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트 족 선교사 울필라스(Ulfilas)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주후 312년) 이후, 로마제국은 명목상 기독교 지역이 되었고 극에 달했던 핍박도 사라지게 되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유행이 되었고, 신앙으로 인해 고난 받는 것이 없어졌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열정은 차츰 시들어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있어 선교사라는 개념은 로마 국경 부근의 야만인들을 로마의 통치권으로 끌어들이는 사람 정도로 이해되었다.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깊이 헌신한 울필라스도 정부 당국자들에게는 그의 선교사역이 영토 확장의 도구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초기교회 위대한 선교사 중 하나였던 울필라스는 현재의 루마니아 영토에 살고 있던 야만인인 고트(Goths) 부족을 위해 사역하였다. 울필라스의 어머니는 고트족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고트족이 갑바도기아에서 끌고간 기독교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울필라스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비신앙적인 분위기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그런 울필라스가 20대 초반 외교적 사명을 띄고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수년간 니코미디아의 감독이었던 유세비우스에게서 희랍어와 라틴어 성경을 배우며 신앙적 영향을 받게 된다. 유세비우스의 지도 아래 그는 로마군대 안에 있던 고트족 군인들에게 “성경을 읽어주는 사역”을 맡았다.
30세 때 울필라스는 다뉴브강 북쪽의 코트족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학자들은 그곳에 이미 기독교인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파송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의 임무는 전도와 개종이었다. 40여 년간 울필라스는 고트족 안에서 성공적으로 복음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어려움도 있었다. 울필라스의 반대파였던 고트족의 추장으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임을 당하여 사역이 주춤하기도 하였다. 그 때 그는 안전한 로마영토로 잠시 피신하였다가 다시 고트족으로 돌아가 사역을 계속 감당한다.
울필라스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언어만 있고 문자가 없었던 고트족을 위해 알파벳을 고안하여 성경을 번역한 일이다. 그는 매우 세심하고 정확하게 헬라어 성경을 고트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고트족과 반달족이 유럽에서 유랑생활을 하는 중에 이 성경을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울필라스는 고트족의 사신으로 가서 머물렀던 콘스탄티노플에서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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