었던 오네시모를 위한
그의 배려를 생각할 때, 성육신하셔서 약속의 땅에서 사역하시되, 하나님의 의가 이
루어지고 거룩하심이 실현되도록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한편, 바울이 교회를 위해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도 교회의 성숙정도에 따라
14) 박형대, “바울서신의 avna,qema”, 339-340.
15) 여기에는 ‘기도하다’를 의미하는 동사(eu;comai)의 희구법 부정과거형이 쓰였다.
16) 이후에 바울은 드로아(딤후 4:13)를 거쳐 마게도냐(딤전 1:3)로 갔을 것이다.
기도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도내용이 다양하므로 하나님에 대한 호
칭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우선, 가장 짧게 사역했다고 볼 수 있는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낸 두 서신을 보
면, 기도문에서 하나님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살전 3:11), “우리 하나님”(살후
1:11),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2:16)로 부른다. 여기에 부각되는 표현은 ‘우리’, ‘아버지’, ‘사랑’, ‘위로’,
‘소망’, ‘은혜’이다. ‘공의’보다는 ‘사랑’의 하나님이 강조된다. 기도 내용을 봐도 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
시오며 또 …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
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
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1-13).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2:16-17).17) 아직 어린 교회이기 때
문에 기도문에 ‘헌신’보다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강조되어있다.
하지만 최소한 일 년 반 이상 사역했던 고린도교회에 대한 기도에는 ‘우리’,
‘아버지’ 등의 표현 없이 “하나님께서”(고후 13:7) 이루시기를 원하는 기도를 드린
다. 내용에도 그들의 행함이 첨부된다.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13:7). 이 구절을 직역하면 “너희가 악한 것을 하나도 행하지 않기를 하
나님께 기도한다.”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악한 행위에서 벗어나기를 위해 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온전함’을 위한 기도가 이어진다. “또 이것을 위하여 구
하노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13:9). 신약성경에서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 단어인 ‘카트아르티시스’(kata,rtisij ‘성숙’, ‘완벽해지는 과정’)에, 은혜와 은사
가넘치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기도내용이 압축되어있다.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가 가장 오래 동안 사역했던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
할 때 부른 하나님을 살펴보자. 먼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엡 1:17)이다.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 혹은 ‘우리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 부른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와 사랑을 온전히
실현하신 ‘예수님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부른다. 이어지는 “영광의 아버지”의 ‘영
광’도 어순과 관사 사용을 고려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 주어진 영광으로 볼 수 있
다.18) 십자가 속에 감춰진 영광이 참 영광임을 드러내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
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숨겨진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하기에 “마음의 눈을 밝”혀 달
라는 기도가 이어진다(1:18).
17)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주’께 기도하는 내용이므로 생략하기는 했으나,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16)의 기도도 주께서이루실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18) 이런 개념이 보다 분명히 표현된 구절로 베드로전서 1장 21절의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를
생각할 수 있다.
또한 하“ 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3:14)로 하나님을
부른다. ‘우리’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로서의 하
나님이다. 온 인류를 가족으로, 복 받을 대상으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공유할 자로
보는 시각에서 나온 호칭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
이”까지 깨달아 ‘충만’하게 되기를 원하는 기도가 이어지는 것이다(3:19).
이와 같이, 바울은 교회를 위해서도 교회의 수준과 형편에 따라 기도 내용을
달리한다. 교회가 오래되고 은혜를 더 많이 받고 더 중요한 위치에 있을수록, 하나
님의 거룩하심과 공의와 사랑이 점점 더 온전히 이해되고 실천되기를 기도한다. 이
점에서 바울이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하나님을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
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으로 기술하면서(딤전 2:4) “모든 사람을 위
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도록 권면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19)
4. 글은 맺으며
이상에서 우리는 신약성경의 여러 기도문을 통해, 특히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
님을 부르는 호칭을 통해 기도하는 제자들이 염두에 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살펴
보았다. 우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비교․분석하여 둘 사이의
차이점을 하나님 거룩하심 실현을 위한 중점방안 견지에서 찾아보았다. 마태복음에
는 공의/공평이, 누가복음에는 사랑/나눔이 부각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사
도행전에 나오는 네 개의 기도문을 통해, 제자들의 기도가 단순한 공의실현 측면에
서, 생명을 바쳐서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이뤄지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진일보되
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마지막으로, 바울서신에 있는 기도문을 통해, 바울이 자신을
위해 드리는 기도뿐 아니라 교회를 위한 기도에도, 보다 덜 헌신된 형태와 보다 더
헌신된 형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 볼 때, 하나님의 윤리적 속성으로 다뤄지는 ‘거룩하심’, ‘공의’, ‘사랑’은
종합적으로 다뤄져야 할 개념이다. 상반되어 보이는 이 개념들은 함께 하나님의 속
성과 그분의 사역을 표현한다. 또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정체성과 지향 점을 표
현하는 데 꼭 필요한 개념들이다. 헌신정도가 깊어진 성도들에게 세 개념은 보다
강력하게 결속된 하나의 속성으로 드러나게 된다. 세 속성이 한 분 하나님의 속성
으로 이해될 때, 하나님을 좀 더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지지할 만한 기도문이 있다. 바로,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
수님의 기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여”(17:1, 5, 21, 24), “거룩하신 아버
지여”(17:11), “의로우신 아버지여”(17:25)라고 부르며 기도하신다. 예수께서 하나
님을 “의로우신 아버지여”라고 부르신 것은 매우 특별하다. 하나님을 이렇게 부른
용례는 여기 외에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20)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19) 여기서 ‘간구’는 긴급한 기도를, ‘기도’는 결단의 기도를, ‘도고’는 관계를 위한 기도를,
‘감사’는 감사와 축복의 기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20) 하나님을 “거룩하신 아버지여”라고 부른 용례는 『디다케』10장 2절에서 발견된다.
(17:14, 16) 제자들이 “보전”되고(17:11) “진리로 거룩하게”(17:17)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신다.21) 이를 위해 그들은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어야 한다
(17:23). 여기서의 ‘하나 됨’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본받은 것이다(17:21). 이 기
도는 “나[예수]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
게 하려 함이니이다”로(17:26) 끝난다. 예수님을 통해, 제자들이 거룩하고 의로우신
성부와 사랑 안에서 결속되기를 구하는 기도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간구가 우리 안
에서도 현실화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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