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
아무도-물론 예수님은 예외로 하고- 사울만큼 기독교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없다(기독교인들은 헬라어 사용인구에게 더 익숙했던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신앙이 강한 자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이러한 인물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스데반이 돌들에 맞아 넘어져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을 때, 사울은 폭도들의 지휘자 격으로 한편에 서서 이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과영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를 메시야라고 좇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메시야란 의미 자체가 특별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사울은 다마스쿠스 시 밖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에야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밝은 빛에 눈이 멀 듯 하여, 땅에 넘어졌을 때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들었다. "사울, 사울, 너는 왜 나를 박해하고 있느냐?" 이때 비로소 그는 스데반의 주장을 갑자기 이해하게 되어 신자가 되었다. 그는 후에 설명한다. 율법은 이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 저주를 발한다. 따라서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자는 저주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허락하여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가 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대속하셨다(갈 3:10-14)."
그렇다면 스데반이 옳은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일시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져,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 즉 좋은 소식을 포용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다른 길이 없음을 알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유대교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처방이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이러한 확신을 통해, 기독교인의 박해자로부터 박해 받는 기독교인의 하나로 변화하였다. 그런데 사울이야말로 유대인과 이방인 기독교인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특수한 자질을 갖추고 었었다. 그는 유대, 헬라, 로마의 세 세계에 걸친 인물이었다.
비록 그는 엄격한 유대교 교육을 받고 자라났으며, 예루살렘에서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에게서 교육을 받았지만, 바울은 헬라어를 유창하게 말했으며, 헬라의 사상과 문학에 정통하였다. 이는 곧, 대부분 구약에 기초하고 있었으므로 이방인들을 잘 이해할 수 없었던 예수님의 교리와 교훈들을, 이교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도로 표현할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내심을 받았다"는 의미의 사도라는 칭호가 바울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바울은 소 아시아(오늘날의 터키)와 그리스를 통해 몇 차례의 전도 여행을 다니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하고, 이방인들을 위한 교회를 개철하였다. 바울을 통해 개종한 이들은 가지 각색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좋은 집안 출신이었으나, 대부분은 하류층의 이방인 출신이었다. 바울은 그의 편지들 가운데 하나에서, 이들의 과거에 관해 묘사하고 있는데, 이들은 음란한 자들이었고, 우상 숭배자들이었고, 동성애 창녀들이요, 도둑들이요, 탐욕자들이요, 술 취하는 자요, 사기꾼들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씻기웠고, 거룩하게 되었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전 5:11)."
이러한 교회들 속에 기독교의 윤리적 원칙들을 가장 잘 주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겟는가? 바로 이것이 1세기 유대인들가 이방인 신자들 사이에 계속되었던 갈등의 핵심의 문제였다. 전통적 유대교에 젖어 있던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 데에 추가하여, 유대 율법을 다 지키지 않으면, 그들의 신앙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는 불가능한 요구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경험에 의하면 또 다른 길이 있었다. 만약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이로울 수 있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에 의한 의의 촉구는 실패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이간은 오직 인간이 받아야 할 자격이 없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자비에 의해서만 의롭다하심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은혜이며, 이 은혜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생야와 죽음과 부화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이방인들의 교회 속에 불가피하게 발생할 윤리으 ㅣ타락에 관해 우려하였다. 만약 사람들에에 오직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면, 사람들은 일단 구원을 얻은 후에는 어떻게 살든지 상광없다고 생각하지 않겟는가고 주장하엿다.
그러나 바울은 반대로 만약 이들이 진정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면, 이들은 그리스도의 길과 그리스도의 마음도 받아드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좇는 길을 항상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울과 그에 대항했던 유대인들 사이의 차이는 사도들의 시대와 함께 자나가버린 것이 아니었다. 우리들 자신의 시대에까지도 이러한 대립이 계속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보다 율법적인 자들은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이 경솔하고 비현실적이라 평가한다. 반면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은 율법적 집잔이 하나님의 은혜의 의미를 무효화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라나 바울의 전도 여행의 결과 점점 더 많은 살마들이 바울의 확신을 받아 들이게 되었다. 그는 제 일차 여행 때, 키프로스 섬과 소 아시아 중앙 갈라디아 지방의 많은 도시들을 순방하였다. 제 이차 여행 때는 그가 이전에 세운 교회들을 순방하였다. 그 후엔 소 아시아 서부를 건너드로아로 갔고, 그곳에서 유럽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마게도니아로 가서 난생 처음 유럽 대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마케도니아 북부의 빌립보로부터, 바울은 데살로니가와 베레아로 여행하였다. 그후에는 서양 문명의 발상지였던 아테네를 방문하였다.
예수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바울의 선교는 어렵기는 했지만 불가능한 작업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의 세계가 반 종교적인 세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마식으로 개명된 원래 그리스의 신들을 섬기는 외에도, 각 도시와 촌락마다 또 다른 자기들의 신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의 여행을 통해 가장 중요한 이교도들의 신앙들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일단의 신비 종교라 불리던 집단들이 로마 제국의 여러 지방에 번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매년 봄 다시 태어난다는 신들의 전설을 기초한 각 지방의 신앙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신드의 이름은, 헤라클레스, 디오니시우스, 이시스, 미드라스 등 이었따. 비록 이러한 신앙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자연의 생식 순환 질서였으나, 이들은 또한, 영원 불멸, 생명의 부활, 선과 악 사이의 투쟁 등 상당히 세련된 사상들을 이 가운데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비록 표면적이기는 하였으나, 바울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이방인들에게 전달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었다. 바울은 아테네의 ㄱ린도로 가서 상당한 규모의 기독교 공동체를 조직할 수 있었다. 일년 반 후 그는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귀환한다.
바울은 제 삼차 전도 여행시, 에베소에 교회를 개척하고, 그곳에서 이년 이상을 가르치고 설교하였다. 그가 이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때, 유대 지도자들이 드디어 그를 체포하여 투옥하였다. 그후 일년 간 유대의 로마 행정 수도였던 가이사랴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있다가, 로마 시민의 자격으로 직접 황제에게 항소하였다. 그리하여, 바울은 마침내 제국의 수도 로마를 향하게 되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기간을 재판을 기다리며 보내었다. 계속 설교할 수 있었으므로 아마 더 많은 개종자들을 이곳에서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AD. 64) 후는 더 이상 그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때 쯤엔 이미 전통적 유대교와의 결별이 이미 거의 완료된 상황이었다. 이방인 신자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으며, 유대인들의 식이법들을 알거나 지키지도 않았으며,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일곱째 날의 안식일 대신, 예수님께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난 첫째 날을 예배의 날로 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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