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후원 사역†/선교이야기

숨겨진 사람들의 비극

예림의집 2008. 8. 29. 07:28

아시아의 정신질환
최근 타임지는 ‘숨겨진 사람들’(Hidden Away)라는 제목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정신질환 상황이 매우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고하고 있다. 세계은행과 세계보건기구가 지구질병연구위원회와 함께한 조사에 의하면 2020년에 이르면 아시아에서 정신질환이 장애 발생의 최고원인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이미 우울증, 정신분열증 등을 포함한 정신질환은 10대 장애발생원인 중 5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암이 차지하는 비중보다 더 높은 것이다. 인도인들의 1/4는 여러 종류의 정신질환으로 질병을 앓고 있고 아시아는 현재 세계 여러 대륙 중 에서 가장 높은 자살율을 기록하고 있다. 북경 자살조사방지 센터의 보고에 의하면 중국의 경우 18세부터34세 사람 중 가장 높은 사망원인이 자살이다. 중국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매년 25만명의 자살로 죽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에서 매우 적은 수의 정신질환자들 만이 실제적인 도움을 받고 있다. 일본 등 아시아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라 할지라도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정신질환자들에 대해 사회적으로 꺼림직하게 생각하는 경향 때문에 그들은 일터에서 차별을 받거나 가족으로부터 충분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고 주의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자신의 증상을 숨겨야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문제의 심각성이 확인된 나라 일지라도 대안 부족으로 치료에 제한받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에게서 더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정신질환자의 상황은 끔찍한 상태이다. 많은 환자들은 감옥이나 별반 다르지 않는 병실에 감금되어 있다. 고속도로로부터 10분 거리에 있는 자카르타의 한 정신병원에는 200명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병원에 305명이 수용되어 있다. 환자들은 벌거 벗은 채로 수갑에 채워져 있거나 쇠사슬로 창틀에 묶여 있고 극도록 쇠약해져 분비물을 그대로 방뇨한 채 딱딱한 화장실의 마루 바닦에 꾸부리고 누워 있다. 의사는 2주마다 한번씩 복도의 중간 지점까지 왔다가 한번 드려다 보고 그냥가는데, 그것은 그곳이 그가 방문해야 할 수 많은 정신병원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정신질환자의 수는 1996년 이후 두배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악화로 인해 병원 지원금은 한 사람당 하루에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국의 경우 상하이의 한 정신과 의사에 의하면 일반병원에 초진하러 오는 사람들 가운데 1/3이 두통이나 불면증들의 증상을 보이는 심신장애를 가진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정신적 억압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95%는 거의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들이 정신질환치료에 투입하는 재정을 비극적이라고 할 만큼 적다. 예를들면, 캄보디아의 경우 국가 전체가 지불하는 정신질환치료 예산이 미국의 최상급 정신병원 하나의 예산보다 적다. 파키스탄의 경우 정부는 정신질환자 치료를 포기 했고 몇몇 개인 후원자들이 이 문제를 짊어지고 있다.

급격한 사회 변화로 인한 정신질환

아시아의 아이러니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질환의 위기가 더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아시아 여러나라의 급속한 사회적 변화는 본질적으로는 혼합된 축복이라고 말한다. 아시아의 경제 사회적 변화는 사람들에게 휴대전화와 인터넷의 꿈을 가져다 줌과 동시에 이러한 변화에 따라가려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심리적인 대가를 지르게 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장차 미래 농부의 아비로 살아가던 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들판에서 일을 했다. 그들은 생활에 대한 별 다른 선택권이 없었음으로 생존의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경제적 변화로 인한 오늘날 현대 도시생활의 특징인 끊임없이 성장하고 경쟁해야 하는 삶은 많은 아시아인들에게 그 어느때 보다 심각한 심리적 압박으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중국의 한 심리학자는 현재 중국인들의 경험하고 있는 분노지수는 문화혁명때 보다 더 높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것은 오늘날 아시아의 경재성장 기적의 어두운 한 측면이다.
수많은 중국 농촌 사람들이 꿈을 품고 도시로 몰려들지만 그들이 도시 이주민들이 생활에서 경험하는 경제적 사회적 억압 때문에 중국 도시 이주자들의 가운데 발생하는 정신질환자들의 수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두배나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농촌에서 도시로 온 노동자들 가운데 도시의 경쟁과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직업을 잃고 거리에서 방황하다가 노숙자로 살아가다가 수용소에 갇히기도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인 압박을 받게 되고 그 결과 정신질환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대부분은 아무도움없이 방치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의 경우 정신질환자가 전체 환자의 20%에 이르지만 정부의 의료예산 중 정신질환치료와 예방에 배당된 금액은 2%에 불과하다. 미국의 경우 정신분열증 환자의 60%가 병원의 치료를 받고 있는 반면에 중국의 경우 90% 이상이 거의 병원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런 증상을 감추고 가족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외부에 알리길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정신질환이 점염병처럼 옮겨지는 줄 알고 있고 그 결과 13억의 인구를 위해 겨우 2,000명의 정신과의사가 있을 뿐이다.

역사의 고통으로 인한 정신 질환

캄보디아의 경우 대부분의 정신질환자들은 1975년-1979년 동안 일어난 카메르 루즈의 대략 살륙의 통치하에서 발생한 경우다. 카메르 루즈의 통치를 받았던 성인 중 75%가 극단적 스트레스성 질환이나 후기 충격 스트레스성 질환을 앓고 당시 태어난 아이들 중 40%는 심한 정서장애를 격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천1백만명의 인구를 위한 정신과 의사는 20명에 불과하며 정신과전문병원은 한 곳도 없다. 많은 캄보디아인들은 카메르 루즈 정권하에서 당한 고문과 살육의 환청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데 최근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당이 분열되면서 이전의 카메르 루즈의 통치와 같은 정치적상황이 벌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으며 현실과 전쟁의 망상 사이에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질환치료 시설이나 도움이 부족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대안으로 쿠르크마이(krukmai)라고 불리는 무당을 찾아가게 되는 데, 대개의 경우 그들은 귀신들린 것으로 취급당하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격리되거나 소외되면서 증상을 더욱 심각한 상태로 발전하게 된다. 그 결과 마을은 귀신에 사로잡힌 자와 그렇지 않을 자들로 나뉘게 되고 공동체 전체가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경쟁사회의 압박으로부터 오는 정신질환

비교적 평온한 전쟁 역사를 가진 일본의 경우 완전히 황폐해진 캄보디아와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나라이다. 거리는 깨끗하고 지난 십년간의 경제불황이 있었지만 정부의 복지지원은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8년 이후 매년 일본에서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은 3만명이 넘어서고 있다. 이 숫자는 1970년대의 1만 5천명에서 두배로 증가한 것이다. 일본은 동아시아 뿐 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자살율이 높은 나라 중에 하나이다. 이러한 일본 사회의 문제는 극단적 경쟁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취에 대한 압박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떨어졌을 때 느끼는 상실감 때문이다. 이러한 압박은 많은 사람들에게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에 매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렇게 지속적인 압박 가운데 있는 대중들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정신질환환자 수용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동안 비미했던 개인병원에서도 정신과 의료 수준을 높이도록 요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재정을 외래정신질환자 관리와 지역공동체 중심의 정신질환예방교육에 투자하고 있다. 어떤 전철역에서는 위해 역 터널에 커다란 거울을 설치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순간적인 자살충동을 방지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의 자살율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특히 중년층 남성들의 자살율이 급증하는데, 이들은 일본 사회의 장기 경기침체와 지속되는 인력개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다. 직장에서 평생고용을 생각하고 있던 그들은 사회 시스템의 엄청난 변화를 견디지 못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낙오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고 동시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그럴듯한 방법도 발견하지 못하고 마지막 수단으로 자살을 택하게 된다. 가미가제특공대 등의 전설을 알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자신의 문제로 인해 자살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로 비록 남편이 자살했더라도 부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남편이 심장병으로 죽게 되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인들의 경우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다는 말은 마치 편의점에 가는 것처럼 쉽게 이야기 하지만 일본과 같은 사회에서는 감히 입밖에 낼 수 없는 금기에 해당되는 일이다. 전국적인 홍보와 교육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정신질환을 치유될 수 없는 질병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기독교가 보는 정신질환

정신질환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일반적인 정신질환인 정신분열증은 영어로는 스키조페레니아(schizophrenia)라고 하는데 이는 페레니아(phrenia/횡격막:마음)와 스키조(schizo/분열:갈라짐)가 합쳐져서 형성된 것이다. 즉, 마음이 통합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질환은 역사 속에서 신의 저주나 귀신들림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유전적인 경향, 뇌의 구조적인 이상,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특히 토파민) 등 생물학적인 원인이 확인되면서 일종의 뇌 질환으로 이해되어가고 있다. 임상에서는 정신분열증에 걸릴 취약성을 가진 환자가 환경으로부터 특별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발병하는 것으로 보고 치료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기독교인들은 정신질환하면 즉각적으로 ‘귀신들림’하고 연관되어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귀신들린 사람들이 모두 정신이상을 보이는 것은 아니며 또 마찬가지로 정신이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귀신들린 것은 아니다. 귀신들린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정신이상을 보이는 귀신들림’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귀신들린 사람들에 대한 여러 예들이-벙어리 된자 (마 9:32-33) 눈멀고 벙어리 된 자(마12:22)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 자(마 17:14-18)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자(눅 13:11) 등등- 나온다. 그런데 그들 대다수는 정신이상을 보이지 않았다. 명백하게 귀신들려 정신이상을 보이는 사례는 거라사 걸인의 한 경우밖에 없다.(마 8:28-34,막5:1-20,눅8:26-39) 즉 귀신들린 사람과 정신질환자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정신병에 의한 정신이상자들 가운데 일부만이 귀신들림에 의한 정신이상 증상을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정신이상 혹은 정신질환을 보이는 사람들을 모두 귀신들린자로 취급해서 다루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정신 질환을 귀신들림과 동일시 함으로서 나타나는 현상은 소위말하는 일부 기도원이 정신질환자를 치료하는 곳으로 역할을 하고 있고 많은 정신질환자 수용시설을 기독교 기도원시설이 운영함으로서 모든 정신질환자들을 일방적으로 귀신들린자들로 취급하고 다룸으로서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생기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사탄의 세력에 의한 정신이상은 보이지 않지만 사탄에 지배 당해 행동하는 일 즉 앞 일을 척척 알아 맞추는 점을 치고,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쳐 왜곡된 금권욕,권력욕,성욕 등등을 고조시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항하고,시기와 중상모략의 마음을 지나치게 갖게 하고, 선교지에서 선교사역에 여러 형태의 악령적인 방해를 받는다든지 하는 등의 '일반적인 사탄의 사역'과 정신질환으로 인해 질병을 구분해야 한다. 물론 사탄의 영향으로 즉 귀신들린 결과 정신이상과 정신질환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오늘날 많은 정신 질환은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스트레스의 결과이거나 신체적, 정서적 압박 혹은 생체학적 이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오늘날 복잡해지고 산업화된 사회 속에서 더 많은 스트레스와 사회 문화적 압박으로 인해 정신질환자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귀신들림이라는 획일적인 시각으로 볼것이 아니라 총체적이고 전인격적인 치료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잘못하다가는 귀신들인 사람이 아닌데도 귀신들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더욱 준비된 영적 분별력이 우리 목회자들에게 구비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