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은 전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찬송은 단순히 신앙인의 정서를 위한 노래 정도로 알고 있었던 분들에게는 제 이야기가 아마 큰 충격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들은 사람 중에 두 가지 반응을 보이는데요. 첫 번째는 더 진지해고 신중하게 찬양을 대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반면 아예 입을 열지도 않는 분도 있습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제대로 여러분의 마음에 뿌려졌다는 징표인데요. 그로 인해 영적 몸살을 앓고 잇다는 증거입니다. 아무튼 찬송에 대한 인식이 매우 새로워 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제는 찬송하기가 약간 겁도 날 거구요. 그리고 한 가지 매우 큰 의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바로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찬송할 것인가?"
이 의문이 생긴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이 의문을 갖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여러분에게 보낸 이유고 바로 이것입니다. '제발 똑바로 알고 똑바로 나를 찬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이 모임에 대한 목적입니다. 찬송을 새롭게 알게 된 여러분에게 찬송하는 방법을 궁금하게 여기도록 하신 이는 바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성령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오늘 부터는 '어떻게 찬송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합니다. 제가 찬송의 의미를 바로 깨달았을 때 저에게도 동일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찬송하는 것이 좋을까?" 그래서 어느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찬송은 어떻게 불러야 하지요?" "네, 배에다 힘을 주고 배에서 나오는 소리로 부르십시오." 저의 질문은 그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잘 아는 교회음악과 교수한테 다시 자문을 구했습니다. 당시에는 찬양인도자나 예배인도자라는 진책이 거의 없을 때였으니까요. "교수님 어떻게 하면 찬송을 찬송답게 할 수 있을까요?" "어깨와 턱의 힘을 빼고 입을 타원형으로 벌려서......" 목사님과 교회음악과 교수의 한심스러운 대답을 들으면서 저는 문득 식성에 전혀 맞지 않은 반찬 때문에 식사 시간마다 곤욕을 겪어야 했던 지난 하숙생활이 떠올랐습니다. 분명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있을 텐데 그 분야의 전문가라 할 수 있는 분들의 입에서 전혀 엉뚱한 소리만 나오는 것을 보면서 저는 다시금 그 방법을 알기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수많은 밤을 새웠습니다. 어디서, 누군가에게 배울 수가 없기 때문에 기도하고, 성경보고, 기도하고, 성경보고를 끝도 없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흔히 우리는 무슨 일을 행할 때 하나님을 위해 한다는 말을 아주 쉽게 그리고 또 자주 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 방법을 하나님께 묻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때문에 목적은 좋은데 과정이 좋지 않고 그 열매 또한 엉뚱한 결과로 나타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저는 언제부터인가 이 말씀을 매일매일 묵상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말씀이 내 삶의 가늠자가 되고 때로는 브레이크가 되어 범사에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고 세속의 유혹을 단절시키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찬양집회, 세미나, 부흥회, 집회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에 항상 아버지께 물어봅니다. "이것이 찬송으로서 가치가 있습니까? 이번 집회 때 이 곡으로 찬송하고 싶은데 아버지께서 기뻐하실까요?" 왜냐하면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한 일이 아버지께 열납되지 않았다면 그보다 더 허무한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특별히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찬송이 그분께 기쁨을 드리지 못하는 결과로 끝난다면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찬송하기를 원하시는 걸까요?
6. 찬송은 전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찬송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면서 그 기준을 인류 성악가나 대중가요 가수들의 가창력에 두셨다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크게 낙심하여 찬송가를 폐기처분해야 할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성경에는 가창력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어느 수준을 요구하지도 않구요. 아울러 아름답게 불러야만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말씀은 눈을 씻고 봐도 없습니다. 우리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의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양할 때에 가창력 때문에 기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지금 다니는 신학교에서 방과 후 공부로 "음치탈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제 5명의 학생이 열심히 음치탈출(?)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첫날 한 말 중에 하나가 "우리는 하나님의 소중한 악기" 라는 말을 하면서 "무엇보다 우리에게 위안과 감사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운 목소리, 화려한 연주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찬양하는 우리의 모습 그 자체, 주님을 사랑하는 바로 그 마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내용은 그대로 저희 카페 ♣음치 탈출법♣ 코너에 실려 있습니다. 아울러 남보다 가창력이 좀 더 뛰어나다고 해서 우쭐댈 이유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찬송에 관한 하나님의 관심은 외형에 있지 않고 그 중심에 있으며 바로 그 열정의 농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교회는 어떤 찬송을 해왔을까요? 혹시 겉모양은 그럴 듯한데 전심으로 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지나 않았습니까? 비록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나 제가 처음 이 사역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찬송하는지 장송곡을 부르는지 도저히 분간하기 어려운 교회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잘못된 보수 신앙관 때문입니다. 여러분, 보수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왜곡시키지 않고 하나님 말씀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자칭 보수, 보수를 강조하는 교회들에서 웬일인지 찬송하는 것만큼은 비 성서적으로 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찬송을 제법 찬송답게 하는 교회를 향하여 이단, 삼단 운운하던 시절이 불과 지금으로 부터 15여년 전의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도 다 오후예배를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던 방식 데로 '열린 예배'로 드리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냥 형식만 따갔는지도 모릅니다. 철저한 회개와 반성 없이......
한번은 제가 어느 지방 도시에 찬송 세미나를 인도하러 갔을 때 일입니다. 그 교회는 그 지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교세를 자랑했고 보수적이기로 소문난 교회였는데 아닌게 아니라 안내를 맡은 장로님의 입에서 계속해서 보수 타령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수천만 원 주고 구입한 오르간 자랑이 대단했습니다. 과연 장로님이 자랑한데로 오르간 연주소리가 성전을 진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천여 명의 성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메세지 서두에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붕어들입니까? 왜 입은 벌리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지요? 하나님이 과연 이 오르간 소리를 듣자고 이 전에 임하셨겠습니까? 생명 없는 이따위 악기에게 여러분의 사명을 위임해 버렸습니까? 어느 장로님이 저에게 보수, 보수 강조했는데 과연 이 모습이 보수적인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말하는 보수는 똥물보다 못한 것 아닙니까?"
교인들이 얼굴들이 급격히 홍조를 띠며, 진짜 똥물로 변해 갔습니다. 먼저 그 장로님은 씩씩대기까지 하더군요. 여러분 제가 너무 심한 말을 한 것일까요? 천만에요. 아마 하나님은 통쾌해 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보수를 가장 불신앙이요, 아직도 중병을 앓고 있는 자신의 심령 상태를 자가 진단하여 겉으로 들어 낸 것에 불과합니다. 앞은 상처를 제가 건드렸으니 그들이 당황하고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치료를 위해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근대사 속에서 우리 선배들은 일제치하와 6.25를 겪고 보릿고개를 넘어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이너적 즉 우울하고 슬픈 감정이 정서의 근간으로 심령 깊숙이 깔려 있음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정서가 원래는 그렇지 않았었는데 금세기에 접어들어 듣지 말고 보지 말았어야 할 일들을 수없이 경험하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찬송을 해도 꼭 탄식하듯 하고 기도를 해도 울부짖어야만 되는 것으로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 원래 민족 정서가 그러니 어쩔 수 없노라고 아예 당연시해 버리는 잘못된 가치관이 교계에 지배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분들의 심령까지도 과거 그 부분에 대해서만은 내적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구요? 간단합니다. 무심코 내뱉는 일본에 대한 감정 표현들을 보십시오. 항상 독이 들어 있습니다. 냉철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경기이거나 일본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면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어떻게 하든지 이겨야만 한다고 아우성들입니다. 선의의 경쟁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증오하는 마음으로 쓰러뜨리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6.25가 그렇고 광주사태가 그렇고 양분된 경상도와 전라도의 보이지 않는 인의 장막이 그렇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그 사건들은 아직도 계속해서 상처로 남아 있고 그 상처에서는 쓴물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아직도 치유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혹시 내게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 너무 쉽게 말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네 과연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한국교계의 사랑의 대표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의 경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과연 그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 엄청난 비극의 원인 제공자를 사랑으로 끌어안게 하였냐 그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 이었다구요? 그렇다면 지금은 예수님의 사랑이 모두 고갈되어 이 모양이란 말입니까? 그분의 경우 분명한 것은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비록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은 분명하다 해도 아직까지 마음속에 치유되지 않은 과거사 때문에 정서적으로 눌려 있음이 분명합니다.
아울러 전심으로 찬송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교문화 사상의 잔재입니다. 오랫동안 이 나라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유교사상의 잔재가 아직도 대부분의 기성세대들에게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 가치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찬송행위, 즉 성서적인 찬송의 방법이 오히려 유치해 보이고 경망스럽게 느껴져서 아무 쓸데없는 절제의 브레이크를 스스로 걸어왔던 것입니다.
거기다 음악적이 요인까지 겹쳐있습니다. 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집고 넘어갑니다. 무슨 뜻이냐면, 찬송가는 서양 음계로 작곡되었습니다. 성양 사람들의 정서에 맞춰졌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세계화에 따라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적지 않게 이런 문화적 차이가 적용됩니다. 그리고 4부을 위한 편곡 때문에 대부분의 멜로디 음이 너무 높습니다. 아마 한국사람 대다수는 멜로디 음 높이에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야 별 문제가 없겠으나 장년들에게는 이것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회 때는 대부분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쓰게 됩니다. 이 문제는 지휘자나 반주자가 조금만 지혜를 가지면 해결 가능한 일인데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습니다. 회중 찬송을 할 때 음이 높은 곡은 그 음을 2도 정도만 낮춰서 반주 하시면 장년층이 찬송하는데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새벽 기도회 때는 더 말할 것도 없구요. 아무튼 이런 몇 가지 요인 때문에 그동안 수많은 교회의 찬송이 침체되어 왔고 그것이 보수적인 신앙 행위로 미화되기까지 했으나 결코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만한 행위가 아니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이제는 속히 개선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집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요즘 많은 교회에서 오후예배를 열린 예배로 드리고, 창양단도 만들고, 찬송가 이외의 곡들도 예배 때 사용하는 등 찬양의 모습들이 좋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의 찬양의 의무를 성가대에게, 찬양단에게 떠넘기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찬양이 활성화 되었다고 하는 교회들을 막상 방문해 보면 그것은 실력(?)있는 또는 유명한 CCM가수가 있거나 찬양단이 잘 조직되어 있는 교회들일 뿐, 실상 성도 자신들은 찬양생활을 하지 않는 곳이 많습니다. 찬양예배 시간에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열정적으로 전심으로 찬양하지만 그 시간이 끝나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는 모습들을 종종 발견하곤 합니다. 제가 지난 10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많은 찬양팀을 세웠지만 그것은 그들이 예배를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결코 그들이 여러분의 찬양을 대신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 행위 즉 예배, 기도, 찬양, 감사, 헌신.... 등은 모두 하나님과 여러분 개개인의 일대일 관계입니다. 누가 대신해 주거나 대표해 주는 것이 절대로 아님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들의 친절한 찬송교사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오리니(시 86:12)"
전심의 상태가 과연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는 모세를 통한 가르침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섬김에 관한 한 기본 강령이요, 찬송할 때 절대 요소입니다. 예수님을 이 말씀을 인용하여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했습니다(마 22:37,38). 그럼 어떻게 해야 전심으로 찬송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체험하고 그것을 항상 기억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누가복음 19장 37절에 보면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죄악에서 건져내어 영생의 반열에 세워주신 그 놀라운 은혜와 항상 태양이 작열하듯 쏟아지는 축복을 바라보면 전심으로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15년 전 제가 이 길로 처음 들어 설 때에 많은 사람들 가족, 친지, 벗, 선배들, 같은 신학생들도 나를 이상(?)하게 여기고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기까지 했습니다. 기도 잘못해서 미친 줄 알았습니다. 그 당시 제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미친 것이 아니다. 다만,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고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들은 것뿐이다. 내가 나아갈 길을 확실히 찾았고 그래서 그 길을 출발하는 것뿐이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맞이하여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라고 찬송했던 것처럼 사실 체험적인 신앙의 소유자들에게서는 항상 감격적인 찬송이 넘쳐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누가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줬기 때문이 아니라 반사적인 신앙행위로써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디서나 찬양단을 모집할 때에 먼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구원받았는가를 물어봅니다. 그리고 나서 그렇다면 그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가창 실력은 여러분 자신보다 내가, 그리고 하나님이 더 잘 아시니까 굳이 어느 CCM가수 흉내나 내지 말고 진정한 구원의 기쁨을 마음껏 노래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그런 마음 자세를 기뻐 받으시고 아울러 그렇게 하는 가운데 제가 모든 단원의 조화를 이루도록 하겠노라고 말하면 그동안 기가 죽어 제대로 찬양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금방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결코 뛰어난 가창력이 아닙니다. 구원의 열정, 그 감격을 보자는 것입니다. 기쁨의 고백을 듣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구원의 기쁨을 장송곡 하듯이 하겠습니까?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시 138: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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