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현대신학

수건을 벗은 에배자

예림의집 2008. 11. 23. 21:15

출애굽 34장 마지막에 모세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능력 있는 만남을 가진 후 시내산을 내려온다. 모세는 믿을 수 없는 계시의 차원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깊이 들어가 그의 얼굴은 실재로 빛나고 있었따. 사실 너무나 빛나서 사람들은 그를 처다보기도 두려웠다. 그때부터 모세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려고 수건을 둘렀다.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었다."(34절)

그가 하나님을 만나러 갔을 때, 아무것도 심지어 한 겹의 천도 그가 하나님을 응시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통찰력을 준다. 하나님의 깊은 계시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변화이다. 그리고 계시가 크면 클수록 변화도 크다. 경배를 드리며 수건을 벗고 하나님 앞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간 모세도 변화된 에배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났다.

 

신약은 우리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우리도 수건을 벗은 예배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하나님은 우리가 경배할 때 믿을 수 없는 대단한 장소로 우리를 초대하셨다. 어떤 의미에서 전능자는 자신을 누군가에게 드러낼 필요가 없다. 그분은 능력과 거룩으로 빛나게 타오르는 소멸하는 불이다. 게다가 그분은 더 깊은 영광의 차원으로 우리 각자를 인도하시고자 갈망하면서,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는 불타는 마음을 갖고 계신다. 더 깊은 영광의 차원은 우리가 그분의 형상으로 훨신 더 변화되는 곳이다. 언젠가 누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보는 대로 된다."

 

내가 일곱 살이었을 때, 우리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어느 날 아빠는 우리와 함께 계셨고, 그 다음 날 사라졌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나는 실제로 아빠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발견은 내게 새로운 고통과 질문들을 안겨 주었다. 그것은 내 잘못이었는가? 아빠는 계속 살아갈 정도로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는가? 엄마는 재혼했고, 처음에는 아버지를 갖게 될 또 다른 기회처럼 보였지만, 곧 불쾌했다. 새 아빠는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고 나서 떠나 버렸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들 속에서, 나의 상황에 하나님이 계셨다. 시편은 우리에게 그분이 '고아들의 아버지' 라고 말하며, 내가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면서 나는 하늘 아버지의 품에서 치유를 받았다. 이것이 일어난 것은 바로 경배를 드리던 때였다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가끔 아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울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보면,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과거의 고통스런 상처들을 제거하고 계셨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치유 받으려고 가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으셨기 때문에 갔다. 그러나 당신을 결코 참된 수여자인 하나님에게 명령을 내랄 수 없다. 나는 거기에 있는 동안 내내 내가 그분에게서 무언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분의 자비로 또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다! 나는 주님의 임재 앞에서 변화된 존재로서 수건을 벗은 예배자가 되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나는 좀더 완전하게 더욱 그분과 같이 되어 산에서 내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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