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자신과 가까운 만남을 가지길 원하신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의 말씀과 삶과 죽음은 그 전능자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새로운 초대였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분은 제자들에게 하늘 아버지와 친밀하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배웠던 모든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면서, 그들이 이제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말씀하셨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기억하며 이렇게 초대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박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종종 우리는 이 구절을 복음 전도에 사용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은 이미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분은 더 대단한 친밀함 속으로 자기 백성들을 초대하고 계신다.
여기서 '먹는다' 는 단어는 그리스어 명사 '데이프논'(deipnon)에서 유래했는데, 하루에 먹는 주요 식사를 의미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함께 모여 앉아 서로 양질의 시간을 보내는 저녁 식사였다. 그 문화에서 이런 식사를 하는 이유는 교제이지 단지 음식이 아니었다. 이것은 서둘러 해치우는 행사가 아니라, 당신이 얼마 동안 앉아 함께 식사하면서 상대방을 알아 가는 그런 행사였다. 예수님은 실제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나로 너의 삶에 더 깊이 들어가게 해라. 나는 너에게 가서 너와 함께 먹고 너와 가까워지기를 원한다. 나는 내가 먹을 때 나를 섬기고 식탁에서 그저 시중이나 들라고 너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와 함께 앉아서 먹자고, 우리를 위해 함께 먹자고 너를 부르고 있다."
그분은 요한게시록 1장에서 불타는 눈과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처럼 빛나는 얼굴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 바로 그 예수님이시다.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둘이서 동등하게 식사를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식탁 아래서 부스러기를 주워 모아야 할 정도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그 식탁의 아름다움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초대는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다. 이 땅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또는 어디까지 은하계의 별들은 가득 차 있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을 때 황홀하기 보다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 자신과 친해지도록 나를 초대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시려고 기꺼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이 신비에 훨씬 더 사로잡혀 있다.
서로 경쟁하는 것과는 달리, 친밀함과 경외는 나란히 손을 잡고 간다. 성경은 우리에게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시 25:14)라고 말한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우정을 만나면, 이 신비가 정말로 최고조에 달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나처럼 누군가에게 그분의 영원한 팔에 안기라고 손짓하는 일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요한계시록 1장은 우리에게 친밀함이 경외와 만나는 힘있는 모습을 제시한다. 사도 요한은 주님과 놀라운 대면을 했다. 16절에서 예수님은 오른손에 일곱 별을 지니신 장엄한 존재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바로 그 오른손을 요한에게 대시며 위로하시는 말을 듣게 된다. 이것은 두렵지만 또 친밀한 모습이다. 윌리암 버클레이는 이것을 완전하게 요약한다. "예수님의 손은 하늘을 지탱할 만큼 강하고,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실 만큼 부드럽다."
친밀함과 경외의 이 융합은 욥의 삶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하나님의 '타자성'(otherness)에 관한 것을 경배자가 어떻게 알아 가는지에 대한 흥미 있는 사례 연구이다. 가혹한 고난을 당하자 욥은 "하나님의 우정이 내(욥의) 장막 위에 있었던"(욥 29:4) 날들을 갈망하며 되돌아보았다. 그는 주님의 우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련이 끝날 때, 욥은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하나니므이 능력과 위대한 측면들은 결코 전에는 정말 욥이 인식하지 못했던 수건을 벗게 했다. 욥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하나님의 계시는 바로 그의 마음속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전보다 더욱 전능자의 경이로움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욥의 삶을 처음보다 나중에 더 복 주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가족과 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친밀한 우정이 풍성하게 회복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욥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과 우정의 증가량을 알게 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는 하나님의 계시로 변화된 사람이었다.
몇 년 전에 나는 여왕과 찰스 황태자가 주관하는 행사에 버킹엄군에 초대를 받았다. 내가 거기에 갈 만한 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 친구가 두명의 젊은 그리스도인을 지명하도록 되어 있었고, 그것을 나에게 보낸 것은 정말 웃긴 일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런 거대한 행사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청바지를 즐겨 입는' 사람이며, 정장이 한 벌밖에 없으니, 품위 있는 바지를 입고 있는 나를 보기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 내가 여왕을 만날 준비를 한다는 것은 거의 아침마다 늘 하는 '이 티셔츠는 깨끗한가?' 보다 좀더 신경 써야 한다는 의미임을 나는 알았다. 나는 예의 바르게 나 자신을 준비히켜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단정한 옷차림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준비해야 하겠는가? 우리가 매 주일마다 가장 단정한 옷을 입고 가자는 말은 아니다(당신이 이것을 좋아한다면, 환상적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능자께 나아갈 때 좀더 신경을 써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우주의 창조주는 그분과 친해지도록 문을 활짝 여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결코 당연한게 아니라고 확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친밀한 대화가 제대로 이뤄지면, 우리는 우리가 다가가고 있는 분이 누구인지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전도서 기자는 이 사실을 매우 완벽하게 언급했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가"(전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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