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조직신학 서론 중간고사 문제 및 답 요약(줄임)

예림의집 2012. 4. 26. 07:04

조직신학 서론 중간고사 문제 및 답 요약

 

 

1. 교리의 필요성에 대해 논하시오.

 

교리란 성경에 계시된 기독교 신앙의 진리 즉, 하나님의 가르침을 를 체계화 한 것으로서, 조직신학이란 성경 있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주제별로 체계화하고 뼈대를 세우는 학문이다.

교리의 필요성에 대하여 현대 신학계에는 두 그룹의 도전을 받고 있다. 그 첫 번째 부류는 자유주의신학자를 포함한 현대 신학자들이다. 그들은 이성을 지나치게 중시함으로 교회의 전통이나 유산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 루이스 벌코프는 그들이 교리를 반대하는 것은 실제로 교리 그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그들의 주장에 맞지 않은 특정 종류의 교리에 대한 반대라고 말한다. 나는 벌코프의 말에 동의한다. 우리는 교회의 오랜 역사를 통해서 산출되어지는 전통 교리를 존중하여야 한다. 기독교는 역사적 기독교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수많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 기독교 교리가 형성되었다. 예를 들어 이신칭의, 삼위일체의 교리, 공의회의 판결문서, 신앙고백서, 교회 공적문서, 믿음의 선진들의 글과 유산이 있다.

다른 한 부류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실천과 체험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이를 교리와 대조적으로만 이해하려는 경건주의, 은사주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좋은 의도를 가졌을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실천과 경건을 교리와 불리 고착화 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A. W. 토저는 그의 저서에서 “교리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교리 없이 믿는 것(신앙함) 자체가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그의 반론의 요지는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으려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교리)를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한다. 그 밖의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위의 두 그룹의 절대화와 무가치화의 태도를 조심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가져야 한다. 교리의 필요성에 대한 로이드존스는 “첫째, 기독교 신앙의 기본 교리를 재발견할 때 결국 부흥이 일어난다. 부흥에 앞서 항상 교리의 재발견이 이루어진다. 둘째, 하나님의 영(성령)은 그 정의상 자신의 진리 위에만 부어질 수 있으며, 그 진리만을 높이실 수 있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교리는 우리의 신앙에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의 신앙을 살찌우며, 계시의 진리성과 권위를 뒷받침해준다. 교리는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동안 많은 노력을 통하여 성령의 조명으로 이룩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리를 공부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와 정립으로 우리의 신앙의 중심을 잡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함으로서 우리의 신앙과 사역의 기준점을 삼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을 나타내시고 우리의 삶의 바른 신앙을 제시하신다. 우리가 성경의 교리들을 바르게 배우고 정립한다면, 그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신 주님의 말씀들이 더욱 더 선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더욱 더 열심히 교리를 공부하고 그 교리의 인도를 받으며 성경을 탐구할 것이다.

 

 

2. 일반계시[자연계시]에 대해 논하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당신의 마음을 계시를 통하여 말씀해 주셨다. 우리는 주님께서 계시해 주신 만큼만 알 수 있다. 그 외의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계시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일반계시특별계시의 이중 계시로 우리에게 말씀 하셨다. 일반계시는 자연적 계시라고도 하며, 창조계시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든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계시해 주신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해 특별계시는 초자연적 계시라고 하며 말씀계시로서 성경을 통한 계시를 말한다.

일반계시에 대한 성경의 증거로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시편 19편1-4절 상 반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를 들 수 있다.

칼빈 또한 일반계시에 대하여 “인간의 마음에 이미 종교의 씨앗이 심어져 있고, 하나님께서 우주의 전 창조 속에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셋째, 매일 계시 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경배하고 찬양하고 교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한 밀턴의 실낙원과 밀레의 만종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일반계시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죄가 가장 큰 원인이다. 죄로 인해서 우리의 눈이 어두워졌고, 우리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죄란 하나님을 향한 반역, 반항, 불신과 적극적인 불순종이다. 이러한 죄의 책임은 바로 우리 인간에게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특별계시가 필요하다. 그러나 죄가 없었어도 특별계시가 필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알기에 일반계시로만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 피조물의 창조, 영적인 세계들은 일반계시로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저주받은 삶을 살아야 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복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만물과 우리는 회복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글에서 자연을 보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엄과 은혜를 발견하며, 엄위하심과 온유하심의 결합됨을 체험하고, 주의 지혜와 순결과 사랑이 그 안에 나타나심을 보았다고 회상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우리에게 자신을 들어내셨는데, 일반계시는 그의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성품과 뜻과 진리를 말한다. 하지만 일반 계시의 우리의 죄로 인한 타격과 자체적인 한계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계시로 성경을 허락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계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나의 죄 됨을 알 수 있고,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을 누림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우리들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바라보고, 엄위하심과 온유하심의 결합을 체험하며, 주님의 지혜와 순결과 사랑을 의지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3.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 논하시오

 

오랫동안 현대 복음주의에서는 한 가지 잘못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율법과 은혜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만 보는 시각이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고 복음(은혜)은 살리는 것이라는 시각이다. 하지만 율법주의가 잘못된 것이지 율법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도 율법 자체는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율법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도, 의로운 삶을 살게도, 영생을 얻는 방편도 되지 못한다. 율법은 오직 정죄할 뿐이고 이러한 일들은 복음만이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통해 오히려 그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어내는 것이다.

로마서 6장 14절에서 말하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은 우리가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믿기 전의 삶과 믿은 후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율법과 아무 상관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는 의롭게 함도, 의로운 삶을 사는 것도 불가능하고 오직 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구속자적 관점에서 은혜의 안과 밖의 삶을 대조시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9장 20-21절이 말하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과 “율법 아래 있다.”라는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20절의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모세 율법의 의식들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고, 21절의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율법을 지킬 의무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할 때 모든 율법이 아니고 의식법을 말하며 율법 안에 있다고 할 때에는 도덕법을 말한다.

구약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구약의 율법이 그리스도 율법 안에 다 들어 있다. 이를 요약되어 있다고도 표현한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구약의 율법에 이미 있었다.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더욱 심화시키고 그 의미와 정신을 강화시킨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케 하기 위해 왔다”라고 선언하셨다.

구약의 율법은 시민법과 의식법 그리고 도덕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민법은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필요했던 것으로 민사법과 재사법이다. 의식법은 제사의식, 정결의식, 할례의식 등이 이에 속하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모형이며 그림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다 성취되었다. 도덕법인데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삶의 윤리적인 기준을 제시해 준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바도덕법이다.

칼빈은 율법의 기능을 다음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는 죄 억제 기능으로서 벌을 받으리라는 공포심을 일으켜 일부 사람들을 억제하는 것으로 불신자들에게 해당 된다. 둘째, 정죄 기능으로 하나님의 의를 밝히고 인간의 죄를 정죄함으로써 은총을 구하도록 하는 것으로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다. 이 또한 불신자들도 해당된다. 마지막 셋째는 선행 촉구 기능으로 신자들을 훈계해서 선행을 촉구하고 신자들의 삶의 지침으로서의 역할이다. 칼빈이 율법의 가장 중요한 용도로 보았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기능이다.

결론적으로 율법은 은혜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의롭게도, 의로운 삶을 살게도 하지 못하고 다만 죄 억제 기능과 정죄(를 통해 그리스도께 이끄는)기능만 할 뿐이다. 반면 은혜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은 신자로서 살아야 할 삶의 기준을 보여주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통해 이 율법을 굳게 세우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기쁨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알아 갈수록, 주님의 말씀의 정직함, 탁월함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송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율법이 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방편이 된다. 노예가 아니라 아들(자녀)로서 율법은 사랑하는 아버지가 주신 것이고, 우리를 살리려고 주신 것이다. 우리의 잘못된 율법의 관점을 전환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율법을 지켜 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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