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역사신학

예루살렘의 멸망

예림의집 2012. 9. 10. 08:29

예루살렘의 멸망

 

  그러나 양자의 미래를 결정적으로 양분했던 장소는 로마가 아니라, 예루살렘이었다. 바울이 이교도권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중에도, 예루살렘의 교회는 계속하여 유대교 전통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들은 계속 박해의 위협 가운데 살고 있었다. AD. 41년경, 예수님의 오랜 가까운 제자였던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가, 41년부터 44년까지 팔레스타인 왕이었던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명에 의해 살해되었다. "사랑받던 제자" 야고보의 동생 요한은 아마 이때 예루살렘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야고보의 죽음 직후 베드로도 체포 당했으나, 그는 도피하여 널리 선교 여행을 떠났다. 그는 소 아시아의 안디옥, 고린도 등 여러 도시들을 방문하였다. 그는 생애의 말기에 로마를 방문하여, 바울과 함께 네로이 박해에 말려 순교하였다.

  처음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하던 인물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였다. 그는 경건하고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으로서, 추종자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으나, AD. 62년 유대 대제사장의 명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그의 죽음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지도자를 잃고 상심에 잠기게 되었다.

 

한편 유대인들과 압제자 로마인들 사이의 긴장은 날로 더해 갔다. 유대인의 성전 건축이 AD. 64년에 끝남에 따라, 수천 명이 일자리를 읽게 되어, 사회적 불만도 고조되었다. 드디어 AD. 66년 유대인들은 매일 드리는 황제에의 제사를 거부하는 것을 시작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한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이에 따른 비극적이고, 무자비한 전란은 그 이전의 어떤 전쟁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내게 하였다. 유대인들은 4년 동안이나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잘 견뎌내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무력을 끝내 견뎌낼 수는 없었다. AD. 70년 티투스가 이끌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전을 약탈하고 방화했으며, 노획물을 로마로 가져갔다. 거룩한 도시가 완전히 진멸되었다. 그후 계속된 보복전을 통해 남아있던 팔레스타인의 모든 회당들도 완전히 소실되었다."

  발란의 시초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을 떠나라는 계시를 받게 되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도주를 반역행위로 간주했으며, 이에 따라 유대인들 세계 속에서의 교회의 입장이 결정되었다. 몇 년 후에는 유대인 기도교 신자들의 회당 출입을 금지시킴으로써, 양자 간의 분열은 완결되었다. 이제 자기의 정통적 종교에 충실하고자 하는 유대인은 더이상 기독교 신자는 될 수 없었다. 옛 포도주 부대가 더 이상 손 볼 수 없이 찢어져 버린 것이다.

  실질적으로 볼 때,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이 사도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 초대 사도들 대부분은 사망했으며, 교회의 지도권은 새로운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들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통해 새롭고 힘찬 생명이 지중해 세계로 넘쳐 흘러나게 되었다. 그들에 대항하는 세력들보다 더욱 힘있고 강인하여서, 사도들의 메시지는 박해와 저항을 이겨내고, 수세시 후에는 로마 제국을 압도하는 신앙으로 새로이 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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