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제1부: 서론

예림의집 2012. 7. 17. 08:15

제1부: 서론

조직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며, 기독교 복음에 대한 자세한 해설이다.

조직신학 서론은 신학의 개념과 방법 등을 살핀 후,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에 관해 논한다.

조직신학 서론의 주요 주제들

1. 신학의 개념, 성격, 필요성
2. 신학의 방법, 분야들, 역사
3. 하나님의 계시
4. 성경의 정경(正經)
5. 성경의 본문(text)
6. 성경의 속성
7. 성경의 영감(靈感)과 무오(無誤)

1. 신학의 개념, 성격, 필요성

신학의 개념

신학(神學)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다. 학(學)이란 "체계적 연구에 의해 얻어진 사실들이나 원리들에 대한 지식" 즉 어떤 주제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하나님과 그의 진리들에 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된다. 이것을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라고 부른다. 신학은 엄격한 의미에서 조직신학을 가리킨다.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진리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인 성경에만 명확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라고 좀더 자세히 서술될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신학을 단순히 신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신앙이나 종교 경험의 학으로 정의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적 개념을 배격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객관적 성경 말씀에서만 찾는 것이 바른 태도이며 역사적 개신교회의 입장이다. 촬스 핫지는 말하기를, "신학의 목적은 성경의 사실들을 체계화하고 그 사실들이 내포하는 원리들이나 일반 진리들을 확증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신학은 교의학(敎義學, dogmatics)이라고도 불리운다. 교의(敎義)라는 말은 니케야 신조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같이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교회의 공식적 진술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의란 교리(敎理, doctrine)와 구별된다. 교리란 단순히 하나님의 진리를 말로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 바른 교리는 진리와 같다. 그러나 교의는 교리보다 공식적이고 권위적인 진술이다. 그러므로 교의학은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교회의 공식적 진술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된다.

천주교회는 교의가 교회의 회의나 전통에서 나온다고 가르치고,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이 인간의 주관적 신앙이나 종교적 경험에서 나온다고 주장하지만, 역사적 개신교회는 교의가 오직 성경에서 나와야 한다고 확신한다. 반틸은 바르게 말하기를, "교회의 신조들은 그 내용에 관한 한 성경 진리의 조직적 진술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와 같이, 교의는 성경 진리의 체계적 진술이므로, 교의학은 내용적으로 신학 혹은 조직신학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바빙크는 교의학을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학문적 체계"로 정의했고, 박형룡 박사는 "바른 교의신학은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는 바의 질서 있는 논술을 제출하기를 추구한다. . . . 교의학은, 즉, 성경 진리의 조직적 진술이다"라고 말했다. 즉 신학, 조직신학, 교의학은 다 동의어로 사용된다.

교회 역사상, 기독교 진리 체계를 위한 여러 용어들이 있었으나. 12세기에 처음으로 '신학(데올로기아 theologia)'이라는 말이 이런 뜻으로 사용되었다. 종교개혁 후 신학이라는 말이 루터파와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서 점차 많이 사용되었다. 17세기부터 '교의신학'이라는 말도 사용되었으나 오늘날 교의신학 혹은 교의학보다 조직신학이라는 말이 더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또 오늘날 많이 말해지는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은 그 연구 방법에 있어서 조직신학과 달랐다. 조직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을 주제별로, 논리적으로 정돈하려고 하는 반면, 성경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을 역사적으로, 연대순으로 정돈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둘은 다 성경의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조직적' 신학이었고, 또 만일 성경만을 자료로 삼고 성경에 충실하려고 한다면 '성경적' 신학이라고 불리울 것이다. 그러나 성경신학은 대체로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교의학과 대립하고 그것을 비평, 수정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오늘날 성경신학들은 때때로 성경의 중심 주제도 파악하지 못한 채 초보적 단계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성경의 중심 주제는, 조직신학이 정리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 조직신학은 구원이라는 주제 아래 왜 구원이 필요했는지,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지는지, 구원받은 자들의 삶과 소망은 무엇인지 등을 논하였다. 성경은 구주 예수에 대해 증거한다(요 5:39).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썼다(딤후 3:15). 성경 내용의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이다.

오늘날, 신학이라는 말은 넓은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학의 다섯 분야라고 말하는 구약신학, 신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등에 신학이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또한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정치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등 소위 상황신학의 개념들이 유행하고 있고 심지어 통일신학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신학'은 어떤 특정 주제 혹은 분야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이라는 말의 정확한 용법은 아니다.


신학의 성격

신학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할 때, 우리는 신학의 몇 가지 성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신학은 성경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들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고, 신학은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성경에서 그리고 성경에서만 나와야 한다. 성경 밖의 자료들은 단지 성경의 진리들을 확증하는 보조물에 불과하다. 신학은 성경적이어야 한다. 성경적인 신학만이 참신학이다. 성경을 떠나서 하나님과 그의 뜻을 논하는 모든 개념들과 사상들은 바른 신학이 될 수 없고 오류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을 불신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그 시작부터가 잘못이요 따라서 그 결론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결코 기독교 신학이 될 수 없다. 성경이 파괴되는 곳에서 신학을 논할 수 없고, 성경 없이 논의되는 신학은 기독교 신학이 될 수 없다. 뿐만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을 성경에 기초시키는 대신 신학의 문화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러나 교회가 진리를 표현함에 있어서 혹시 어떤 시대의 철학적 용어들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러한 용어들은 표현 형식에 불과하고 그 내용에 관한 것은 아니다. 신학은 순전히 성경의 계시 진리들을 조직화하는 것이어야 하며, 어느 시대, 어느 문화의 사상을 혼합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어느 신학이든지 비성경적 사상이 섞여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비평하고 배제하여 순수한 성경적 신학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신학은 교회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비록 처음에 개인이 깨닫고 믿고 고백하기 시작할지라도,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구약의 이스라엘이든지 신약 교회이든지 간에-공동적으로 믿고 고백하는 진리가 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선언하고 체계적으로 진술할 권세를 주께로부터 받았다.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부른다(딤전 3:15). 이 교훈의 권세는 단지 어느 시대까지의 교회나 교회 회의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와 교회 회의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어떤 개인의 사사로운 견해에 그쳐서는 안되며 교회의 공동적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신학의 교회적 성격은 그것의 공동적 신앙고백의 측면에서 뿐 아니라, 역사적, 전통적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신학적 활동은 모든 시대의 교회들이 많은 힘을 기울여 왔다. 오늘 우리들이 가진 신앙 고백들은 전시대의 신앙 선조들의 기도와 수고의 결실이며, 그 배후에 성령의 섭리적 지도와 후원이 있었음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역사적 신조들과 신앙 고백들을 중시해야 한다. 이와 같이, 신학은 교회적 성격을 가지며, 따라서 바른 신학의 정립과 성실한 전달은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이다. 특히 신학들이 난립하며 성경적 신학이 없는 것과 같이 보이는 오늘날 시대에, 성경적 믿음과 확신이 없고 신실함과 충성심이 없어 보이는 이 시대에, 바른 신학의 정립과 전달은 더욱 절실한 과제이다.

셋째로, 신학은 권위적이다.

신학이 성경적이라면, 그것은 또한 권위적이다. 기독교회는 성경을 신적 권위를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른다. 성경의 신적 권위성은 성경의 모든 진리들의 신적 권위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한 신학도 당연히 신적 권위를 가진다. 만일 신학이 성경의 진리들을 바르고 충실하게 제시하고 반영한다면, 그 신학은 성경과 같이 신적 권위를 가질 것이다. 성경이 신적 권위를 가지듯이, 성경적 신학은 신적 권위를 가질 것이다.
물론 우리는 오직 성경만이 최종적 권위를 가짐을 믿는다. 우리는 신학이 성경과 달리 오류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며, 또한 오류에 떨어진 부분들은 언제든지 성경에 의해 교정될 수 있고 교정되어야 함을 믿는다. 오직 성경만 교회의 오류 없는 최종적 권위이다. 그러나 신학이 성경에 충실하고 그 진리를 바르게 제시하는 한, 교회는 성경을 신적 권위의 말씀으로 존중하듯이, 신학도 신적 권위의 진술들로 존중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신학은 불변적이다.

물론 신학의 불변성은 신학의 기본적 내용에 관한 것이고, 그 정돈 방식에 관한 것은 아니다. 신학의 정돈 방식은 변할 수 있으며 역사상 실제로 변해 왔다. 신학적 방식의 이러한 변화는 일종의 신학적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주후 2세기는 기독교 변증학의 시대이었고, 3세기와 4세기는 신론, 5세기는 인간론과 기독론, 그리고 중세 시대에 이어 종교개혁기에는 구원론과 교회론, 그리고 오늘날에는 종말론에 대한 신학적 토론이 많다. 이런 과정들을 통하여 신학의 정돈 방식은 다듬어져 왔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보다 촬스 핫지의 조직신학은 더 정리되어 있고, 핫지의 책보다 루이스 벌코프의 것은 더 정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학의 기본적 내용에 관한 한, 그것이 신적 권위를 가진 한, 그것은 또한 불변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성경의 내용이 변할 수 없듯이, 성경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인 신학의 기본 내용은 변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20세기 말에도 초대 교회의 사도 신경이나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믿고 고백하며, 17세기의 정통적 신앙고백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 소요리문답이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믿고 고백하며 사랑한다. 또한 오늘날에도 우리는 칼빈과 핫지 등의 정통적 개혁 신학자들의 글들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유행하는 바와 같이, 신학이 시대마다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적 개념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신학의 근본적 내용의 불변성을 부정하는 것은 성경 진리들의 불변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으므로, 그것은 실로 이단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불변적임과 같이, 성경적 신학은 그 기본 내용에 있어서 불변적이어야 한다. 시대는 변해도, 신앙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진리의 정돈 방식 즉 신학의 제시 방식은 변할 수 있을지라도, 그 근본 내용들은 결코 변할 수 없다.


신학의 필요성
신학은 왜 필요한가?

첫째로, 사람에게 있는 체계적 지식에 대한 기본적 욕구 때문에 신학이 필요하다.

지식의 체계화는 사람의 기본적 욕구이며, 진리의 지식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들의 단편들뿐 아니라 그 전체를 알기 원한다. 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을 추구하므로, 그것은 모든 진지한 성도들의 기본적 욕구에 충족이 된다. 반틸은 "성경의 내용을 연구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의무이다"라고 말했다.

둘째로, 하나님의 진리의 효과적 전달을 위해 신학은 필요하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전도할 때나 처음 믿는 자들을 가르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들은 논리정연하다. 그것들은 앞뒤가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혼동의 하나님이 아니고 질서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논리 정연한 제시는 설교나 강의를 더욱 힘 있고 효과적이게 만들 것이나, 혼란한 개념이나 모순된 논리는 그것의 능력을 감소시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비록 단순히 사람의 논리로만 활동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논리를 거스려 활동하신다고 상상해서도 안 된다. 건전한 설교와 교훈은 반드시 건전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훌륭한 설교가 촬스 스펄젼은 말하기를, "대 신학자들이 있기 전에는 대 전도자들이 결코 있지 못할 것입니다. . . . 천박한 학생들 중에서 영혼을 움직이는 대 전도자들이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셋째로, 교회의 사상적 일체성을 위해 신학은 필요하다.

교회의 일체성은 유형적이기 전에 먼저 영적이며 교리적이다. 교회는 공통적 기독교 신앙 위에서 한 몸을 이룬다. 정통 신앙을 가진 자와 이단자가 하나를 이룰 수는 없다. 사도 바울은 "다 같은 말을 하라"고 권면하였고(고전 1:10), 또 "믿음은 하나이요"라고 말했다(엡 4:5). '같은 믿음'(딛 1:4, 코이네 피스티스 common faith)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연합의 기초이다.
비록 신학들의 불완전함과 상호 간의 차이가 교파 형성의 주요 원인이 되었지만, 참된 신학은 교회의 일체성의 방해물이 아니고 오히려 그 매개물이요 접착물이다. 사실, 사상적 일치가 없는 외형적 일치는 공허하며 위선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지한 성경 연구를 통하여 신학적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사도신경,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같은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과, 촬스 핫지, 루이스 벌코프, 박형룡 등 교회의 인정된 조직신학들은 교회의 일체성의 표시요 증거이다.

넷째로, 이단들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신학은 필요하다.

사실, 이 목적은 역사상 신학 정립과 발전에 매우 중요하였다. 이단들은 성경의 일부분을 부정하거나 잘못 해석함으로써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단들이 성경을 완전히 저버리는 경우는 쉽게 식별할 수 있겠지만, 성경을 가지고 잘못 해석하여 강조하거나 적용할 때 그들을 막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체계적인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단들의 교묘한 오류를 분별하고 폭로하고 배격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단들의 도전 앞에서, 교회는 진리들의 부분적 지식이 아닌, 체계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목사들 뿐만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체계적 성경 공부와 교리 공부, 즉 신학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