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조직신학 서론 중간고사 문제 및 답 요약(1차 정리)

예림의집 2012. 4. 23. 17:29

*이것을 토대로 다듭어야 할 것입니다.^^

 

조직신학 서론 중간고사 문제 및 답 요약

 

1. 교리의 필요성에 대해 논하시오.

 

교리(doctrine)는 성경에 계시된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체계화 한 것으로서, 성경 있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주제별로 체계화하고 뼈대를 세우는 학문이다. 그 교리 중 교회 일반에 받아들여진 것, 예를 들어 교회 회의를 통해서 성경적인 건전한 진리라고 승인을 한 것을 교의(dogma)라고 한다. 예를 들어 니케아 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교의를 짧은 신앙고백의 형태로 압축한 것을 신조(creed)라 하는데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나시우스 신경 등이 그 예이다.

교리의 필요성에 대하여 현대 신학계에는 두 그룹의 신학자들의 도전을 받고 있다. 그 첫 번째 부류는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현대 신학자들이다. 교회 무형론자들 이기도한 그들은 계시 의존적이라기보다는 이성을 지나치게 중시함으로 교회의 전통이나 유산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 루이스 벌코프는 이렇게 반문한다. “그들의 오늘날의 교의에 대한 반대조차도 실제로는 교의 그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리라 특정 종류의 교의에 대한 반대이며, 현대 신학자들의 눈에 예뻐 보이지 않는 그런 종류의 교의에 대한 반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교의를 반대하는 것은 교의의 불필요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주장들에 대해 교의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의 오랜 역사를 통해서 산출되어지는 전통 교리를 존중하여야 한다. 기독교는 역사적 기독교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수많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 기독교 교리가 형성되었다(이신칭의, 삼위일체 교리). 공의회의 판결문서, 신앙고백서, 교회 공적문서, 믿음의 선진들의 글과 유산들이 그 좋은 예이다.

다른 한 부류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실천과 체험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이를 교리와 대조적으로만 이해하려는 사람들이다(경건주의, 성령운동주의). 그들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실천과 경건을 교리와 불리 고착화 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A. W. 토저는 그의 저서에서 “교리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교리 없이 믿는 것(신앙함) 자체가 불가능하다”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그의 반론의 요지는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으려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교리)를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한다. 그 밖의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을 살펴볼 때 우리는 절대화와 무가치화의 태도를 조심하여야 한다.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교리의 필요성에 대한 로이드존스의 <기독교 교리와 신앙의 부흥>의 내용을 소개한다. 첫째, 기독교 신앙의 기본 교리를 재발견할 때 결국 부흥이 일어난다. 부흥에 앞서 항상 교리의 재발견이 이루어진다. 둘째, 하나님의 영(성령)은 그 정의상 자신의 진리 위에만 부어질 수 있으며, 그 진리만을 높이실 수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교리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경건주의자들과 같이 우리의 신앙에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의 신앙을 살찌우며, 계시의 진리성과 권위를 뒷받침해준다. 교리는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동안 많은 노력을 통하여 성령의 조명으로 이룩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리를 공부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와 정립으로 우리의 신앙의 중심을 잡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함으로서 우리의 신앙과 사역의 기준점을 삼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을 나타내시고 우리의 삶의 바른 신앙을 제시하신다. 우리가 성경의 교리들을 바르게 배우고 정립한다면, 그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신 주님의 말씀들이 더욱 더 선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더욱 더 열심히 교리를 공부하고 그 교리의 인도를 받으며 성경을 탐구할 것이다.

 

 

 

2. 일반계시[자연계시]에 대해 논하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당신의 마음을 계시를 통하여 말씀해 주셨다. 우리는 주님께서 계시해 주신 만큼만 알 수 있다. 그 외의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계시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이중 계시로 우리에게 말씀 하셨다. 일반계시는 자연적 계시라고도 하며, 창조계시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든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계시해 주신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해 특별계시는 초자연적 계시라고 하며 말씀계시로서 성경을 통한 계시를 말한다.

일반계시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몇 구절 설명해본다. 첫째 로마서 1장 20절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로 했으며, 시편 19편1-4절 상 반절 에서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말한다.

칼빈 또한 일반계시에 대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이미 말한 바 있는 종교의 씨앗을 심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또한 매일 계시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을 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고 말하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 위에 자신의 영광의 명백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으며,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식하고 둔한 사람이라 해도 모른다고 변명할 수가 없게 되어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더욱 강조하여 “눈을 어디로 돌리든지 이 세계에는 적어도 하나님의 영광의 섬광이 발견되지 않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우리 앞에 널리 펼쳐져 있는 이 엄청나게 광대하고 아름다운 우주의 구조를, 그 광채의 끝없는 힘에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고는 잠시라도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경배하고 찬양하고 교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여 실낙원을 지은 밀턴에게서, 밀레의 만종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일반계시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죄가 가장 큰 원인이다. 죄로 인해서 우리의 눈이 어두워졌고, 우리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죄란 하나님을 향한 반역, 반항, 불신과 적극적인 불순종이다. 이러한 죄의 책임은 바로 우리 인간에게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특별계시가 필요하다. 그러나 죄가 없었어도 특별계시가 필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알기에 일반계시로만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 피조물의 창조, 영적인 세계들은 일반계시로는 알 수 없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저주받은 삶을 살아야 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복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만물과 우리는 회복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글에서 “하늘과 구름을 보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엄과 은혜를 체험하며,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온유하심이 아름답게 결합됨을 체험했다. 주님의 지혜와 순결과 사랑이 만물 안에 나타나 보이는 듯 했다.”고 회상했다.

나의 생각을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우리에게 자신을 들어내셨는데, 일반계시는 그의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성품과 뜻과 진리를 말한다. 하지만 일반 계시의 우리의 죄로 인한 타격과 자체적인 한계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계시로 성경을 허락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계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나의 죄 됨을 알 수 있고,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을 누림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우리들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바라보고, 엄위하심과 온유하심의 결합을 체험하며, 주님의 지혜와 순결과 사랑을 의지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3.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 논하시오

 

통념적으로 오랫동안 현대 복음주의에서는 한 가지 잘못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율법과 은혜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만 보는 시각이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고 복음(은혜)은 살리는 것이라는 시각, 율법(계명)을 지키는 것은 율법주의에 가깝고,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및 자발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이란 말만 나오면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율법주의가 잘못된 것이지 율법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도 율법 자체는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첫째, 율법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즉, 율법은 의롭게도, 의로운 삶을 살게도, 영생을 얻는 방편도 되지 못한다. 율법은 오직 정지할 뿐이요 이러한 일들은 복음만이 할 수 있다. 둘째, 그러나 그렇다고 그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통해 오히려 그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서 6장 14절에서 “말하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우리가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여기서 대조시키는 것은 율법과 은혜가 아니라 믿기 전의 삶과 믿은 후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우리가 율법과 아무 상광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는 의롭게 함도, 의로운 삶을 사는 것도 불가능하고 오직 그 율법의 정지 하에서 죄의 지배 아래 있을 수밖에 없고 이러한 일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구속자적 관점에서 서로를 대조시키는 것으로써 율법과 은혜를 반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안과 밖의 삶을 대조시키는 것이다.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임한 것인가를 말하려고 한 것이다.

또 다른 표현인 고린도전서 9장 20-21절이 말하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과 “율법 아래 있다.”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존 머레이의 의견에 따르면 20절의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모세 율법의 의식들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고, 21절의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율법을 지킬 의무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할 때 모든 율법이 아니고 시민법과 제사법을 말하고 율법 안에 있다고 할 때에는 도덕법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구약의 율법이 그리스도 율법 안에 다 들어 있다. 이를 요약되어 있다고도 표현한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구약의 율법에 이미 있었다.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더욱 심화시키고 그 의미와 정신을 살린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케 하기 위해 왔다”라고 선언하셨다.

그렇다면 구약의 율법은 어떻게 구분이 도는가? 첫째, 시민법으로서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필요했던 것으로 민사법과 재사법이다. 둘째, 의식법으로서 제사의식, 정결의식, 할례의식 등이 이에 속하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모형이며 그림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다 성취되었다.

마지막으로 도덕법인데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삶의 윤리적인 기준을 제시해 준다. 현재 시민법과 의식법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고 도덕법만 우리에게 해당된다.

정리하자면, 고린도전서 9장의 율법은 모세의 의식들(즉 의식법)을 말하는 것으로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맞게 이 법을 따라주거나 않거나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다”고 할 때는, 이런 식법을 제외한 도덕법에 대해선 지킬 의무가 있음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고, 모세의 의식들(즉 의식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다. 그리스도(하나님)의 율법(계명, 법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나는 율법(특히 도덕적 율법)이 그리스도인에게 여전히 필요한 것이며, 신자로서의 그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이는 칼빈이 말하는 율법의 세 번째 용도에 해당한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도덕법’이다. 칼빈은 율법의 용도(기능) 중 이 세 번째 용도를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칼빈이 말하는 율법의 세 가지 용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죄 억제 기능으로서 벌을 받으리라는 공포심을 일으켜 일부 사람들을 억제하는 것으로 불신자들도 해당 된다. 둘째, 정죄 기능으로 하나님의 의를 밝히고 인간의 죄를 정죄함으로써 은총을 구하도록 하는 역할이다. 이는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몽학선생의 역할로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 또한 불신자들도 해당된다. 마지막 셋째는 선행 촉구 기능으로 신자들을 훈계해서 선행을 촉구하고 신자들의 삶의 지침으로서의 역할이다. 칼빈은 이를 가장 중요한 용도, 율법의 중심 목적에 더욱 가까운 것으로 보았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기능이다.

정리해서 말하면, 율법은 은혜 박에 있는 자들에게는 의롭게도, 의로운 삶을 살게도 하지 못한다. 다만 죄 억제 기능과 정죄(를 통해 그리스도께 이끄는)기능만 할 뿐이다. 반면 은혜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은 신자로서 살아야 할 삶의 기준을 보여주고,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통해 이 율법을 굳게 세우게(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기쁨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알아 갈수록, 주님의 말씀의 정직함, 탁월함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송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율법이소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방편이 된다. 노예가 아니라 아들(자녀)로서 율법은 사랑하는 아버지가 주신 것이고, 우리를 살리려고 주신 것이다. 우리의 잘못된 율법의 관점을 전화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