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구원이란 무엇인가?
[제출자] 김정민 20081005 신학과
<요약>
1.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이유
구원이란 포괄적인 개념으로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거짓, 불의, 증오, 개인적인 결핍이나 아픔 이웃과의 갈등, 사회적, 국가적, 국제적, 차원의 갈등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는 악과 고난에 둘러싸이고 짓눌려 있다. 이런 악과 고난들은 죽음의 증상들로 대개 인간이 겪는 최대의 악이요 고난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죽음’(롬 6:23)이라고 말한다. 죽음은 죄의 대가로서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 꼭 죽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죄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죄를 지으면 죽음이 주어지는가? 죄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옳지 않은 태도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생명의 영위를 위해 창조주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태도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태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의존은 곧 그분에 대한 순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의존과 순종의 관계일 때 인간은 그분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죄’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인간의 올바른 태도를 버린 결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한데 있다.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의 발로의 결과이며 자기 속에 내재한 자원으로 자기의 생명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환상 가운데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것을 속박의 상태로 인식하고, 자기 멋대로 자기 멋대로 살고자 하나님께 자기를 주장하고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행위이다. 인간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 무한한 힘, 무한한 사랑, 영원 등 무한한 자원을 공급받아 그 자원에 의존하여 살 수 있는 존재로서의 활로를 끊고 스스로에게 닫아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자기 속에 내재한 극도로 제한된 자원에 갇히게 된다. 인간은 제한된 존재이기에 늙고 병들고 죽는 고난을 겪게 되고, 지혜가 제한되었기에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불안과 근심에 사로잡힌다. 힘이 제한되었기에 좌절과 실패와 결핍을 맛보며, 사랑이 제한되었기에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 속에서 고통을 당한다. 사실 죄는 삼중적인 소외를 가져온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 이웃으로부터의 소외, 그리고 진정한 자아로부터의 소외를 가져온다. 인간의 본질은 피조물이다. 인간의 진정한 실존은 창조주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관계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아이다. 자기주장을 하게 되면 자아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린다. 죄에는 두 가지 죄가 있다. 원죄와 실행 죄 이다. 자기를 하나님으로부터 닫아 버리는 것이 원죄라면 원죄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의 죄를 실행 죄라고 볼 수 있다. 실행 죄에는 생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죄, 말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죄, 행동으로 나타나는 죄 등이 있다. 생각에서 말로 그리고 행동으로 죄가 발달할수록 파괴력이 크다.
2.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인간은 100년이라는 짧은 세월을 마치면 죽고 만다. 죄 때문에 일어나는 불안, 증오, 상처라든가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 모든 악과 고난은 죽음의 그림자라고 볼 수 있으며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은 사실상 이미 죽은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자원으로 생명과 행복을 추구하고 영위할 수 있다면 구원 받아야할 아무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악과 고난이 발생하고, 또한 그 악과 고난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이유 곧 구원받아야할 이유가 있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고 환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내재된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밖에 있고 우주 밖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힘이 와야 한다. 즉 오직 은혜로 올 때 우리 인간에게 구원이 이루어진다. ‘복음’은 바로 이러한 제한된 자원 속에서 죽어 가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위하여 오셔서 구원을 이루셨다는 ‘기쁜 소식’이다.
3.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구원의 사건이다
우리는 “예수는 구원자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선포를 많이 듣는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이 말씀은 구약의 두 예언을 반영하고 있다. 다니엘 7장13절 이하와 이사야 53이이다. “인자라고 번역된 것은 다니엘서를 반영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러 왔다“고 기록된 것은 이사야서를 반영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나 이사야를 통해 새 언약을 세워, 종말 때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고 의지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새 백성을 창조할 것을 예언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도록 하겠다고 하셨다. 그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 왔다”라고 했다. 다윗과 같은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될 것을 기대했던 예수님이 기대와는 정반대로 사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활이 일어났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옳았음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부활은 동시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십자가와 부활은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십자가를 설명하고 부활은 십자가가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죄악을 이용해서 자기의 뜻을 이루셨다. 그래서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경륜이 끝나고 그럼으로써 동시에 옛 언약이 끝나고 다른 한편 바로 그 순간에 새로운 언약의 피 흘림이 일어남으로써 새로운 하나님 백성의 중심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일어났다고 선포하고 그것을 복음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부활은 자연적인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만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 나에게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불교나 이슬람교 힌두교 같은 기타 다른 종교들의 모든 사건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인간의 사건임을 뜻하기도 하다.
4. 예수의 구속적 죽음에 대한 해석의 성경적 범주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십자가에서 일어났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속죄 적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보시지 않도록 피로 덮어 버리는 것이다. 또 하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 죄를 위해 우리 대신 죄의 저주를 받으셨구나!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 대신 받으셨구나! 라고 깨닫게 된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덮고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버린 결과로 일어난 것이 화해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더 이상 갈등하지 않는 관계를 갖게 된 이다 곧 친구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에 대한 몸값을 치른 것입니다. 죄의 노예 된 우리의 대가를 예수께서 지불하고 사셔서 우리를 죄와 사탄과 율법과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셨다. 이 구속의 결과가 무엇인가? 자유이다. 우리가 자유를 얻게 되었다. 새 언약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우리 것으로 누리는 특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의 구원의 주관적 적용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믿음으로 받는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이루신 구원이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믿음이 이 구원을 받는 꼭 필요한 수단이라는 의미에서 조건이다. 그러면 믿음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우리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 사건을 덕 입을 수 있는가? 믿음의 요소에는 첫째로 앎의 요소, 둘째로 의지하는 요소, 셋째로 순종하는 요소, 넷째로 소망하는 요소, 다섯째로 두려워하는 요소 등이 있다고 한다. 믿음의 본질적 의미는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선포된 복음이 무엇인가? “ 예수가 주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기독론 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고 구원론 적으로도 말할 수 있다. 이 믿음의 내용을 극으로 표시한 것이 바로 세례다. 물 혹은 물에 빠짐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장사 지낸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물에서 다시 나옴은 깨끗이 씻긴 새로 창조된 하나님의 아들로 부활함을 상징한다. 세례는 믿는 자가 되어 가는 과정의 종결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세례 후에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믿은 자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이 나의 순종이 된다. 이것이 곧 주관적 구원 사건이다.
6. 구원 종말론적 구조
구원에는 세 가지 시제가 있다고 한다. 구원의 과거, 구원의 현재, 구원의 미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는 사탄이 쓸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인 죽음을 꺽은 사건이다. 예수님이 사탄을 이기셨다 승리하셨다. 그리하여 예수가 주라는 선포가 울려 퍼지게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로 사탄은 등뼈가 부러졌다. 그러면 이와 같이 등뼈가 부러진 사탄은 언제 꼼짝 못하게 되는가? 예수님의 재림 때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사탄을 당신의 발등상으로 삼는다고 하셨다. 그때 사탄의 사지에 힘이 빠져 우리의 구원은 완성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구원의 첫 열매는 받고 아직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는 자로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다. 이것이 곧 구원이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사탄을 주라 고백하지 않으며 이 세상의 도 곧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리고 예수님이 주이신 것과 그분의 뜻대로 살 것을 고백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 이것이 곧 회개요 구원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와 인생의 무가치와 허무감에서 해방되어 기쁨과 평화와 앞을 바라보는 소망이 생긴다. 그러므로 구원의 첫 열매가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와 소망을 주지만 그 자체가 구원을 받았다는 궁극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께 대한 의존은 순종으로 표현된다. 새로운 하나님의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그런 윤리가 없는 믿음은 곧 거짓 의존이며 거짓 믿음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의 삶의 고난은 자기 주장하려는 옛사람 곧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옛사람이 실제로 죽어 가는 과정이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다른 말로 하면 이 악한 세상에서 이 세상의 정신과 그 가치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라고 할 수 있다. 옛 아담적인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죽음이 실제 생활에서 실재 화 되어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고난이다 이것이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내포되어 부활한 나의 새로운 삶이 마찬가지로 실재 화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영광된 형상을 되찾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은 제자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것을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화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구원의 현재이다. 구언의 현재는 이미 과거에 구원을 받은 우리가 현재에 의인으로서 스스로를 재확인하는 즉 이 세상의 가치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천명하고 고난을 받으며 십자가에 죽은 자기 주장하는 옛사람이 실제로 죽어가는 과정이다. 종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이 성화의 과정 곧 십자가를 지고 옛 사람이 죽어 가며 새로운 사람이 날로 새롭게 되어 가는 과정이 종결지어질 것이다. 그때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완전히 참예하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의 영광된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할 것이다. 이것이 성화다. 이것이 구원의 미래이다. 아직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즉 구원이 완성되기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히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벌써 아빠라고 부른다. 지혜가 없어 불안할 때 하나님께 아빠 아버지라고 기도하면 지혜를 얻고 능력이 없어 두려울 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아버지께 맡기고 기도할 수 있다. 이것이 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자로서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다.
7. 예정과 지키심
예정은 태초를 논하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논할 때 태초라는 시점에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 사건부터 논해야 한다. 예정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올바른 관점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예정 교리는 역사의 중심에서부터 논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곧 구약의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계시에 대한 준비 계시였다. 그래서 그 구약의 게시는 그 불빛이 그다지 환하지 않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게시에 대한 그림자였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곧 신약의 사도들의 선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를 선포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의 게시 곧 그리스도의 사건은 역사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미래도 그리스도 계시의 불빛 아래서 보아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완전히 계시 하셨고 그리스도 안의 계시의 불빛이 가장 환하기 때문이다. 태초와 종말에 관한 계시의 불빛은 인간의 죄에 의해 가려지고 인간의 어두운 지혜에 의해 가려지고 인간의 여러 가지 부족함 들로 인해 가려지고 희미하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때 그 안에 일어난 게시의 불빛이 우리 죄에 거침없이 환하게 드러날 때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맞댄 듯이 볼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잘 아시듯 우리도 하나님을 잘 알 수 있다. 예정 교리는 성경대로 믿음의 현재라는 시점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게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진 현재에서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렇게 주님을 믿는 자가 되어 그리고 현재 나의 믿음에 대해 생각해 봤을 때 아! 분명히 내가 믿기 전에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 성령께서 내게 임하셔서 그의 은혜로 나의 보지 못하는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게 하고 그가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고 나의 강퍅한 의지를 꺾어 그에게 순종하게 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내가 알기도 전에 내 안에 역사하셔서 나로 하여금 복음 들을 기회를 주실 뿐 아니라 그 복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내 속에 미리 역사하셨다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려는 의지가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구원 의지가 역사하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예정의 교리를 깨닫는 것은 믿음의 현재에서 되돌아 볼 때이다. 이와 같이 예정의 교리는 태초의 시점에서부터 시작하여 생각하는 교리가 아니라 오늘 복음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믿음의 현재에 의해 이해되어야 하는 교리이다. 예정의 교리는 설령 우리가 약하여 넘어지고 실패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나를 구원하시고자 예정하셨으므로 신실하고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나를 지키시리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나의 구원이 완전히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교리가 예정 교리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끝까지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래서 오늘 나의 믿음에 대해 확고하게 확신과 위안을 가질 수 있다.
<서평>
저자는 ‘구원이란 무엇인가’에서 구원이 필요한 이유와 그것을 이루는 구원자, 그리고 구원이 이뤄지는 원리에 대해 설명한다. 따라서 이 책은 죄의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죄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이다. 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공급받는 탯줄이 끊어졌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죄로 인해 자기 자신의 유한성에 갇혀 버린 인간은 죽음, 갈등, 살인, 파괴로 점철된 역사를 영위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한다. 스스로 구원을 능동적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한한 지혜와 유한한 정의감, 유한한 사랑을 가진 인간은 율법을 완벽하게 행할 수 없다. 결국 성경은 인간내부에 구원에 대한 어떠한 가능성도 남겨놓지 않는다.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 즉 행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모든 시도는 좌절된다. 이것이 진리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렇다면 예수가 누구기에 우리의 구원자라는 말인가? 저자는 4복음서에 나타난 “인자”라는 예수의 자기호칭을 파헤침으로써 예수의 정체에 접근한다. “인자”는 한글 뜻 그대로 ‘사람’이 아니라, 원어를 직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다. ‘그’가 가리키는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7장13절의 ‘인자 같은 이’이다. 그 인자 같은 이는 구름을 탄 신적 존재이지만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가 주의 종으로서 고난을 받아 죄 사함을 이루어 새 언약을 세우고,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들을 창조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독특한 칭호를 사용한 것은 자신이 다니엘7장13절에 나와 있는 ‘그 인자 같은 이’이고 ‘그 인자 같은 이’는 구름을 탄 신적인 존재, 즉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 자신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주님은 들을 귀가 있는 자들만 깨닫도록 “인자”라는 칭호로 그분을 조용히 계시하셨다. 성경의 약속대로 “인자”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함으로써 마귀를 멸하고, 하나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신인류를 창조하셨다. 예수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객관적인 구원사건과 개인의 주관적인 삶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율법의 저주라는 형벌을 받아 옛 자아가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아나는 일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접붙임 됨으로 가능한데, 그 연합을 믿음이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을 시각화한 것이 세례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구원의 총체이다. 너무나 일상이 되어버린 습관적인 예배와 면제부처럼 주일날 한번 교회 나가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 되었다고 자위하며 사는 신앙생활은 결코 영생의 구원이 될 수 없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전통이라는 허울 속에서 스스로의 우상을 만들고 정형화된 자신만을 위한 신앙을 틀을 만들고 자위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나아가 다른 사람들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를 한다. 반면에 너무나 자유로워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의 소견대로 해석함으로 방종하고, 인본주의적인 믿음을 만들어 가는 무리들도 있다. 이들은 경건이라는 길 보다는 자유의 길을 택함으로 스스로의 몸을 더럽히고, 술과 담배 및 몸에 좋지 않는 것들로 성전 된 자기 몸을 더럽히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함을 누리고 있다고 자랑한다.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얻고 또한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2-23).
2008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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