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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회심 이전의 바울-1.다소:출생과 생장-①

예림의집 2009. 3. 17. 14:06

1.다소:출생과 생장

 

바울은 AD57년경에 제 3차 선교여행(AD 53-57, 행 18:23-21:17)을 마칠 무렵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오해를 받아 성전에서 체포되어 안토니아 요새의 책임자인 천부장 글라우디아 루시아 앞으로 끌려갔다. 천부장은 바울이 최근 난을 일으켜 광야로 간 애굽 인으로 생각하였다9행 21:38). 그러나 바울이 헬라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고서 바울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이때 바울은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행 21:39; 22:3)라고 대답하였다.

바울이 말한 대로 길리기아 다소는 "소읍이 아닌" 큰 도시이며 오래된 도시이다. 소아시아 남동부에 지중해와 접해 있는 길리기아는 폭이 30-40마일 가량되고 길이가 300마일 되는 길쭉하고 좁은 속주로 로마의 27개 속주 중의 하나이다. 타우루스 산맥과 지중해를 끼고 소아시아 동북 해안 지역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다소는 길리기아 속주의 수도이다. 현제 터기의 남동쪽에 있다. 다소는 고대에는 항구였고 배가 들어올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해안에서 약 16마일 가량 내륙으로 들어가 있다. 다소는 고대에 건설되어 적어도 6천년 동안 지속된 도시로 세계에서 제일 오래 되었다는 다메섹보다도 훨씩 오래된 도시이다. 신석기 시대인 BC 3,000년에 성벽을 쌓았고, BC 1200년경에 해양 민족의 침입으로 성이 파괴되었으나 헬라인들이 다시 건설하였다. BC 334년에 알렉산더가 침입하였으나 성의 파괴를 방지하고 헬라인들이 입주하여 헬라 도시로 만들었다. BC 83년 다소는 로마의 장군 폼페이가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로마의 수중에 들어가 '길리기아 속주의 수도' 가 되었는데 이 후로 다소는 로마제국의 '자유도시'(libera civitas, free sity)가 되었다(BC 67년). 자유도시가 가지고 있는 특권은 로마제국의 조세(국세)를 면세 받을 뿐 아니라 중앙 정부로부터 분리된 자치권을 행사하며, 로마 군대가 주둔하는 곳이 아니라 도시 자체의 군대를 소유할 수 있었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다소가 낳은 가장 저명한 인물 중에 한 사람인 그의 스승 아테노도루스에게 다소의 행정을 맡겼다. 아마도 이 때에 다소의 시민이 되어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500드라크마의 돈이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생겼을 것이다. 이 돈은 성인 노동자의 약 2년 치 수입에 해당하는 엄청난 돈이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만이 다소의 시민권자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유력한 재력가나 중류층 이상의 사람만이 이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으므로, 이 시민권을 소유했던 바울 가문의 경제적 배경이 중류 이상의 부유층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아울러 바울은 자신의 태생지인 다소에 대해 '소읍이 아닌' 곳으로 말하였으며 그리하여 다소는 AD 1세기 바울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바울이 사도행전 21장 39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다소가 중요한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다소는 대도시였다. 바울이 살았을 당시의 다소의 인구는 약 50만이었다. 바울 당시 로마가 약 100만의 인구를 가진 가장 큰 도시였으며 그 다음 알렉산드리아, 수리아의 안디옥, 다소가 각각 약 50만의 인구를 가졌으므로 요즘에 비한다면 다소는 대도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다소는 무역도시였다. 다소는 비옥한 평야가 있어 소출이 풍부하였으며, 특히 다소 산맥의 비탈에서 서식하는 흑염소 머리털에서 나오는 '길리기움'은 다소의 특산품이기도 하다. 이 길리기움을 재료로 하여 천말이나 배의 돛 등을 만들었다. 바울의 직업이 천막을 만드는 사람이었다는 것(행 18:3)은 다소의 측산물인 길리기움으로 천막을 만드는 것과 일치하기 때문에 아마도 바울은 천막 만드는 기술을 다소에서 배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의 생애의 연대기를 구성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이러한 사실은 통해서 우리는 바울이 다소에서 태어나 몇 살까지 살다가 랍비가 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공부하러 갔는가? 하는 연대기적인 문제를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육체노동을 신성시하였으며 지성적 탁월함과 육체 활동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가말리엘 2세는, "율법(Torah) 공부는 세상의 사업과 병행될 때 뛰어나며, 일(노동) 없는 율법은 결국 실패하며 죄를 초래한다" 고 하였다. 그리하여 유대인의 교육은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행동하는 사람을 생산하는데 주력했다. 유대인의 아버지들은 자신의 아들이 13세에 이르면 그때부터 약 2-3년 동안 자식이 가지고 있는 직업 기술을 가르쳤다. 바울도 이러한 통상적인 유대인들의 방식을 따랐다면 이 시기에 다소에서 그의 아버지로부터 천막(가죽) 만드는 기술을 익힌 후 10대 중반쯤인 15-16세정도가 되었을 때 율법을 공부하여 랍비가 되기 위해 다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나 초등 교육을 받고 청소년 시기까지 상당한 기간을 거주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바울의 유대교적 배경에 대한 반 우닉의 견해

그러나 네덜란드 출신의 반 우닉이라는 학자는 <바울의 어린 시절의 도시: 다소인가 예루살렘인가>라는 논문에서, 사도행전 22장 3절의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성(예루살렘)에서 자라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한 교육을 받았고" 라는 바울의 말에 근거하여 주장하기를, 바울이 아주 어렸을 때, 즉 5-6세 정도 되었을 때 그의 가족을 따라 다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실제로 다소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부터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교육 받았기 때문에 다소(헬레니즘)의 영향은 별로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특히 반 우닉의 논증은 사도행전 22장 3절의 ①...'났고', ②...'자라', ③...'교육을 받았다'는 세 개의 동사에 초점을 마추어, 바울을 대개 유대 소년들이 율법 공부를 시작하는 5-6세 즈음에 다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서 예루살렘에서 자랐으며 거기에서 율법 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반 우닉은 바울이 다소의 헬레니즘적인 배경보다 예루살렘의 유대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한편 바울이 엄연한 헬레니즘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반 우닉은 바울이 나중에 회심한 이후 다소에서 상당기가 거주할 때(행 9:30; 갈 1:21-24) 다소의 헬레니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하여튼 반 우닉의 눈지는 바울의 일차적인 배경이 헬레니즘이 아니라 유대교적인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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