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학습 도움이

제 1장 회심 이전의 바울-1.다소:출생과 생장-②

예림의집 2009. 3. 18. 16:45

반 운닉의 견해에 대한 비판

 

그러나 바울서신에 나타나 있는 여러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반 우닉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우선 반 우닉의 주장은 바울이 유대교적 배경을 잘 해명해 주지만, 그러나 바울의 배경 속에 들어 있는 엄연한 헬레니즘인 배경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 근거로 첫째, 바울이 헬라어를 모국어처럼 자유롭게 구사하며, 둘째, 그의 4차에 걸친 선교여행이 모두 헬라 문화권 내에 있는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셋째, 그가 회심 후 3년이 지나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그 후 그의 고향인 다소에 가서 10여 년 정도 독립적인 선교 활동을 하였다는 사실(갈 1:21-24; 행 9:30 참조), 넷째, 그리고 바울 서신에서 구약을 인용할 때 대부분 헬라어 판 구약성경인 70인경에서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 등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반 우닉이 말하는 것처럼 바울이 아주 어렸을 때 예루살렘으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다소에서 어느 정도 성장하여 아마도 다소에서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받고(물론 이 교육도 이방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헬라 학교가 아니라 유대교 회당학교에서 배운 유대교 교육), 그의 아버지에게서 장막제조 기술을 2, 3년 정도 익힌 후 청소년 시기인 15세를 전후하여 예루살렘에서 율법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랍비가 되어 일생을 율법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바울이 다소에 있는 동안 유대교적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울 자신이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자신이 유대인들의 모국어인 아람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임을 주장하고 았고, 실제로 바울이 예루살렘 성에서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모국어인 아람어로 말한 점(행 22:2)과, 바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집안 까지도 유대교를 보존하고 유대적인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율법을 지키고자 애쓴 바리새파라고 한 점(행 23:6) 등은 바울의 부모가 바울이 다소에 있을 대부터 특별히 가정이나 회당에서 유대인들의 모국어인 아람어를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율법 등을 철저하게 가르쳐 이교 헬라어 문화의 아들이 아닌 유대교 정통 바리새인의 아들로 성장하도록 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셋째, 다소는 지리적으로 이상적인 곳에 위치해 있었다. 다소 주변의 비옥한 땅 덕분에 포도와 밀, 아마(亞麻) 등이 풍성하게 재배되고 있었다. 다소는 내륙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져 있지 않았음에도 자체 항구가 있었다. 키드누스 강이 도시 중심부를 지나 그 항구로  흐르고 있었다. 위치상 대규모 무역의 길목에 있었던 다소는 그로 인해 상업과 부의 해택을 누릴 수 있었고, 그래서 크세노폰은 다소를 '위대하고 부유한 도시' 라고 불렀다. 소년 시절에 바울은 항구에서 상선들의 돛을 보았을 것이고, 여행자들이 동서에서 다소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을 것이며, 분주하고 시끄럽게 물건을 사고파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 도시의 국제적인 성격은 복음을 듣고 다른 큰 도시로 두루 여행하고자 했던 바울의 열망에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넷째, 다소는 로마와 정치적으로 절친한 동맹관계에 있었다. 다소의 시민들은 BC 47년에 줄리우스 시저가 방문했을 때 그를 열렬히 지지하였다. 그로부터 5년 후 마크 안토니는 다소에게 자유도시의 특권을 부여했다. 이는 자치권의 부여와 로마에 내는 세금을 면제한다는 의미로 더 이상 로마의 신민지가 아니라는 이례적인 특권을 이 도시에 부여한 것이다. 다소는 아테노도루스라는 유명한 시민이 있었는데 그는 스토아 학파였고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철할을 가르쳤으며 그의 자문위원이기도 했다. 로마 시민권이 다소 거주민의 상당수에게 부여되었으며, 그 외의 다소 사람들은 500드라크마에 로마 시민권을 살 수 있었다.

 

다섯째, 다소는 학문의 도시였다. 다소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이며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철학 및 수사학을 가르치는 대학도시로도 유명하였다. 바울 당대의 헬라 지리학자였던 스트라보는, "다소 시민들은 철학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교육 전반에 자신들을 헌신했고, 그로 인해 그들은 아덴이나 알렉산드리아를 훨씬 능가했을 뿐더러... 다소에는 온갖 종류의 수사학 학교들이 있다" 라고 기록했다. 바울이 다소에서 헬라의 보통 교육과 수사학 등 교육을 받았으리라 짐작하지만 바울 자신은 그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결론

 

바울이 로마제국 내의 대학도시이며 헬라 및 동양의 부와 문화의 도시였던 다소에서 태어났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과는 달리 바울은 도시 태생이며, 도시에서 자라났다. 이런 도시 태생인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역을 부여받아 그레코-로마 지중해 지역의 수많은 전략적인 도시를 복음화 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예정하신 일이었다. 이렇게 바울이 다소와 같은 대도시에서 출생하고 배우고 성장했다는 것은 바울에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바울 자신의 개인적 사고와 표현이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바울이 다소에서 영향을 받은 이방인에 대한 열려진 마음들과 교육,경험 등이 팔레스타인의 한 구석에서 시작한 기독교를 세계의 도시 중심적 종교로 변화시켰으며 동시에 당시 로마 제국의 모든 이방 종교를 다 물리치고 세계적 종교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비유는 농촌을 배경으로 하지만 바울의 비유나 말씀은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우른 신앙생활을 운동장에서 상을 타기 위해 달려가는 '운동 경기' 로 비유한다(고전 9:24-27; 빌 3:12-14; 갈 2:2; 딤후 4:7). 이것은 고린도에서 열리는 체육 경기를 직접 목격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교회를 '건축' 에 비유하며(고전 3:10-15), 신앙 생활을 '전토'와 '군인' 으로 비유하며(고전 14:8; 고후 10;4; 빌 4:7; 에 6:10 이하), '종' 이라는 사회적 계급을 사용하여 죄의 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며, 로마법의 양자 제도에서 암시를 얻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양자'(갈 4:5; 롬 8:15)라는 등의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유대에서 기원한 복음을 헬라의 문화와 사고 구조로 재해석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전형적인 헬라 도시인 사소에서 출생하고, 성장하고, 공부했기 때문에 주로 도시적 사고를 하고, 팔레스타인에서 기원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노마 제국의 사회 깊은 곳에 복음을 심을 수 있는 경험과 자질을 갖춘 하나님에 의해 준비된 사도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