붐이다.
지금 미국에서는 명상 붐이 일고 있다. 이제까지 종교적 차원으로 알려졌던 명상의 효과에 대한 과학적 조사가 이뤄지고 그 효능이 입증되자 많은 사람들이 묵상을 즐기고 있다. 명상이 신체의 면역체계를 강화시켜 줄 뿐 아니라 스트레스를 줄여주기 위해 두뇌를 조정한다는 사실을 과학 실험이 보여 주었다. 현재 미국에서는 묵상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소수 집단에 속할 정도라고 한다. 현재 미국 인구 중 1,000만 명의 성인이 정기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명상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것은 10년 전에 비해 두 배로 늘어난 수이며 묵상하는 사람들의 수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명상 교실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는데 그들은 특별히 뉴 에이지 운동 책을 읽는 사람들이나 동양 사상과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라 보통 평범한 사람들이다. 오늘날의 점점 더 정보화된 시대에 사는 전문 직장인들은 과거 목축을 하고 농사를 하던 농업시대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 그들이 받는 스트레스의 양이 엄청나게 많아졌고 그 결과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각종 방법들이 등장했는데, 그 중 묵상이 가장 각광받는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제는 명상에 참여하기 위해 수도원에 간다든지 산에 사는 구르(수도승)에게 찾아갈 필요가 없어졌다. 학교에서, 병원에서, 법률가 사무실에서, 정부 건물에서 일반회사에서 심지어 감옥에서도 묵상 교실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제는 국제공항에서도 기도 예배실이나 인터넷 방과 나란히 명상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각 대학은 물론하고 미 육군사관학교에서도 묵상 강의가 개설되어 있다. 인도요가를 서구에 소개한 인동의 마하리시 요기(Maharishi Mahesh Yogi)의 이름을 따서 만든 아이오아 훼어필드에 있는 마하리시 대학(Maharishi University Schools)및 부설 학교에서는 중고등학생들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학생들 마져도 하루에 2번씩 명상에 참여한다. 뉴욕에 있는 한 호텔인 켓스킬(Catskills) 호텔은 건물 전체를 묵상 리트릿 센터로 전환했고 그래서 그 거리 이름이 브로스체트 벨트(Broscht Belt)에서 브디스트(Buddhist Belt; 불교인 거리)거리로 바꾸었다. 영화배우 리차드 기어나 정치인 엘 고어 같은 이들도 묵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들로 유명하다.
문화적 코드로서의 명상
이러한 명상에 대한 최근의 관심은 단순히 의학적인 관심을 넘어서서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료인들은 명상이 스트레스 해소뿐만 아니라 심장 질환이나 AIDS, 암 등의 고통을 완화시켜 주고 불임증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최근 의사들이 서구 과학과 동방의 신비주의가 만나는 영역으로 묵상을 수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명상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 아니라 과학적 실험을 통해서 묵상이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묵상은 스트레스를 치료하는 데 놀라운 효과를 보여주고 있고 사람들의 두뇌를 새롭게 하고 훈련시키는 데 탁월한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신체와 마찬가지로 두뇌는 깊은 묵상 가운데 있을 때 뇌파가 알파파에서 데타파로 전환되면서 의식적 사고는 줄어들고 긴장완화가 증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한편 묵상에 대한 신비적인 요소들이 제거되고 묵상하는 것이 삶의 주요한 영역으로 들어오자 묵상의 방법들도 점점 현대화되고 있다. 명상 할 때 향을 피운다든지 하는 것은 없어졌고 반면에 불교 철학의 핵심은 그대로 남아 있다. 즉 10분에서 40분정도 침묵 가운데 앉아서 자신의 호흡 하나하나에 집중하거나 특정한 단어나 이미지에 집중하게 되면 과거와 미래를 초월하여 현재에 집중할 수 있고 이것을 완전히 받아들이므로 실제를 초월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 방식을 현대적으로 적용한 결과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외워야 하는 주문 같은 것은 제거했지만 그 대신 특정한 음악이나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는 방식을 개발했다. 사실 이러한 방식으로 명상하며 집중하는 것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나타나는 방식이다.
서구에서 명상이 붐을 이루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67년 비틀즈가 인도의 구도자였던 마하리시 요기(Maharishi Mahesh Yogi)를 만나 그의 영향을 받으면서 요가 등이 서구에 본격적으로 소개됨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비틀즈는 서구 문화를 주도하는 코드였고, 당시 서구 사회는 반권위주의와 기존의 서구 사상과 문화에 대해 실증을 느낀 젊은이들에 의해 반이성주의적 실험이 시작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젊은이들은 기존의 사회 질서 뿐만 아니라 그 사회 안에 존재하고 있던 기존의 종교, 즉 기독교적 형식도 거부하고 새로운 영적 근거를 찾아 나선 그들에게 초험적 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이 소개되면서 묵상과 요가 등이 급속도로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동양의 종교적 체험을 하는 통로로 묵상이 소개 되었고 뉴에이지 운동의 하나의 문화 코드로 명상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오늘날에는 매우 일반화되어 많은 대중들이 참여하게 된 것이다. 묵상이 서구 사회에서 빠르게 확산된 배경은 오늘날 서구 사회가 경험하는 현대주의의 실패와 무관하지 않다. 즉 이성적이고 물질 중심적이며 성장 중심의 사회 속에서 경쟁과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오늘의 서구 사회 속에서 탈출하고자하는 욕구 때문에 이성적 사고를 초월하며 내면의 질서와 평정을 경험할 수 있는 문화코드의 등장이 요구 된 것이고 그것이 묵상이란 방법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초월적 명상이 가지는 허구
묵상을 통해 물질적 사회 환경과 반대되는 어떤 영적인 힘을 경험하고 혼돈과 경쟁과 반대되는 내면의 질서와 초월을 경험하는 것은 매우 정당한 사회적 발전이라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묵상을 통해 초월을 경험하는 것이 초월을 경험하는 차원에서 끝나고 더 나아가서 영원한 초월의 자리에 들어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묵상을 통해 현실의 괴로움이나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초월하여 내적 평안과 휴식을 경험하고 나서 영적(내적) 에너지를 충전 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묵상을 통한 이러한 초월에의 경험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 초월의 자리에 지속적으로 남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괴로움을 잠시 동안 잊어버리게 하는 일시적인 경험에 그치고 그 후 다시 원래의 현실 즉 경쟁과 욕구 충만의 상태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묵상을 통해 경험하는 새로운 영적인 경험이 그들로 하여금 초월의 자리, 즉 세상의 욕심과 경쟁 그리고 죄악의 상태를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삶의 형식을 가지게 하기 보다는 일시적인 초월을 통해 평안을 경험하곤 다시 원래의 혼돈의 삶 속으로 돌아온 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명상의 방법은 실제 자신의 비우는 일이다. 일정한 자세를 취하고 자신의 호흡이나 이미지에 집중하고, 특정한 단어나 문장을 반복함으로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내면의 생각들을 완전히 지워버림으로서 현실을 초월하는 경험을 하게 되고 마침내 자신의 육체와 자기가 분리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내적 평안과 휴식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내면을 비운 다음에 그 속에 무엇을 채우는가에 달려 있다. 불교 명상의 핵심은 자신을 비운 상태가 계속적으로 지속되도록 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즉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지배를 받지 않는 내적 진공상태가 계속 될 때 열반을 경험하는 것이다. 즉 현실을 초월하고 그 대신 그 속에 아무것도 채우지 않는 것을 구도의 최종적인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만일 오늘날 묵상이 자신의 내면을 비우고 자신의 현실을 초월하는 경험을 하고 그 결과 얼마간 내적인 평안과 휴식을 경험한 후,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 내면을 경쟁과 욕심으로 채운다면 자신을 비운 그 묵상은 마약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 경우 묵상을 통한 내적 평안을 경험하는 과정을 또 다른 경쟁과 욕심으로 나를 채우기 위해 자신을 재충전하는 것이 불과한 것이다.
기독교 묵상의 실재
불교에서 뿐만 아니라 모슬렘들에게도 수피(Sufis)라는 묵상을 통한 예배의 형식이 있고, 유대교에도 카발리즘(Cabalism)이라는 신비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는 형식이 등장한다. 물론 기독교 안에도 오랜 묵상의 전통이 있다. 기독교에서는 명상이란 단어보다 묵상이란 단어로 사용한다. 기독교 묵상의 방법도 그 도입 방법에 있어서는 다른 묵상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적하고 조용한 장소를 찾아 나를 방해하는 외부적인 요소들을 제거한 후, 침묵을 통해 우리 내면의 상태를 진정시킴으로서 외부의 어떤 영향력이 나를 통제하지 못하게 하고, 특정한 이미지나 말(기독교의 경우 십자가나 하나님의 이미지 혹은 반복되는 기도문)을 집중적으로 생각하거나 반복함으로서 내면의 모든 다른 생각들이 살아지면서 현재의 내면을 초월하는 경험을 하는 것까지는 기독교 묵상이나 일반적인 묵상이나 거의 흡사하다. 그러나 기독교 묵상의 본질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묵상은 일반적인 묵상의 방법을 통해 자아 비움의 1차 감정처리로 마음의 관념과 몸에 배인 습관을 수련하여 나를 처리하여 초월에 상태에 들어간다. 초월의 상태에 들어간 그 결과 나의 "영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며 "영혼의 친아버지인 하나님"과 접붙임을 경험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나의 영혼이 겉 사람의 마음으로 가려져 있음을 발견하고 묵상을 통해 그런 나를 초월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살면서 몸에 배인 마음의 관념과 관습을 뛰어넘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우리의 영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영이 열리면 나의 영과 예수님이 하나가 되며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며, 내가 예수님 안에, 아버지 하나님이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성령님이 내안에, 내가 성령님 안에(요14:20),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며(엡1:23)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 지금 천국을 경험하게 (롬14:17)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묵상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이 기독교 묵상에서 이야기 하는 Lectio Divina의 과정이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통해 어떤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어떤 통찰력을 경험하는 과정으로 새로운 성경적 사실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조우하도록 하는 도구로 말씀이 내속에서 역사하도록 하는 과정을 통해 관상(comtemplation)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고 내 존재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고 (recollection)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초월해 가는 과정에서 더 이상 내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성령님께서 나를 지배하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롬8:2). 내안에 운행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는 아버지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 되어 동역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단계가 이루어지면 내가 나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나를 통제하고 성령의 흐름에 따라 나의 삶을 맡기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고 그 분과 내가 일치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임재하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 결과 보이는 데로 보고 들리는 데로 듣고 느껴지는 데로 느끼며 그냥 있는 데로 저절로 행해지는 아버지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 되어 동역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와 온전한 합일의 삶이 열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계신 하나님이 나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오늘의 삶의 환경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계신 성령님께서 인도하는 대로 끌려가는 삶을 사는 것이 된다. 따라서 기독교 묵상의 핵심은 나를 비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새로운 것으로 채우는 것에 있다. 즉 나를 성령님의 임재로 채우는 것이 기독교 묵상의 핵심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일반적인 묵상과 기독교 묵상의 차이점은 매우 뚜렷하다. 최근 기독교 묵상과 뉴 에이지적 묵상이 혼합되어 혼돈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데, 비록 묵상의 과정이나 방법 혹은 도구는 유사할지라도 그 묵상의 최종적 목표과 하나님의 연합인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을 비우는 일인가에 따라 기독교적 묵상인가 아닌가의 여부를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올바른 기독교 묵상이라면 이것은 확산될 필요가 있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의 역할이 마치 일반인들이 묵상을 하는 이유와 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번씩 교회에 와서 자신의 현실 생활을 모두 잊어버리고 일종의 초월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 엑스타시를 경험하고 그 결과 얼마간의 내적 평화와 안정을 경험한다. 그리고 다시 힘을 내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원래의 나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세상의 삶의 방법대로 내가 나를 통제하여 경쟁과 추구의 힘든 삶을 살다가 다시 교회로 와서 자신의 비우고 또 다시 세상으로 가서 자신을 채우고 하는 일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우리 교회는 성도들의 삶에 마약과 같은 존재가 될 뿐이다. 우리 교회는 성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조우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자신의 내면을 비우고 그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채우도록, 그래서 일상의 삶 속에서 성령님이 그 자신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성령님이 나의 삶을 살아주는 놀라운 초월을 경험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 묵상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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