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학습 도움이

제 1부 중세 기독교 제 3장-5장

예림의집 2009. 4. 21. 00:15

제 1부 중세 기독교

제 3장 제국의 복고와 계속되는 쇠퇴

서기 800년 성탄절 날, 클로비스가 세례 받은 후 304년 만에 교황 레오 3세는 그의 손에 면류관을 들고 프랑크 왕 찰스 앞에 나아가 그 머리 위에 관을 얹으며 황제라 칭하게 된다. 이 보다 324년 전에는 서방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폐위당한 바 있었다. 후일 샤를마뉴라 불리운 찰스에게 대관함으로써 레오는 교회의 축복 아래 태어난 고대 제국을 부활시킨 것이었다.

샤를마뉴 대제의 통치

레오가 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내렸을 때, 서방 기독교권 거의 전부가 황제의 통치 아래 있었다. 단지 브리튼 제도 및 아랍인들도 정복하지 못했던 일부 스페인만이 예외였다. 샤를마뉴는 이미 프랑크족의 국왕으로서 고대 로마 제국의 영역 이상으로 자기 영토를 확장한 바 있었다. 특히 제국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던 색슨족과 프리지아 족을 쳐부숨으로써 영토 확장을 이룩하였다. 또한 서쪽으로도 영토의 확장을 시도하였다. 제 1차 스페인 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샤를마뉴 군대는 스페인에 발판을 마련하고 에브로 강 유역가지 정복해 버린 후, 흔히 스페니쉬 마치로 알려진 지역들을 설치하였다. 또한 그는 오스트리아의 알퐁소 2세를 도와 무어 족으로부터 스페인 반도를 재탈환하기 시작하였다.

샤를마뉴는 황제로서 스스로의 권위가 세속 정부 및 종교 문제에까지도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마치 장군을 임명하듯이 감독들을 임명하였으며,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교회에서 설교를 행하도록 하고, 주일을 예배와 휴식을 위한 날로 지정하였으며, 마치 세금을 징수하듯이 십일조를 걷도록 하는 법률도 마련하였다. 당시 수도원은 이미 원래의 경건과 열정을 상실한 상태에 있었다. 많은 수도원장들은 그 직위를 이용하여 부와 권력을 탐하였으므로 샤를마뉴는 전체 수도원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니안의 베네딕트에게 이 과업을 맡겼다. 아니안의 베네딕트는 곧 샤를마뉴의 영역 내에 있던 수도원들을 원래의 베네딕트 규율에 의해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샤를마뉴는 학문을 장려하였다. 이미 존재하던 학교를 개혁하고 부흥시켰으며, 이탈리아에서 만난 요크의 알쿠인을 궁정으로 불러들였으며, 그는 브리튼의 수도원들을 통해 보존되었던 지식을 프랑크족에게 전해주었다. 샤를마뉴는 또한 스페인 출신의 테오둘프스를 오를레앙 감독으로 임명하였는데, 테오둘프스는 자기의 교구내의 모든 교회마다 학교를 설치하고 빈부를 막론한 모든 이들에게 이를 개방하였다. 다른 감독들도 테오둘프의 모범을 따르기 시작하였으므로, 학문의 부흥이 크게 일어났다. 또한 수많은 학자들이 샤를마뉴의 영토로 찾아들었다.

그러나 샤를마뉴가 이룩했던 제국의 영광은 그의 사후에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의 아들 경건한 루이는 양심적 통치자였으나, 인물을 제대로 식별할 줄은 몰랐다. 그는 아니안의 베네딕트의 지도 아래 수도원 개혁을 계속 하였고 또한 십일조로 받아들인 금액 중 삼분의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조취 하였으며, 감독들이 성직자들과 교인들의 손에 의해 선출되도록 하는 옛 관습을 채용함으로써 교회의 독립을 고양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부 감독을 비롯한 많은 자들은 이러한 그의 선한 뜻을 악용하여 자기들의 이익만을 추구하였으므로 그의 통치 기간 중 마지막 부분은 루이의 아들들과 그들을 좇는 당파들의 싸움뿐만 아니라 황제를 대항하여 벌이는 반란으로 얼룩지게 되었다.

그가 죽은 후 재산은 그의 세 아들에게 분배되었으며, 그의 손자로서 881-887년까지 황제위에 있었던 프랑스의 “뚱뚱보” 찰스 아래서 고대 제국 영역의 대부분이 재통일되었으나. 찰스의 사후에는 또 다시 분열되었다. 이러한 내부의 분열 및 반란 외에도 노르만족 및 기다 야만족들의 침입이 그치지 않았다.

또한 아랍인들의 정복은 서부 유럽의 경제 및 정치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정복 이전에는 지중해 연안뿐 아니라 동양에 이르기까지 멀리 상업과 교역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아랍인들이 동양으로 통하는 통로를 막고 지중해 남부 및 동부 해안을 통치하게 되자 대규모 교역은 불가능해졌으므로 각 지역은 자급자족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고, 통화의 유통은 거의 중단되고 금화의 존재는 극히 귀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부의 주된 원천은 화폐가 아닌 토지가 되었다. 국왕들과 영주들은 봉사의 대가로 토지를 하사하게 되어 이에 따라 봉건제도가 탄생하게 되었다.

교회 역시 이로 인해 영향을 받아 각 교구 및 사원들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영주들은 감독들과 수도원장들의 환심을 얻기에 급급하였다. 이에 따라 특히 감독들과 수도원장들의 임명권이 무척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신학적 활동

샤를마뉴가 주도하였던 학문의 부흥은 9세기 전체에 걸쳐 열매를 맺었는데, 학교들이 융성하였고, 사본들이 복사되었으며, 상당한 신학적 활동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조직적 사상가는 겨우 한 사람 배출하였는데 당시의 대부분 신학 활동은 주로 교리 혹은 예배의 특정 부분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그 위대한 학자는 존 스코투스 엘리게나였다. 그는 대륙의 병화를 위해 수도원에 보존된 고대의 지식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있었던 아일랜드 출신이었다. 그는 9세기 중반 경 대머리 찰스의 궁정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신 플라톤 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카롤링 왕조 시대의 주요한 신학 논쟁들은 스페인의 감독이었던 톨레도의 엘리판두스와 우르겔의 펠릭스의 교훈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이른바 “모자랍 식 교회 의식”에 관한 논쟁이었다. 본격적인 논쟁은 엘리판두스가 모자랍 식 예배 의식에 나타난 일부 구절들을 기초로 하여 예수님은 신성으로는 성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나 인성으로는 단지 “양자됨에 의하여” 형성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엘리판두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양자론 자”라 불렀다.

얼마 안 되어 엘리판두스와 그의 추종자 펠릭스의 교훈들은 프랑크족 출신 신학자들과 교황들에 의해 정죄 받았다. 엘리판두스와 펠릭스 양자 모두가 사망한 후에야 그 논쟁은 잠잠해지게 되었다.

이 외에도 예정론에 관련된 논쟁이 있었으며, 성찬식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이것이 발전하여 마침내 13세기 제 4차 라테란 종교 회의에서는 화체설을 선포하게 된다.

새로운 침입자들

한동안 샤를마뉴와 그의 후계자들이 4세기와 5세기에 발생한 게르만족들의 침입에 의해 발생한 혼란으로부터 서부 유럽을 구조한 듯이 보였으나 카롤링 왕국의 쇠퇴와 함께 또 다시 시작되었다. 그중에 하나가 스칸디나비아 인들의 침공이었다. 그들은 조선 기술을 발전시켜 프랑스 북부 해안을 공격하여 교회를 불 지르고, 수도원들과 저택들을 노략하여 전리품과 노예들을 이끌고 본토로 개선하곤 했다. 이들은 귀중품을 얻기 위하여 교회들과 수도원들을 무차별 공격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적들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곧 더욱 대담해져서 보다 멀리 공격의 영역을 넓히고 새로운 영토에 정복자들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들은 11세기경 데인족의 왕 카누트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전체를 정복하였다. 프랑스의 경우, 그들은 보로도, 낭트, 그리고 845년에는 파리까지 약탈하였다. 스페인에서는 모슬렘들의 도시 세빌과 아울러 산티아고 드 캄포스텔라에 있던 기독교 성지를 약탈하였다. 이들은 또 지브랄타 해역을 건너 지중해에까지 진출하였다. 마침내 이들은 모슬렘들로부터 시실리를 탈환하고, 이곳 남부 이탈리아 일대에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결국 노스맨들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들은 자기들 피정복자들의 신앙을 자연스럽게 채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11세기 초반 카누트의 시대에는 이미 거의 모든 스칸디나비아 인들이 세례 받은 상태였다.

같은 시기에 동쪽에서도 침입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마자르족으로서 바로 헝가리 인들이다. 마침내 933년과 955년에 독일의 헨리 파울러와 그의 아들 오토 1세가 이들을 결정적으로 패퇴시켰다. 헝가리 족은 자기들이 정복하였던 슬라브족과 게르만족의 문화에 융합되었다. 10세기 말에는 헝가리족의 왕이 세례를 받았다.

스칸디나비아 인들과 헝가리 인들의 무자비한 약탈과 침략으로 인하여 역사가들은 10세기를 가리켜 “납과 무쇠의 암흑시대”라 부른다.

교황제의 타락

샤를마뉴의 대관으로 교황청의 입장은 상당히 애매모호하게 되었다. 로마제국 안에서는 자주 혼란 상태가 발생하였다. 교황의 자리는 뇌물, 음모, 그리고 폭력까지도 사양치 않는 야망에 가득찬 자들의 희생물이 되었다.

교황 요한 8세 때부터 노쇠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모슬렘족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뚱뚱보 찰스와 비잔틴 인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궁정 안에서 살해당했다. 그 후 교황들은 제 대로 재위 기간을 채우지 못한 채 계속 교체되었다. 로마 시내에 있던 서로 다른 당파들과 알프스 산맥을 건너 존재하던 유력한 가문들이 교황좌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계속 투쟁하였다.

제4장 개혁과 부흥 운동

카롤링 왕조의 몰락과 함께 발생한 폭력과 부패는 많은 이들로 하여금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게 하였다. 수많은 경건한 신앙인들은 무자비한 정적들이 교황좌를 두고 유혈극을 연출하며, 성직이 매매될 뿐 아니라 유력한 자들이 자기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것을 보고 슬픔과 분노를 금치 못하였다. 이러한 개혁을 갈망하였던 인물들은 대부분 수도원을 택하였다. 따라서 결국 교황청을 압도하고 유력한 자들과 대결하며 멀리 성지 이스라엘의 해안에까지 미쳤던 개혁의 물결은 수도원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수도원 개혁 운동

수도원 자체도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수많은 수도원들이 스칸디나비아인과 헝가리인들에 의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수도원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맡았던 귀족들과 감독들은 오히려 수도원들을 사유재산 화 하였다. 교황청과 감독좌들이 개인적 출세와 영달의 도구로 화하였던 것처럼, 거대한 사원들도 같은 운명을 면치 못했다.

이러한 혼란 와중에 애퀴터인의 공작 윌리엄 3세는 소규모의 수도원을 창설하였다. 몇 가지 현명한 결정들과 하나님의 섭리로 볼 수 있는 상황들이 이 조그마한 수도원을 거대한 개혁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윌리엄은 수도원장으로 베르노를 초빙하였다. 베르노는 수도원 개혁을 위한 열성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수도원을 유지하기 위한 토지를 “성 베드로와 성 바울” 에게 바침으로써 윌리엄 자신과 그의 후계자들을 비롯하여 인근 감독들과 영주들의 손에서 수도원을 보호하고, 당시 부패했던 교황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윌리엄은 교황이 두 사람의 거룩한 사도들에게 속한 재산에 손대는 것을 명문화하여 금지시켰다.

처음 클루니 수도사들이 추구하였던 바는 단지 베네딕트의 규율을 온전히 따르는 것에 불과했지만, 곧 그들의 시계가 확장되었고 클루니 수도원장들은 베르노의 모범을 따라 다른 수도원들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따라서 “제2 클루니” 들로 구성된 조직망이 나타나게 되었다.

11세기에 있어서 교회 개혁은 이미 수많은 수도원 공동체에서 벌어지던 움직임의 연장으로 파악되었다. 바로 이러한 이상을 품고 토울의 브루노는 그의 동료들, 즉 힐데브란트와 훔베르트를 동반하고 로마를 향해 갔으며, 이곳에서 브루노는 레오 9세의 이름으로 교황에 즉위하였다.

클루니가 일체의 세속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통해 그 위대한 과업을 수행할 수 있었으므로 교회 개혁가들은 교회 지도자들이 국왕들이나 귀족들을 비롯한 일체의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하였다. 따라서 성직 매매야말로 당장 제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또한 귀족들, 왕들, 그리고 황제들에 의한 감독이나 수도원장들의 임명 역시 엄격한 의미에서의 성직 매매는 아니었지만 매우 밀접한 양상을 띠고 있었으므로, 특히 세속 통치자들이 개혁 의지를 지니지 못한 지역에서는 금지되어야 할 사항이었다.

또한 수도원 적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개혁의 또 다른 큰 적수는 성직자들의 결혼이었다. 수세기를 두고 많은 이들이 독신을 지켰으며 이를 적극 권장하는 움직임도 여러 번 있었으나 독신 제도가 하나의 규범으로 강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특히 수도원의 모범에 힘입어 이 개혁가들은 성직자들의 독신 제도를 개혁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제도의 하나로 주장하였다. 결국 이제까지는 수도사와 수녀들에게만 요구되었던 이 제도가 모든 성직자들에게도 요구되었다.

교황 주도의 개혁

로마를 향해 가는 소수의 순례자들이 있었다. 브루노, 그는 황제가 교황직을 제안하였으나, 오히려 순례자로 로마에 입성하기를 원했다. 그는 로마 시민들과 성직자들이 그를 선출할 때에만 교황의 자리를 받아드리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황제의 손에서 교황직을 받는다는 것은 성직 매매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한명의 인물은 로타린기아 수도원에서 학문에 전념하면서 성직 매매 반대 운동을 벌였던 훔베르트였다.

그는 자기 논문 “성직 매매자들에 대항하여”를 통하여 당시 유력자들에게 준엄한 비판을 가하였다. 바로 그가 그 후 1054년 성 소피아 사원의 중앙 제단에 파문 장을 얹어놓음으로써 동방과 서방의 분열을 공식화시킨 인물이다. 그러니 가장 중한 인물은 수도사 힐렌브란트였다. 로마 수도사로 있을 당시 장래의 교황 그레고리 6세를 만났던 인물이다. 힐레브란트는 그리고리 6세의 유배의 길에까지 그와 동행하였으며, 결국 그레고리 6세의 임종 시 함께 하였다. 부르노는 로마를 향해 가면서 자기가 마음먹고 있던 교회 개혁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힐데브란트의 동행을 요청하였다.

부르노는 자기 신앙의 표현으로 로마를 향한 맨발의 순례길에 올랐다. 로마에 입성하여 교황의 삼중 관을 받아들이고 레오 9세의 칭호를 취하였다. 그리고 우선 자기와 비슷한 개혁의 이상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을 주위에 모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개혁운동은 성직자 독신 제도와 성직 매매의 금지에 기초하고 있었다.

일단 이탈리아 내에서의 개혁 조처를 이룩한 레오는 알프스 산맥을 건너 이를 확장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독일로 가서 성직 매매의 금지 결정들을 추인하는 한편, 황제에 반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로렌의 고드프리를 파문시켜 굴복하게 만들었다. 또한 프랑스를 방문하여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성직 매매의 혐의가 있는 몇몇 고위 성직자들을 퇴위시켰다.

그런데 레오는 교황 재직 시 두 가지 큰 오류를 범했는데, 첫 번째는 시실리 및 남부 이탈리아에 정착했던 스칸디나비아인들에 대항하여 무력을 사용한 일과 훔베르트를 자기의 사절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그의 사망 직후인 1054년에 대분열이 발생했던 것이다.

힐데브란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그레고리 7세의 칭호를 취하고 이미 오랫동안 수행하였던 개혁의 사역을 계속하였다. 교황청 아래 세계를 통일하여 한 목자 아래 한 양떼를 이룩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이슬람에 대항할 대 전선을 구축했다. 서부 전선은 스페인에 두었고, 동부 전선의 라틴계 기독교 신자들은 포위당한 콘스탄티노플을 구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시도는 종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교황청과 제국의 정면 대결

그레고리의 개혁을 향한 열정은 곧 황제 헨리 4세의 이해와 충돌하게 되었다. 헨리는 어린 소년 시절 개혁파 교황의 보호 아래 자라났으므로, 그레고리는 헨리야말로 개혁 운동에 찬동할 줄로 믿었다. 그러나 날로 강성해지는 감독과 고위 성직자들의 영향력에 위협을 느낀 헨리는 제국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황제가 자기를 지지하는 인물들을 성직에 임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밀란에서 성직자들의 독신주의를 고집하는 극단 파들에게 자극을 받은 폭동이 일어남을 계기로 그리고리와 헨리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결국 헨리가 요청한 용서를 허락함으로 그의 칙령은 철회되었다. 그러다 헨리의 재차 진군으로 인해 그레고리는 페하고 로마는 클레멘트 3세에가 차지하게 된다. 몬테 카시노와 살레르노 등으로 피신하였던 그리고리는 계속 헨리와 클레멘스 3세에 대한 위협을 그치지 않았으나, 아무도 그에게 귀를 기울이는 자들은 없었다. 그는 1085년 사망하였다.

이 후에도 황제와 교황청과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전쟁은 계속 된다.

제 5장 이슬람에 대한 공격

중세에 서방 기독교권을 사로잡았던 갖가지 이상들 가운데 십자군 원정의 정신만큼 극적이고 열렬하면서 동시에 모순적인 것은 없었다. 수세기에 걸쳐 서부 유럽은 그 결과가 비극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던 일련의 원정에 정렬과 생명을 바쳤다. 이들이 원했던 것은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했던 모슬렘을 물리치고, 비잔틴 제국을 구원하며, 동, 서방으로 나누어진 교회를 재결합시키고, 성지를 탈환하며, 이러한 작업을 통해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영혼 구원의 목적이 과연 달성되었는가의 여부는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모든 목표들은 달성되었다. 그러나 그 어느 목적도 영구히 달성되지는 못하였다. 처음 자기들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패배 당했던 모슬렘 신도들은 결국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십자군을 패배시켰다. 콘스탄티노플과 그 진영은 15세기까지도 생존하였으나, 결국 오토만 투루크족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동, 서방 교회는 제 4차 십자군 원정의 결과 일시적으로 통일되었으나, 이처럼 강요된 결합은 결국 동방과 서방 사이의 증오만 더욱 깊게 만들었다. 성지는 약 1세기 동안 십자군들의 수중에 있었으나 결국 모슬렘 신자들에게 다시 점령되고 말았다.

제 1차 십자군 원정

오랜 시절에 걸쳐 기독교 신자들은 성지를 앙모하였으며, 성지 순례야말로 가장 뛰어난 경건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제 모슬렘으로 개종한 셀주크 투루크족이 비잔틴 제국을 위협함으로써 많은 신자들은 과거 아랍인들의 정복을 다시 상기하게 되었다. 만약 서방 교회가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비잔틴을 구원한다면, 1054년 이래 분열 상태에 있었던 교회가 재결합되리라고 생각되었다.

이리하여 그레고리 7세도 이미 콘스탄티노플을 구원하고 성지를 회복할 대 원정을 꿈꾼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이러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여유가 없었으며, 190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실제로 원정의 불을 당긴 것은 우르반 2세였다. 곧 제대로 조직조차 갖추지 못한 군중들이 은자 피터의 지도 아래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다.

십자군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했으며, 이곳에서 황제 알렉시우스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또한 은자 피터도 패잔병들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합류하였다. 이들은 비잔틴군의 도움 아래 투르크족의 수도였던 니케아를 우선 탈환하였다. 그리고 안디옥을 향하였다. 그런데 다소의 성벽 앞에서 탄크레드와 고드프리의 동생이었던 볼드윈은 격렬한 언쟁을 벌였고, 그 결과 볼드윈은 원정을 포기하고 아르메이아인들의 요청을 수락하여 이들의 지도자로서 에데사의 백작의 칭호를 받았다. 나머지는 원정을 계속하여 안디옥에 이르러 마침내 이를 포위하였다.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을 발견하고 투푸크족을 이긴다.

1099년 6월 7일 마침내 예루살렘의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투루크족이 아니라, 이집트 출신의 파티마족 아랍인들이었다. 1099년 7월 15일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시킨다.

후기 십자군 원정

이제 사명을 완수했으므로 대부분의 십자군들은 귀향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모슬렘의 계속된 공격을 막아내기위한 기사들이 턱없이 부족하였으므로 보충병력의 계속적인 투입이 시급하였다. 소수의 무장 병사들 혹은 기사들이 단기간 성지에서 봉사하기 위해 유럽을 떠나는 것이 흔한 광경이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성지에 남았으나 또 다른 이들은 겨우 무장 순례라 볼 수 있는 여행을 마치곤 다시 귀향하였다.

십자군의 정신, 그리고 십자군의 행렬 등은 수 세기를 두고 꾸준히 계속되었던 현상이었으므로 “집자군 원정” 을 일련의 독립된 전투로 파악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정확하지 않다.

제 2차 십자군 원정의 동기는 1144년 알레포의 술탄에 의한 에데사의 함락이었다. 1187년 예루살렘이 이집트의 술탄 살라딘에게 함락 당했다. 원정은 실패한다.

제 3차 십자군 원정은 프레드리히 바바로사 황제, 영국의 사자 심장의 왕 리차드, 프랑스의 존엄왕 필립 2세의 영도로 진행되었으나 역시 실패하고 만다.

1270년으로서 십자군 원정의 종말을 맞게 된다.

스페인의 재정복

스페인에 세워졌던 고대 서 고트 왕국은 8세기에 들어와 모슬렘들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일부가 북부 스페인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 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그 후 프랑크족은 보다 동방으로 진출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세력을 중심으로 재정복이라 부르는 이슬람에 대항한 기나긴 저항이 시작된다. 비록 후에 나타난 전설은 이를 가리켜 불신자들에 대항한 기독교 측의 계속적 노력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실상은 이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모슬렘에 대항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들까지도 계속 분열 상태에서 싸움을 벌였으며, 종교를 초월한 동맹의 모습도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기독교적 스페인의 통일에 있어서는 성 야고보의 무덤 “발견”이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9세기에 들어와 이곳은 서부 유럽 전역으로부터 기독교 신자들이 모여드는 중요한 성지가 되었으므로, 산티아고, 즉 성 야고보의 성지에 이르는 도시로는 북부 스페인을 기타 서방 기독 권과 계속적 접촉을 유지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결국 성 야고보는 모슬렘들에 대항한 투쟁의 수호신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산티아고 마타모로스, 즉 무어인들의 살해자 성 야고보라는 명칭이 성립하게 되었다.

1002년 코르도바의 마지막 칼리프가 사망하면서부터 모슬렘들이 수많은 소왕국들로 분열되고 더기에 편승해서 스페인의 재정복 운동이 보다 활기를 띠게 되었다. 마침내 1492년 페르드난드와 이사벨라가 그라나다를 함락시킴으로 그 열매를 맺게 되었다.

스페인과 11세기경 노르만인들에 의해 정복당했던 시실리야말로 이슬람 인들에 대항한 무력 전쟁의 영속적 성공을 거두었던 유일한 지역들이었다.

이슬람에 대한 공격의 결과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들과 사건들을 통하여 기독교 신자들과 모슬렘들, 그리고 라틴 신자들과 비잔틴 신자들 사이의 증오와 적대심은 깊어가기만 했다. 십자군 원정의 사건들과 이 때문에 발생하였던 유혈극은 쉽사리 잊혀질 수 없었다. 서부 유럽에서 십자군 원정과 스페인 재정복은 교황의 세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십자군 원정을 주도하고 그 지도자들을 임명한 것은 교황들이었으며, 이들은 또한 스페인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으므로 교황청은 보다 막강한 국제적 영향력을 획득하게 되었다.

십자군 원정은 또한 기독교의 경건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지와의 잦은 접촉을 통해 신자들은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사건들에 보다 큰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으며, 이들은 특히 예수님의 인성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제 2차 십자군 원정을 가능케 했던 설교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드 역시 예수님의 인성을 깊이 명상하였던 신비주의자였다.

십자가 고난의 세부적 상황에 관한 시들과 저서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비슷한 이유로 예수님의 십자가 조각들, 성경에 나타난 신앙인들의 유물들, 이빨들 등 소위 성 유물들이 유럽으로 들어옴에 따라 성 유물 숭배 역시 가열 되었다. 군사적 수도회의 설립에 따라 수도원의 이상도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수도원들은 청빈, 순명, 그리고 순결 등 전통적 서약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명상, 혹은 성경 연구의 시간을 보내는 대신 전투를 위주로 하는 투사들이었다. 예루살렘의 성 요한 수도회, 템플 기사 수도회, 그리고 기타 수도회들이 성지에 창립되었다. 스페인에도 이와 비슷한 칼라트라바, 알칸타라, 그리고 산티아고 등의 수도회들이 존재하였다. 십자군 원정이 종식된 오랜 후에도 이러한 수도회들은 계속 존재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였다. 십자군 정신은 또한 이단들에 대한 대항에서도 나타난다. 남부 프랑스 및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는 고대 교회에 존재하였던 마니교와 비슷한 교리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인노센트 3세는 이들에 대항한 전투를 소집하였다.

특히 신학 분야에서 볼 때, 모슬렘과의 새로운 접촉은 매우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모슬렘 령 스페인과 이보다는 그 정도가 떨어지지만 모슬렘 령 시실리 등은 학문의 중심지들이었다. 중세의 가장 뛰어난 유대인 철학자와 모슬렘 철학자인 마이모니데스와 아베로에스 등은 모두 코르도바 출신이다. 이드로가 그 동료들은 고대 철학을 부활시켜 이를 유대고 및 이슬람교의 신학적 문제들에 접목시켰다. 특히 아베로에스의 경우가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하여 방대한 주석들을 남겼다. 스페인과 시실리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자신과 아울러 이들 철학자들의 작품들이 서부 유럽에 소개되었다. 이들은 그 후 13세기에 들어서 철학과 신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당시 유럽에 발생하였던 경제적, 인구 적 변화와 십자군 원정들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십자군 원정 시대에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였다. 그때까지는 부의 유일한 근원이 토지였으므로, 경제적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통상과 교역이 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새로운 부의 원천들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도시들이 성장하였으며 도시 내에 새로운 계급, 즉 부르주아들이 타나나기 시작하였다. 주로 당시 점차 경제 및 정치력을 획득해 가던 상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곧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던 고위 귀족들에 대항하여 국왕들과 동맹 관계를 맺게 된다. 결국 이들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왕실과 귀족들을 전복시키는 것이다.

'서울신학·총신신대원 > 학습 도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2. 긍정적인 자아상의 법칙  (0) 2009.04.21
수도원 운동(Monasticism)  (0) 2009.04.21
예레미야를 부르심  (0) 2009.04.21
모세를 부르심  (0) 2009.04.20
도서관 입고 도서목록<2009.4>   (0) 2009.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