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복음이란 무엇인가
[제출자] 김정민 20081005 신학과
<요약>
1.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위한 배경과 전제
창조사상-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로서 온 우주의 통치자. 곧 왕이시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셔서 하늘과 땅에 전체의 왕이시고 주이신데, 하늘에 거처하시는 하나님께서 땅에 자신의 대리자인 아담을 세우셔서 그로 하여금 땅을 통치하게 하셨다.
타락사상-타락의 핵심은 부왕인 아담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것이다. 사단은 아담에게 자기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도록 아담의 자기주장 의지를 충동질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그것을 먹으라는 사단의 말에 순종했다. 아담은 하나님같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도리어 사단의 통치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한다.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며 하나님께 대항하며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자기를 주장함이 죄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원래 창조 때 부여하셨던 인간성을 상실하여 비인간화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은 이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죽음의 증상들인 고난이 더 이상 없는 온전한 삶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을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려다가 사단의 통치 아래 떨어졌으며, 죽음의 권세 아래 떨어져 죽음 병에 걸린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에 힘입어 인간은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 받게 되고 그의 풍요로운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하나님의 신적 무한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을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고, 예수는 자신이 바로 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언약사상-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구원의 행동을 하신다는 것이다. 타락한 인류를 하나님은 방치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한 구원사를 시작하신다. 구약에서 언약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고 그들에게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시기를 약속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인도하시고 복주시겠다고 약속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라는 것이다.
종말사상-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시기로 약속한 하나님이 드디어 이 세상에 오셔서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리라는 종말사상이다. 하나님이 의와 생명으로 통치하는 새 세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2.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가까운 장래에 올 하나님 나라-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임박한 하나님 나라가 더 빨리 오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이 주기도문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장 잘 요약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과 새롭게 맺게 된 관계, 경외심과 함께 친근한 의존심을 갖고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관계를 깨eke게 한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자녀가 되어 온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초월의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는 역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단의 통치 아래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항하여 자기를 주장하던 죄인으로서의 삶이 용서되고 창조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묘사의 특징- 잔치는 풍요함, 만족, 기쁨, 사랑 등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이런 것들이 있는 곳으로 그리고자했으며 잔치의 비유를 즐겨 사용하셨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어 그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 할 수 있고 그의 아빠 노릇해 주심에 의해 살게 된다. 예수는 또 ‘상속 받음’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복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 자신의 자녀들로 회복시켜 ‘상속자’들이 되게 하고 우리가 하나님 적 생명, 곧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치유에 대한 올바른 이해-치유를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치유란 부정적으로 말하면 모든 고난의 제거, 긍정적으로 말하면 우리를 온전케 함이다. 우리 실존의 모든 영역들에서 고난을 제거하고 온전케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안식일-인류의 문명사를 생각해 보면 인간은 생명을 확대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시점에 이르러 나타나고 있는 결과는 엄청난 풍요와 안락이 주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비인간화와 공해 그리고 첨단 무기의 위협에 직면해 있지 않은가. 이 딜레마에서의 해방은 오로지 인간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힘입어 살 때 즉 창조주 하나님의 초월의 무한에 참여할 때 이루어진다. 인간더러 이것을 깨닫고 그 깨달음에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4계명[안식일을 지키라]을 주셨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태초의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의 통치 아래서의 생명이 충만한 상활 속에서의 안식을 기념하고 동시에 종말에 있을 새 창조 때의 안식의 회복을 희구하라는 것을 띃한다 그러므로 안식일 지키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하나님 노릇하는 것에 대한 반성이다.
3.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오는가?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미래에 올 것으로 가르치기도 하고 현재 자신의 사역 특별히 안식일에 행하는 치유 사역을 통해 실현되는 것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완전히 옴은 미래의 사건이지만 현재에 벌써 실현되기 시작했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온다는 것이다 그때 사단의 나라를 완전히 제거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실현되기 시작하여 미래의 “완성”을 향하여 벌써 “출범”한 것이다.
4.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하나님 나라는 은혜로 온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이루고’ ‘확장하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초월에서 우리에게 ‘오는’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옴에 대해 예수는 그것이 하나님의 초월에서 은혜로 우리에게 온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전능자로서 초월자의 힘을 가지고 우리의 내재 안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어야 드디어 구원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초월자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이렇게 초월성과 은혜성은 구원의 두 조건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 필연성, 점진성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씨’의 비유들을 통해 그 ‘옴’과 실현되어가는 방법을 성명했다.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 필연성, 그리고 점진성을 시사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같이 또는 큰 반죽 덩어리에 감추인 누룩같이 조그맣게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필연적으로 성장해 가게 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기 때문에 아무리 핍박과 저항이 있어도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다.
사랑의 이중계명 -사단은 우리에게 돈을 많이 벌어 우리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도록 유혹하고 그러기 위해 이웃을 착취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의 아빠 되심에 의하여 그의 선한 뜻에 순종하며 또 한 이웃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존의 매 순간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장과 사단의 주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죽은 다음 내세에 영혼이 가는 곳으로만 생각한다. 그 결과 현재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 나라와 어떻게 관계되는가를 아는 데 부족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이 기껏 음식이나 가리고, 주일날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하고 기도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곤 한다. 따라서 이 땅에서 아직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완벽히 받을 수 없고,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구원은 아직 완전히 실현될 수 없다. 우리는 아직도 사단의 통치에 노출되어, 죄의 힘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자기주장의 의지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가운데 하나님을 혼신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없다. 인간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만큼 이 땅에는 아직도 사단의 통치가 가져오는 죄와 죽음이 있게 마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사단의 통치가 완전히 종식되고 우리가 죄의 힘으로부터 완전히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통치와 그 구원은 완성될 것이다.
5.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예수의 의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불러 모아 그들로 하여금 예수 자신을 통해 오는 하나님의 구원을 덕 입고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구원(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회개감’으로 사단의 나라에서 빠져나와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 속으로 들어오라고 부르러 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죄와 죽음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나라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아빠’라는 아주 친근한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됨을 은근히 나타내고 그의 추종자들에게도 그 호칭을 따라하게 함으로써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백성)이 되었음을 드러냈다. 이로써 자신이 하나님 아들 됨의 권세를 중계해주는 분임을 간접적으로 계시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자기주장 의지를 충동하여 인간 위에 군림하는 사단의 통치에서 인간을 건져내는 것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여 신적 삶(영생)을 얻게 한는 것(구원)이다.
6.예수는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창조하는가?
첫째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통해서이고, 둘째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빠’ 노릇해주시리라는 것, 즉 그들을 자신의 자녀들로 회복하여 그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게끔 하신다는 것. 또는 그들에게 풍성한 '잔치‘룰 베풀어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인간의 결핍과 거기서 오는 죽음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신적 생명을 얻게 하신다는 것을 선포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선포를 통해 인간들로 하여금 회개함으로 사단의 나라에서 벗어나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고 초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유월절에 베푼 것은 자신의 다가오는 죽음이 종말의 유월절 구원을 가져오는 사건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해서였다 예수는 떡과 포도주, 즉 음식으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상징하게 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죽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음식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떡을 부서뜨리고 빨간 포도주를 붓는 동작은 자신의 잔인한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는 최후의 만찬의 극으로 자신의 다가오는 죽음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은 ’약속‘과 ’성취‘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우리에게 ’사단‘의 통치로부터 해방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겠다.
7. 예수의 죽음
예수는 자신의 다가오는 죽음을 종말론적인 속죄와 새 언약의 제사로 보았으므로 자연히 예루살렘 성전은 이제 그 수명이 다한 것으로 볼 수박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성전을 무시해 버리고,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세로 죄인들의 용서를 선언하기도 하고 부정한 자들을 깨끗하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성전과 제사장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예수의 성전에서의 소란 피움은 하나의 선지자적 시위 행위로서, 그 타락한 성전은 곧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파괴되리라는 것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단의 신탁에 따라 성전을 건축하리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죄인들을 영접하는 행태를 비난하던 바리새인들과 그의 메시아 운동 또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자신들에 대한 도전으로 그리고 로마인 통치자들을 자극하여 유대 민족의 안위를 위협하는 불장난으로 본 사두개 제사장 무리들은 예수의 성전 시위를 직접적인 구실로 삼아 그를 체포하여 산헤드린 재판에 회부한 것이다.
8. 예수의 부활과 사도들의 복음의 기원
예수는 다시 산 자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났다. 그가 부활한 것이다 부활은 하나님의 행위이다. 부활은 생명이 없는 곳에 생명을 빚은 사건이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는데 그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를 대신 받은 것이다. 예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자신의 죽음을 이 구약성경에 의거하여 설명했으며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을 종말론적으로 성취한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이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옳은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바로 우리를 위한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창조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위한 예수의 종말의 구원자적 행위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어서 창조주의 무한한 부요함을 덕 입어 살게 하는 다시 말해 피조물의 궁핍함에 떨어진 아담의 숙명을 극복하게 하는 구원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복음 선포를 통한 ‘약속’과 그의 죽음을 통한 그 약속의 ‘성취’ 그리고 그의 부활을 통한 그 성취의 ‘확인’ 이 세 가지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9.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말이고 그것을 문자적으로 번역한 그리스어가 ‘크리스토스’이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말은 예수가 종말의 구원자란 뜻이며 즉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을 실현하도록 세움 받은 하나님의 일꾼이란 뜻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이와 같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시위였기에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오직 사랑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며 오직 창조주의 사랑만이 궁극적으로 피조물들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우주적으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을 위리 개개인의 실존적 구원의 사건으로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방도인 것이다. 믿음은 근본적으로 복음 즉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선포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그리스도를 믿음’ 을 받아들임은 우리를 우리들의 대신이요 대표로 죄에 대해 죽고 신적 삶에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그 안에 내포시켜 하나님 앞에 그의 됨됨이 우리의 됨됨이 되게 하고 그가 하신 일이 우리가 한 일이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고 새로운 삶에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 됨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구원을 벌써 덕 입게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얻게 될 그 완성된 구원의 ‘첫 열매’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이 ‘첫 열매’는 지금 하나님의 영의 힘으로 우리의 실존의 모든 면들에서 ‘치유’를 가져오며 그 힘을 발휘한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의인으로 선언되었음을 확신하게 도이고, 그리하여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된다.
<서평>
저자는 예수님이 복음과 제자들의 복음을 대비시켜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를 먼저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한 사단과 죽음의 나라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 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나라의 자녀로,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 예수님이 이룬 승리의 삶을 각자의 내면에서 또 삶의 자리에서 이루는 것, 그리고 그 방법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의'의 성경적 의미는 올바른 관계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 '의'를 이루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교만과 자기중심적 이기심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이웃이 행복하고 잘 살기를 바라는 것. 이렇게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살 때, 아버지께서는 그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신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수적인 내가 살아가는 이유인 '복음'이 가끔은 너무나 멀게 느껴질 때가 있다.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 한다는 것. 예수님의 복음과 사도들이 말하는 복음을 어떻게 일치 시킬 것인가? 그리고 진정한 복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복음이 멀게 느껴지는 것은 복음의 그 힘으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모든 것을 살리고 회복한다는 것과 회복에 대한 메시지가 모든 것에 선포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독교 세계관을 '복음'과 연관 시키지 못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세계관이 단지 하나의 학문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고, 그 학문을 진정한 회복과 분리시켜서 진정으로 기독교 세계관의 중심인 예수님에게 귀결시키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복음이란 그리고 예수님의 나라는 이미 임재 해 있고 이미 선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다시 나를 돌아볼 때 너무 미련하게 보이는 나를 발견한다. 회복되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은 나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치유, 그분의 복음, 그분의 자유케함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복음이 내 마음 속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되었으면 좋겠다. 교만하지 않고 안는 척 하지 않는 배움의 자세를 자져야 하겠다.
나의 현실을 바라본다. 나는 얼마나 복음도 이기적으로 해석하고 있었는가? 얼마나 나의 행복만을 원했던가? 예수를 믿는다, 교회를 다닌다면서도 얼마나 나와 내 가족의 안전과 건강과 성공만을 구하고 있는가? 그것이 우상 숭배일 것이다. 나를 다시금 성찰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복음을 받은 자로서의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3;24)"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2008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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