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은 서원과 결단의 고백입니다.
자, 이제 찬송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 마지막 정의를 내려야 할 순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찬송이 문자적인 해석에서부터 선교 적 의미까지 상당히 포괄적으로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매일 부르고 내 평생 불러야 할 이 노래가 내 자신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며 정리합시다. 그 답이 바로 이번 글의 주제입니다. 우리가 매일 부르는 찬송의 내용은 정말 대단합니다. 대게 진실한 신앙의 고백이요, 뜨거운 선교의 열정에서 작시, 작곡되었음을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대문에 찬송을 하다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흐르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찬송을 많이 하다 보면 그 어떤 상황보다도 더 감동적인 내용의 곡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저를 돌아보아도 찬양할 때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찬송하는 소리만 들어보면 이 땅 위에 사도 바울이 수백만이요, 베드로, 야고보가 그렇게도 많은데 생활 속에서는 좀처럼 신앙의 거인을 만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와 총선 때 많은 후보들이 아무데서나 내뱉는 허무맹랑한 선거공약을 들으면서 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구요? 생각해 보십시오. 국민이 모두 잘살게 하는 것이 지도자의 목표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국민이 행복하게 잘 살도록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게 안 되니까 항상 애를 태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후보들은 자신이 집권하기만 하면 2~3년 내에 1인당 국민 소들을 2만 달러 이상으로 끌어 올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또 다른 후보는 자신이 집권하면 아파트 분양가를 지금의 절반 시세로 낮추도록 하겠다고 큰 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공약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대다수의 국민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런 정치가들을 쉽게 판단하고 비난의 화살을 마구 쏘아댑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성도인 저와 여러분이 정치가들을 판단하고 비난할 만한 도덕, 윤리, 믿음의 신의를 과연 지키고 있는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과연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앞에서 오리는 분명 찬송이 예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물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지요. 모두가 다 기억해 둘 신앙의 고백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삶은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들 입술에 있는 찬송과 우리의 삶에는 얼마만큼의 괴리가 있는가 말입니다. 초대교회에 보낸 주님의 메시지를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의 행위를 아시는 주님이 오늘 우리들의 행위를 보실 때 과연 찬송으로 여길 만한 삶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같은 수준의 인간들을 잠시 기만했을 뿐이지만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을 너무 많이 기만했고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 왔기 때문입니다. 혹 이 자리에 계신 분 가운데 지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분도 잇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몇 공이 찬송을 예로 들어 봅시다.
만입이 내게 있으면(찬송가 23장)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 하겠네'
이 찬송은 청소년층 보다 장년들이 더 많이 부르는 곡입니다. 설령 입이 만 개가 있다 할지라도 그 입으로 죄를 짓거나 망령을 부리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찬송하는데 쓰겠다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루 우리들의 입술에서는 과연 찬송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만 개는 커녕 한 입을 가지고서도 주님을 찬송하고 덕을 세우기보다는 저속한 언어로 얼마나 몸과 마음을 더럽혔는가? 돌이켜 보시길 바랍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찬송가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귀한 그 말씀 진실로 생명의 말씀이
나의 길과 믿음 밝히 보여 주니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참으로 아름다운 찬송입니다. 이 시대에 활자화된 말씀이 없었다면 인류가 어떻게 되었을가를 생각할 때 성경에 대한 소중함을 더 느끼게 되고 아울러 말씀을 자유롭게 대할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찬송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달고 오묘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성경읽기를 싫어하는지 저는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마치 방송 모니터라도 되는 긋 TV는 매일 일삼아 보면서 성경 한 장 읽지 않고 하루해를 보내는 주부들이 그 얼마며, 신문은 그토록 즐겨 읽으면서도 말씀 한 구절을 묵상하지 않은 채 한 주간을 보내는 가장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입니다. 우리가 매일 신문을 읽듯이 성경을 보면 한 달에 성경을 1독을 할 수 잇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백성들을 어리석음의 골짜기로 몰아넣고 성도들의 심령을 흐리게 하는 스포츠 신문의 크리스천 독자들이 그 신문을 거부하고 그 손에 성경을 들고 다닌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달라질까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을 보면, 예배는 비교적 열심인데 정작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인 힘이 없고 깊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에게 오는 성도들에게 늘 권면 합니다. "제발, 기본적으로 성경 3독만이라도 하십시오." "제발, 하루에 한 구절씩은 암송해 보세요." 그러나 여기서 우리 모두가 명심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생활을 온전히 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자기 나이만큼은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나이 만큼이라는 말에 미리 겁먹지 마십시오. TV시청 시간을 대폭 줄이고 잡스런 글을 읽지 않으며 부질없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면 충분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영적으로 만난 후 처음 3년간은 매년 3독 이상씩 성경을 읽었습니다. 제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후 매면 1동 이상씩 하고 있는데 바로 그것이 시편 119편의 내용처럼 믿음과 지혜와 영감의 근원이 되어 주님의 일을 하는데 이탈하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 또 다른 찬송을 살 볼까요?
내 기도하는 그 시간(찬송가 364장)
사실 예배드리는 것만큼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예배당 건물의 대형화에 비해 저녁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의 숫자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이제는 많은 교회들이 저녁예배 자체를 포기하고 성도들의 편의에 따라 오후에 예배를 드리지요. 어는 주일 낮 예배에 오천 명 모인다고 자랑하는 교회의 저녁예배는 오후예배 때는 그 십분의 일도 채 안 되는 것을 보면서 기도하는 시간이 즐겁다고 노래하면서도 세상 일락에 노예처럼 사로잡혀 영적으로 신음하고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만 합니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찬송가 450장)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몇 년 전 제가 대구의 어는 교회 청년회 지도교사로 있을 때입니다. 마침 연말이 되어 그 다음 해의 임원 선출을 위해 청년들이 모였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서로 임원을 하지 않겠노라고 발뺌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다 못해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찬송을 서너 번 반복해서 부르게 했습니다. 이윽고 찬송이 끝난 후 임원으로 권유받았던 몇몇 청년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찬송을 부른 소감이 어떻습니까?" "네 은혜스럽습니다. 언제 불러도 은혜가 됩니다." 제가 고함을 질렀습니다.(아마도 광야에서 폐역 했던 모세의 진도가 이것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이런 양심에 화인 맞은 인간들! 지금 당신들이 뭐라고 고백한지 아십니까? 내 평생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의 일 하는 것이 그렇게 소원이라면서 청년회 임원을 하지 않겠다니 주님을 우롱해도 유분수지 도대체 이것이 무슨 짓들이란 말입니까?" 혹시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습니까? 주님의 일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노래하고서도 항상 뒷전에서 맴돌고 있지 않는가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국민 찬양이라고 할 수 있는 찬송가 323장을 보겠습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찬송가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저는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주님의 두 가지 표정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감격의 표정. 또 하나는 슬픔의 표정입니다. 왜냐구요? 사실 어느 찬송인들 주님이 귀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만 특별히 이 찬송은 그 헌신의 깊이가 더 하고 사랑의 농도가 진해 이 곡을 부르는 제 자신의 가슴도 뜨겁거늘 하물며 그것을 듣는 주님의 마음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이거야말로 사도 바울이나 할 수 있었던 고백이요, 주를 위해 꺼꾸로 십자가에 달린 베드로나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한국 성도들은 이 찬송을 모두 즐겨 부르고 있습니다. 아마 한국 교회에서 즐겨 부르는 찬송 베스트 10곡을 뽑으라면 이 찬송은 언제나 그 순위에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찬송은 찬송하는 그 순간 만큼은 한국 성도들의 신앙고백을 사도 바울의 수준으로 끌어 올린 셈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기뻐하시다가 이내 슬퍼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와 관련하여 제가 여러 지체들과 같이 찬양사역을 하면서 경험했던 몇 가지 예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한번은 어느 교회 초청으로 울산에서 경주까지 가서 집회를 했는데 저녁 10시 30분쯤 집회가 끝나 돌아오려고 할 때에 한 지체가 제게 다가와 "선생님, 이렇게 멀리 그리고 늦게까지 사역을 하시면 저는 더 이상 계속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밤늦게 집에 돌아갈 일 때문에 걱정하는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 그가 하던 고백과 그 순간 그가 하는 말이 너무나 괴리가 깊어 제가 물었습니다. "찬송가 323장 부를 줄 아니?" "그럼요! 제가 얼마나 좋아 한다구요." "그래? 그렇다면 그 내용 가운데 2절에서 '복음 들고 어디든 가오리다.'라고 했는데 그 어디라는 것이 네게는 과연 어디까지지?" 그는 더 이상 말을 못했습니다. "그래 좋다.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 그 대신 오늘 집에 돌아가면서 문구점에 들러 잘 드는 칼 하나 사가지고 가렴. 그걸 가지고 네 신앙의 양심에 거슬리는 찬송은 모두 잘라 버려야 한다....."
또 한번은 부산에서 사역할 때에 일입니다. 부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느 지방 도시에 집회를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데 어는 자매의 어머니가 저에게 항의 전화를 했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멀리까지 데리고 다니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곳이 멀다구요? 그렇다면 댁의 따님은 나중에 신혼여행도 태종대나 송도 같은 곳으로 보내시겠습니까?" "선생님은 농담도 잘 하시네요. 어떻게 신혼여행을 그런 데로 보낸다는 말입니까?" "왜요, 너무 멀어서인가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광한리나 해운대로 보내시면 되겠군요." "아이 참 무슨 말이세요? 외국은 못 갈 망정 제주도는 가야지 신혼여행을 그런대로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래요? 그렇게 먼 제주도까지 신혼여행을 보내요? 배도 타고 가야 할 텐데요.....?"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실례지만 거듭나셨나요?" "예 거듭났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왔기에 복음을 전하러 가는 길은 1시간 거리도 천리, 만리로 생각하고 그토록 수선을 떨고 신혼여행이나 수학여행은 외국으로 못 보내서 안달이라는 말입니까? 도대체 삶의 기준을 복음에 두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속에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너무 빡빡한 거 같습니까? 남의 이야기라고 웃을 수 있습니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라고 큰 소리쳐 외치지만 한번 전해보고 듣지 않으면 속으로 지옥이나 가라고 미워하지는 않았는가 말입니다. 심지어는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람들이 과연 내 이웃, 내 직장 동료들의 마음을 몇 번이나 두드려 봤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혹시 지하철에서 소리 높여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만나면 인상을 찌푸리거나 고개 돌려 외면해 버리는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은 아닙니까? 함께 찬양을 하면서 우리 모두가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주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삶을 가사의 내용과 비교해 봅시다. 삶의 모든 가치와 기준, 그리고 그 쓰임들이 과연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찬송가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찬송과 생활은 일치해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찬송가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찬송하는 사람, 찬송하는 삶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부디 찬송은 여러분들의 사명임을 명심하십시오. 결코 취미이거나 선택사항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울러 찬송이야말로 믿음의 꽃이요, 가늠자요, 확증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아무리 믿음이 좋기로 소문난 사람도 시험 중에 찬송하지 못하면 그 믿음의 본질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찬송이 예물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예물은 예물답게 항상 정성을 다해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드리는 대상을 제발 혼동하지 마십시오. 또한 찬송은 복음의 나팔입니다. 찬송의 선교 적 의미 그 가치가 대단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 선교하기 위해 찬송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끝으로, 찬송은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이자 결단의 고백입니다. 서원과 결단은 항상 신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기 위해 주님의 은혜를 더 많이 간구하고 스스로 낮아져야 함은 말할 것도 없구요. 이제 우리에게는 찬송은 더 이상 종교 음악이 될 수 없습니다. 부를 때 마다 새롭고, 부를 때 마다 뜨겁고, 부를 때 마다 축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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