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명인의 헌신
몇 해 전 어느 초등학교 교사가 정년이 되어서 퇴임하는 모습을 인터넷을 통해서 접하였습니다. 그분은 45년 동안 어린이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분은 45년 동안 교직에 있으면서 교감도 해 본 일이 없고 더구나 교장도 해 본 일이 없는 그런 분입니다. 그저 평교사로서 45년 동안 오직 교육만을 위해서 시골 학교에서 교육을 하다가 정년을 맞은 것입니다.
그 분이 퇴임을 하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생애 여한은 없다 "라는 말 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지금까지 일생 동안 쏟은 그 삶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쉬움이 전혀 없다는 고백입니다. 만족한다는 말 입니다. 사람들 마다 마지막에 이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땅에 얼마나 있을 것입니까.
사람은 자기가 정열을 쏟고 일생을 바쳐서 일하고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일생을 다 바쳐서 유감없이 봉사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이 같은 일은 분명 축복 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을 보니까 여기에서도 한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3년간의 공생애 기간이 거의 끝나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으로 가까이 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가까이 도착하였다는 것은 그의 사역이 거의 끝나 가고 있다는 말과 같은 말 입니다. 즉 그가 죽을 날이 임박했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 하시는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들어가십니다. 여기서 나귀의 주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 나귀 주인에 대한 말씀 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지시 하시기를 마을에 내려가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주인이 왜 끌고 가느냐고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의아 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만으로 그냥 풀어 줄 것인가. 그런데 제자들이 가서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 나귀 주인은 아무 소리 않고 풀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화려하게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일주일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오늘 하사관 임명식을 맞이하여 여기에 나오고 있는 나귀 주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오늘 새로 임명받으시는 여러분도 혹은 과거에 임명 받으신 여러분도 본문에 등장하는 나귀의 주인과 같이 이름 없는 충성 자와 같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나귀의주인인 이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1. "이름도 없는 충성자" 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성경 사복음서가 다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도 말했고, 마가도 말했고, 누가, 요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보아도 이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끝까지 무명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무명의 충성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그만 일을 하고서도 이름을 나타내려고 안간 힘을 다 쏟습니다.
그래서 조금 선심을 쓰고서도 과대로 선전하고 나타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서도 끝까지 무명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사실 이 세상은 삭막하고 메마른 것 같아 보이지만 오늘 날도 이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숨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 입니다. 큰일을 했으면서도 나타내지 않고 남을 돕는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숨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래도 이 정도라도 지탱이 되고 있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 입니다. 봉사라고 하는 것은 공개가 되면 그 향기가 반감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내지 않을 뿐이지 묻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이 세상을 얼핏 보면 엉망진창인 것 같고, 사람이 사람을 팔아먹고, 사기와 속임과 부정과 거짓이 난무한 것 같이 보이지만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깊이 들여다보면 이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이름도 없는 충성 자, 여기 나귀 임자가 바로 이름도 없는 충성 자 입니다.
2. "빛도 없는 충성 자" 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쨌거나 영광스런 사람들 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하는 이름과 명예와 빛이 있습니다. " 내가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경력 입니까. 천국의 새 예루살렘 성의 기초석에는 이 12사도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람들 입니까. 예수를 위해서 순교만 해도 영광인데,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는 장로만 되어도 영광인데, 예수의 12사도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영광입니다. 12사도 중에 바돌로매, 시몬, 다대오, 이런 사람들은 무엇을 한 사람들입니까. 이름뿐인 제자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천국의 예루살렘 성 기초석에 기록되어 있다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여기 이 나귀 주인은 이름도 없고 빛도 없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화려한 예루살렘 입성 뒤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촌로에 불과할 뿐 입니다. 세상이 다 그렇습니다. 올림픽을 상기해 보십시오. 한 사람이 금메달을 따면 신문에 얼굴이 나오고, TV 에 비쳐지고, 박수와 환호와 찬사가 쏟아지고, 금으로 만들어진 메달이 주어지고, 상금이 수여되며, 하루아침에 영웅이 됩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 혼자서 금메달을 땄습니까. 그 사람이 금메달을 따기 까지 그 뒤에서는 빛도 없이 충성스럽게 함께 훈련 하면서 함께 땀을 흘린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끝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얼굴도, 상금도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몰라서 그렇지 이 세상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이런 사람들이 숨어서 큰일을 해 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숨어 있는 사회, 그 사회가 건강한 사회 입니다. 이 같은 나라가 부강한 나라입니다. 빛 없는 충성 자, 여기 이 나귀 주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3. "보상도 없는 충성 자" 입니다.
우리나라 농촌 마을에서 소 한 마리는 큰 재산 입니다. 그래서 농촌 사람들은 소를 기르느라고 수고를 많이 합니다. 그렇게 키운 소 한 마리를 선뜻 내어 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나귀 주인도 분명히 나귀 한 마리가 큰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중하게 길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니까 두말하지 않고 보냈습니다. 그 나귀가 자기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까 그저 만족스럽게 바침으로서 기뻐했을 뿐이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정성껏 기른 나귀를 주께서 요긴하게 쓰신다니 그것으로 보람과 기쁨을 느낀 것입니다. 이것이 보람이고 뜻이고 기쁨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이 같은 뜻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입니다. 아리마대 요셉 같은 이가 그렇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들어갈 무덤을 돌을 깍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부자인데 얼마나 좋은 자리에, 얼마나 좋게 만들어 놓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그 무덤을 주님께 바쳐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예비해 놓았던 것을 바쳐 버림으로서 기뻐했고 만족했고 보람을 느꼈습니다.
구레네 시몬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지실 십자가를 자신이 대신 졌습니다. 사람들이 욕하고 조롱하고 비웃었지만 예수님이 지실 십자가를 대신 졌습니다. 그 후 그는 두고두고 그것을 얼마나 영광으로 알았겠습니까. 그 당시는 아마 수모였을 런지 모릅니다. 수치스럽게 보였을 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후대에 그의 용기가 얼마나 가상하게 평가 되었습니까.
또 요셉도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를 위해서 철저하게 희생당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위해서 태어났고, 예수를 위해서 신혼 생활도 희생당한 사람이고, 그를 위해 피난 생활을 하고, 예수를 위해서 철저하게 희생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장성해서 스스로 활동할 만큼 되었을 때는 그는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모두 다 보상 없는 충성 자들 입니다. 이것이 참 헌신이고 충성입니다.
그러나 오늘을 보십시오. 오늘은 철저하게 보상의 시대입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조금도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약간이라도 손해가 올 것 같으면 데모부터 합니다. 길거리에 눕습니다. 길을 가로 막고 시위를 합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남의 불편쯤은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나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남의 손해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문제 입니다. 민주화라는 미명하에 사람들은 너무나도 자기의 이익에만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가 경제야 망하거나 말거나 호화스로운 외제 물건을 들여와 사고팔고 합니다. 나만 돈을 벌면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시대에 보상을 바라지 않고, 댓 가를 바라지 않는 충성스러운 사람을 발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은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는 말 한 마디에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상 없는 충성 자 입니다.
4. 또 이 사람은 "무조건의 충성 자" 입니다.
" 가서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제자들이 가서 "주께서 쓰시겠다." 하니 아무 말 없이 나귀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무조건의 충성 자 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주를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이유가 많습니까. 바쁘고, 시간이 없고, 형편이 안 되고, 사람이 마음에 안 들고, 적성에 맞지 않고, 이 핑계, 저 핑계 하고 그럽니다. 그래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용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이 필요 하다 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내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 입니다. 내 시간, 내 재능, 내 물질, 내 지식, 내 인생, 전부를 주님이 필요 하시다 하면 내어 놓아야 합니다. 무조건의 충성,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의 요구라면 조건과 핑계가 없는 무조건의 충성, 이것이 신앙인의 인생관 입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도맡아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귀 주인처럼 우리도 무조건의 충성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그리고 이 사람은 "참 기쁨을 아는 충성 자"입니다.
참 기쁨과 보람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섬김에서 드림에서 즉 봉헌함에서 나옵니다. 순교자는 자기의 목숨을 하나님께 바칠 때 그곳에서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습니다. 헌신 자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 질 때 기쁨과 보람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과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줄 때 기쁨을 얻는 것 입니다. 이것이 봉헌의 기쁨 입니다.
그렇다면 이 나귀의 주인은 자신이 귀하게 기른 나귀 한 마리를 주께 드림으로서 보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가 마침내 스가랴 8장에서 , 이사야서 62장에서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 하리라고 예언해 놓은 그 예언을 이루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영광 입니까.
우리는 지금 이 나귀 주인의 이름을 모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 입니다. 그의 이름은 알 수가 없지만 그는 무명의, 빛도 없는, 보상도 바라지 않는, 무조건의 참 기쁨을 아는 봉사자였다는 것만은 확실한 사람입니다.
그가 있었기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성공 서럽게 이루어 질 수 있었던 숨은 사람, 농촌 조그만 어느 마을에 이름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었던 사람, 바로 이 점이 오늘 우리들이 교훈 받아야 할 성경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한 무명인의 충성, 2006년도 주의귀한 일꾼 제직 성직들을 임명하면서 말없이, 이름 없이, 충성했던 이 사람을 생각하면서 이 땅 위에서 우리도 조용히, 그리고 충성스럽게 일하며, 살아가는, 충성스러운 종들이 되시며 신앙인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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