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계시
기독교 신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존한다. 특별계시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죄인들의 구주로 나타내시는 행위를 가리킨다.
특별계시의 목적
사람이 일반계시만으로는 참하나님과 자신의 죄악의 심각성과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필요하였다.
여기에 특별계시의 목적도 있다. 즉 특별계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참하나님을 바로 알고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한 계시, 곧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계시인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 . .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2-35).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절정은 그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요 3:16).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은 이렇게 진술한다:
비록 본성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일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므로 사람들로 핑계할 수 없게 하지만, 그것들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지식을 주는 데 충분치 못하다.
그러므로 주께서 여러 시대에 여러 방식들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의 교회에게 그의 뜻을 선언하시기를 기뻐하셨고."
특별계시의 방식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신현(神現), 말씀, 그리고 기적이라는 세 가지의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육신의 눈으로 뵈올 수 없는 영(靈)이시지만(요 4:24; 딤전 6:16), 사람들에게 종종 자신의 모습을 직접 나타내셨다. 우리는 이것을 신현(神現, theophanies) 혹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라고 부른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과 매우 친근히 교제하셨다. 그는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셨다'(창 3:8).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불과 구름으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 처음 모세를 부르셨을 때, '여호와의 사자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출 3:2). 또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달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불 가운데서 시내산에 내려오셨다(출 19:18).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을 만들어 드렸을 때도, 구름이 그것을 덮었는데, 성경은 그것을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고 표현하였다(출 40:34).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봉헌했을 때도 구름이 그 곳에 가득하였다(왕상 8:10).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천사 혹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창세기 18:1, 2은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섰는지라"고 기록했다. 이 세 사람 중에 한 분이 하나님이셨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한 후에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고 증거했다(창 32:24, 29, 30). 선지자 호세아는 그 사건에 대해 '야곱이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겼다'고 언급한다(호 12:3, 4).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사건이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증거한다(요 1:14). 주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보여주시기를 요청하는 빌립에게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요 14:9). 바울도 디모데전서 3:16에서 '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전통사본)고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지 않으셨다. 그는 말씀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은 하나님을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고 묘사한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모세는 자주 그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을 때, 그는 음성으로 '모세야'라고 말씀하셨다(출 3:4). 시내산 앞에서도 '모세가 말할 때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대답하셨다'(출 19:19). 또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 여호와께 말씀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다'(민 7:89). 하나님께서는 친히 증거하시기를, '모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였다'고 하셨다(민 12:8).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빈번히 꿈이나 이상(異象)으로 말씀하셨다. 그러한 현상들은 정신 없는 혼미한 상태에서 일어난 애매모호한 사건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명확한 계시 사건들이었다. 창세기 15:1은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였다'고 증거한다. 야곱은 꿈에 '여호와께서 사닥다리 위에 서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창 28:12, 13).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미리암에게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였다"고 말씀하셨다(민 12:6). 신약 시대에도 꿈과 이상은 종종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마 1:20; 행 9:10).
하나님께서는 더욱 빈번히 성령의 특별한 감동으로 말씀하셨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성령의 특별한 감동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전달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증거했다(벧후 1:21). 우리는 선지자들에게 주신 성령의 특별한 감동의 방식을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히 구별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등의 표현을 빈번히 사용하였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 시대의 우림과 둠밈도 이와 관련이 있다. 사무엘상 28:6은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셨다'고 증거한다. '우림과 둠밈'의 말뜻은 '빛과 완전함'이다. 그것은 대제사장 아론의 판결 흉배 안에 넣어두는 어떤 물건이었던 것 같다(출 28:30).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도구가 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을 지닌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영의 깨닫게 하심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절정적 사건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었다. 히브리서 1:1, 2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의 특별계시이며, 그의 모습은 하나님의 모습이며, 그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기적들을 행하셨다. 기적을 표현하는 세 단어는 '기사,' '능력,' '표적'이다. '기사' (奇事, wonder)라는 말은 그것이 사람에게 놀라움을 준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능력'(power)이라는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기적을 위해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표적'(表蹟, sign)이라는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를 확증하는 표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 세 단어 중, 표적이라는 말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적[표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셨다(신 4:34, 35). 사도 요한은, 자신이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들을 몇 가지 증거하는 목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요 20:30, 31).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다'고 말한다(행 2:22).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으로 사도들과 함께 복음을 증거하셨다'고 표현한다(히 2:4).
성경에서 기적들이 일어난 시대는 주로 네 시대이었다. 각 시대마다 기적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확증하였다. 첫번째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이었다. 그 시대는 하나님의 율법의 전달, 기록 및 확증을 통해 구약 계시의 기초를 확립한 시대이다. 두 번째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이었다. 그 시대는 참종교가 심히 쇠약하고 거짓된 이방신인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심히 왕성했던 배교의 시대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적들을 통해 참된 경건과 진리의 지식을 확증하셨다. 세 번째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시대이었다. 그 시대는 이스라엘의 포로 시대로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망하고 이방 나라들의 권세가 극히 우세했던 시대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여전히 세상의 왕이요 주권자이심을 증거하셨다. 네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이었다. 그 시대는 구약이 예언한 메시야가 오신 시대요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절정과 완성의 시대이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많은 기적들을 주신 것은 매우 합당하였다. 그 시대에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완전하고 충족한 기록물로서 완성되었다.
특별계시의 성격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몇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그것은 언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전달 수단은 인간의 언어이었다. 비록 사건 계시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 사건의 설명이 뒤따랐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로 특별계시를 주심으로 우리로 그 계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여기에서 인간의 언어의 인식적(認識的, cognitive) 기능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된다. 만일 누가 인간 언어의 인식적 기능을 부정하고 언어의 불완전성만을 주장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불신하고 부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신정통주의라고 불리우는 신학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객관적으로 기록될 수 없고 단지 주관적으로만 경험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불신임하고 결국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신정통주의는 계시를 단지 하나님과 사람의 인격적 만남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본다. 신정통주의는 단지 하나님의 인격적-경험적 계시를 주장하고, 그의 언어적-명제적(命題的, propositional) 계시를 부정한다. 그러나 신정통주의의 이러한 계시 개념은 비성경적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인격적-경험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언어적-명제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언어로 말씀하셨고 그 말씀들을 객관적으로 명확히 성경책에 기록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것은 기록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을 불신하는 근본적 오류다. 그것은 명백히 이단적 사상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역사적(歷史的)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특별계시는 역사적 계시사건들이었다. 성경의 절반 가량은 역사이다. 또한 역사가 아닌 내용들, 즉 예언들, 시들, 서신들도 어떤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들 속에서 주어졌다. 예컨대, 이사야가 본 이상(異象)과 받은 예언의 말씀들은 "유다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주어졌다(사 1:1). 또 에스겔이 처음 하나님의 이상을 본 것도 '제30년 4월 5일에 그가 그발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었을 때'이었다(겔 1:1). 하나님은 역사적, 문화적 상황들을 계시의 수단으로 사용하셨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대체로 성경에 증거된 사건들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그들이 말하는 계시 사건은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적 사건의 역사(Historie)가 아니고, 하나님의 세계의 사건의 역사 혹은 초월적 역사(Geschichte)이다. 그러나 이렇게 두 차원의 역사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역사성을 혼동시키고 실상 부정하는 것이다. 초월적 역사란 역사가 아니다. 초월적 역사로서 계시 사건들을 긍정하는 것은 성경의 사건들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의 객관적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이요 그것을 실상 그 사건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이단적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점진적(漸進的) 성격을 가진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점진성은 구약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또 특히 구약과 신약을 비교해 봄으로써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중심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에 예를 들어 '뱀의 머리를 밟으실 여자의 후손'으로(창 3:15), '아브라함의 씨'로(창 12:7; 22:18), 성막 제도와 제사의 규례들로(출애굽기, 레위기), 그리고 '다윗의 씨'로 예표적으로 또는 예언적으로 점점 계시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약 시대가 되어, 그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주로 최종적으로, 절정적으로 밝히 계시되셨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있어서 구약은 그림자요 신약은 실체이며, 구약은 약속이요 신약은 성취이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걸쳐 점진적으로 더 확실하고 풍성하게 계시된 것이다.
특별계시의 종결성과 계속성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끝났는가 혹은 오늘도 계속되는가라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역사상 주신 특별계시들, 이미 성경에 기록된 그 계시들이 충족한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역사상 당신의 뜻을 충족히 계시하셨다면,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충족성을 말씀하고 있다. 주 예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6:31). 이것은 구약의 충족성을 잘 증거한다. 히브리서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기록한다(히 1:1,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내용인 신약 계시가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임을 증거한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약 계시에 첨가할 또 다른 어떤 계시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증거한다.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맨 끝부분에서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엄숙히 말하였다(계 22:18, 19). 이것은 이 마지막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종말 예언의 말씀이 충분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이상의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충족히 주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특별계시의 종결성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은 엄격히 말해 특별계시의 이전 방식들의 종결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그 방식들은 지금은 중지되었다"고 진술하였다.
물론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자신을 더 이상 계시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과거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현재의 특별계시의 수단이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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