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학습 도움이

3장. 창세기 1:1-2:3

예림의집 2009. 3. 18. 13:30

3장. 창세기 1:1-2:3

 

창세기 1, 2장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 가운데 하나다. 그만큼 이 본문들은 여러 학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켜 왔으며 수많은 문제들을 제시한다.

우선 자표 비평(source criticism)은 여기에 실린 두 개의 창조 기사는 서로 다른 자료(J, E)로부터 온 다른 기사들이며, 따라서 창조에 관해 서로 다른 그림들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번째 창조기사는 인간 창조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인식되고 있다. 양자의 차이점이 조화를 이루기 불가능할 정도로 다른 것은 아니다.

두 벌째 문제는 성경과 과학의 문제다. 창 1장의 창조기사는 연대기적으로 읽어야 하는가? 1장의 창조기사에 타나나는 욤은 24시간인가? 만약 본문이 창조가정에 관한 정밀한 묘사를 목적으로 기록딘 것이라면, 이 본문은 현대 과학이 발견한 학설들과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본문을 창조 가정에 관한 세부 사항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본다면, 현대 과학을 신봉하는 현대인들과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할 것이다. 더 나아가 현대 과학이 발견하였다고 주장하는 사실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본문들을 읽으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과연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문제 해결의 열쇠는 본문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놓여있다. 그러나 본문 해석 과정에 여러 난제들이 놓여있다.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다. 창세기 1장 1절은 창조 기사 전체에 관한 요약적 진술/표제로 보아야 하는가? 1절은 2, 3절과 문법적으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어떻게 보면 모든 문제는 "창세기 1장 1-3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는 문제로 압축될 수 있다.

세 번째는 역사, 고고학, 고대 근동의 문학 등이 제기하는 문제들이다. 고대 근동의 차옺 설화들은 창세기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왜 창조기사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존재하는가? 본문의 저자는 고대 근동의 신화들로부터 현재의 본문들을 만들어 내었는가? 만약 아니라면 저자는 어떤 창조의 사실드을 알 수 있었으며, 기록할 수 있었는가?

이러한 다양한 질문들을 다 다루는 것은 본 강의의 범위와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여기서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들을 중심적으로 다루려 한다.

 

1. 창조에 관한 세 가지 견해

창 1:1-3에 타타난 창조론에 관해서는 크게 세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그 세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복구 설(the Restitution Theory): 이 견해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1:1) 후, 1:2에 기록된 것처럼 혼돈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시 창조하셨으며, 그 사실이 1:3-31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1장 1절과 2절 사이에는 상당히 긴 시간의 간격이 존재하는 샘이다. 그래서 이 견해를 간격설(Gap theory)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약학자들 가운데는 와이즈맨, 델리취가 이 견해를 지지한다. 델리취는 이 이론에다 "지구가 원래 천사들의 거주지였으며, 천사계의 ㅏ락이 2절에서 언급된 혼돈으로 귀결되는 파멸의 원인이었다" 는 사상을 결합하였다. 이 견해는 스코필드 주석 성경을 통해 널리 퍼졌으며 오늘날 세대주의자들 가운데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복구 설에 의하며 1절의 천지는 "잘 정돈된 우주" 를 의미하며, 2절에서는 지구가 혼돈상태에 빠진 것에 대해 언급하며, 3-31절에서는 우주가 다시 잘 정돈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으므로 1-3절이 지구의 역사에 있어서 연속된 세 단계를 서술한다는 것이다. 창 1:2는 하나니므이 진노와 심판의 결과며 그런 사실이 렘 4:23-26 등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는 것이다. "렘 4:23-26, 사 24:1, 45:18에 의하면 분명히 지구는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대 격변을 겪었으며 이 지구는 도처에 그런 흔적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경 어디에도 창조 -> 혼돈 -> 재창조를 지지해 주는 근거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2절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복구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2정레 나타나는 토후와 보후를, 하나니므이 심판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상태를 묘사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토후와 보후는 심판의 결과 초래된 어떤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 아니다.

복구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그런 결론을 렘 4:23과 사 34:11로부터 가져온다. 즉, 창 1:2 이외에 토후와 보후가 함께 사용된 곳은 성경에서 오직 두 곳 뿐인 렘 4:23과 사34:11인데, 여기서 이 단어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상태를 묘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렘 4:23-26과 사 34:11에 사용된 이 용어는 과연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엠 4:23-26에서 에레미야는 창조으 反轉을 나타내기 위해 이 어구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요점은 파멸을 묘사하기 위해 예레미야가 창조 모티브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예레미야가 창세기의 본문을 염두에 두었다면 파괴는 창조의 역순으로 묘사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토후와 보후가 파괴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전체 과정이 파괴를 묘사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본문을 근거로 "토후와 보후가 창조전 상태를 묘사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 라고 주장할 수 없다. 스바냐 선지자도 여호와의 심판을 묘사하면서 창조질서의 와해를 묘사했다(습 1:3). 스바냐서의 이 구절에서 언급되는 사람, 짐승, 공중의 새, 바다의 고기는 창조의 역순으로 제시되고 있다. 심판은 창조를 풀어해치는 일로 묘사된다.

사 34:11에서도  동일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이사야는 에돔의 파멸을 내다보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에돔을 멸망시킬 것을 예언하는 가운데 "여호와께서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에돔에 베푸실 것인즉" 이라고 말한다(사 34:11).  여기서 '줄과 추'는 건축자들이 건물을 지을 때 사용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이것을 반대로 사용하신다. 따라서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베푼다" 는 말은 에돔을 파괴하시겠다는 말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토후는 구약에서 자주 쓰이지 않은 단어이다. 따라서 그 용례들을 보면 이 단어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보후는 단독으로 사용된 경우가 없고 반드시 토후와 함께 나타난다). 신 32:10, 욥 6:18에서 이 단어는 광야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삼상 12:21에서 이 단어는 두번 사용되었는데, 문맥상 우상/우상 숭배를 가르키고 있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도는 '헌되다' 로 번역되어야 한다. 욥 26:7에서는 "하나님께서 차폰(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여기서 한글 개역 성경에서 '허공'으로 번역된 단어가 토후다. 토후는 빈 공각(NIV)로 적절히 번역될 수 있다. 이사야서 41:29, 44:9에서는 이 단어가 우상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런 곳에서 토후는 파괴된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이사야서의 여러 구절에 나타나는 이단어가, NIV에서는 ruined(24:10), false testiomy(29:21), nothing(40:23), empty(45:18), in vain945:19) 등, 여러 단어로 번역되었다.

결론적으로 토후와 보후는 질서가 없는 물질적 상태, 혹은 그 모습이나 모양이 어떤 실체로 형성되지 않은 물질적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의 한 연구는 호쉬크, 토후 보후 같은 단어가 하나님과 대립되는 카오스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소라고 주장한다. 시 89:11(히 12절), 삼상 2:8, 시 17:18(히 19절) 등에서 에레쯔는 지하세계를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지하세계를 다스리심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들은 토후와 보후를 근거로한 복구설의 주장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복구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또 자신들의 견해가 사탄의 내력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한다. 스코필드는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열국을 엎은 자여..."(사 14:12)라는 구절이 "이 세상에서 죄가 어덯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고 말한다. 창 3장에서 사단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갑자기 등장하는데, 이는 사단이 이미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이사야가 말한 사단의 타락이 창 1:2에 암시된 세상의 심판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 14:12를 사단과 연관시키는 견해는 유지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