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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도(對馬島)는 한국 땅 ▒

예림의집 2008. 8. 18. 06:41

▒  대마도(對馬島)는 한국 땅 ▒

 

 

대마도(對馬島)는 한국 땅 
뉴라이트연합 성명서, ‘700년 전부터 우리 땅’
▲ 대마도.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대마도는 한국 땅이라는 주장이 나와......
뉴라이트전국연합은 18일 성명서를 통해 “본래부터 대마도(일본어로 "쓰시마 섬")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최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뉴라이트전국연합은 “후일 대한민국 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언젠가는 결국 일본의 청소년들과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서로 총칼을 겨누게 될 것”이라고 진단하면서 “700년 전부터 우리 땅”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만호(萬戶)벼슬 하사받은 대마도주 이종무의 정벌 내막”이라는 글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제대로 수호하지 못하고 우리 고유의 영토에 대한 지배와 경영을 효과적으로 처리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또 “그 결과 마침내 일본은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중학교 교육 지침으로 사용할 새 학습 사회과 해설서에 표기하므로 제국주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역사를 기만하는 영토탄찰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기에 이르렀다”며 일본을 강하게 성토했다.

나아가 “이런 후안무치한 주장을 일본의 청소년들에게 서슴없이 가르치려는 이유는 후일 대한민국 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언젠가는 결국 일본의 청소년들과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이 서로 총칼을 겨누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이런 일본의 행위는 한-일간의 비극을 잉태하고 있는 일이며, 의도가 선명한 침략이라 할 것”이라며 강하게 규탄했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성명서에서 마지막으로 “▲ 독도는 당연한 우리 땅이므로 여기에 대한 새로운 언급은 필요 없다 ▲ 그러나 대마도는 임진왜란을 이후로 일본 땅이 되었다. 약탈(掠奪)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시아 역사에 우리 땅으로 명기(明記)되어 있는 대마도 문제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한 번 대한민국 영토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교육을 우리 뉴라이트교사연합은 실시할 것이다 ▲ 일본이 중국과 체결한 간도협약 역시 무효이며, 북간도와 서간도 모두 대한민국 땅임을 천명(闡明)하고 이에 대한 교육도 병행(竝行)할 것”이라며 각오를 다짐했다.

한편 역사적으로 우리 영토는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등뼈가 되며 영남의 대마(對馬)와 호남의 탐라(耽羅)를 양발로 삼는다고 명기한 해동지도는 물론이고, 대동여지도, 조선전도 등 조선시대 지도 대부분은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명하기도 한다.

나아가 광복 이후 1949년 1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신년기자회견을 열고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한 적이 있었으며,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 작성 과정에서 51년 4월 27일 미 국무부에 보낸 문서를 통해 대마도의 영유권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요구를 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한 바 있다.

또한, 2005년 3월 경남 마산시 의회는 당시 외교통상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마도가 우리 영토임을 대내외에 각인시키고 영유권 확보를 목적으로 하며,1419년(세종1년)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해 마산포를 출발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6월19일 대마도의 날"의 조례 제정을 가결한 바 있다.

지난 7월 16일 한나라당 허태열 최고의원은 지도부 회의석상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영유권 주장의 예와 B형 간염 유전자의 유사성을 예로 들며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마도도 원래 우리 땅'

 정치권서 日의 독도 도발 대응론으로 제기

세종실록 등 사료 풍부… 19세기 日에 편입
 

정치권에서 독도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대마도(對馬島) 영유권을 주장하자'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 허태열 최고위원은 16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독도문제가 터질
때마다) 우리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똑같은 대응으로 가는 것이 안타깝다.
대마도도 우리 땅이라고 대응해 나가는 것이 역사의 흐름에 보면 의미 있는 주장'이라고
했다.
 
실제 대마도가 오래 전 우리 땅이었다는 기록은 사료에 많이 등장한다. '세종실록' 1419
년(세종 1년) 7월 17일조에는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했으니, 본래 우리
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對馬爲島, 隷於慶尙道之?
林, 本是我國之地, 載在文籍, 昭然可考)'는 상왕 태종(太宗)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태종
은 이어 '다만 그 땅이 매우 작고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이 살지 않았는
데, 왜인(倭人) 중 그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소굴을 삼은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책 1444년(세종 26년) 4월 30일조에는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牧馬地)'라는
기록이 등장하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만든 '팔도총도' 등 많
은 지도들에도 대마도는 조선 영토로 표시돼 있다. 고려시대부터 대마도 영주였던 종씨
(宗氏)는 한·일 양국 사이에서 중계 무역의 이득을 취하면서 왜구의 본거지를 이루기도
했다.
 

조선은 1419년(세종 1년) 1만7000명의 군사로 대마도를 정벌한 뒤 영토로 편입하거나
직접 세금을 거두는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으나 이곳이 경상도에 예속된 속방(屬邦)이라
는 의식을 계속 지니고 있었다. 15세기에 대마도는 계속 조선에 조공을 바쳤고, 16세기
까지도 대마도주는 정기적으로 조선 국왕을 알현하는 사신을 보내 조선으로부터 관직을
임명 받았다. 일본이 정식으로 대마도를 직할지로 편입한 것은 19세기 후반 메이지(明
治) 정부 때의 일이었다. 손승철 강원대 사학과 교수는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면
서 내놓는 근거보다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훨씬 풍부하다'고 했다.

  ▲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시한 1592년 일본의‘조선국지리도’중‘팔도총도’. 현존하
    는 지도는 1872년 재모사한 것이다. 지리적 개념이 부족해 독도(우산도)가 울릉도
    의 서쪽에 그려졌지만 명백한 조선 영토로 돼 있다. /조선일보 DB    
    (조선일보입력 : 2008.07.17 03:04))
 


 되찾아야 할 우리땅 대마도 개요

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 해안의 한국전망대에 오르면 부산이 보인다. 저녁에도 광안대교의 불빛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대마도에서는 우리 휴대폰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휴대폰이 터지는 곳은 우리의 영토입니다”라는 광고 카피 때문인지, 아니면 대마도에서 우리 휴대폰이 터진다는 스펀지 방송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일본측에서 방해전파를 쏘아 휴대폰을 차단시키고 있다.
 
부산에서 49.5km, 반면 규슈(九州) 후쿠오카는 147km 떨어진 이곳 대마도는 본디 우리 땅이었다. 이 섬의 웬만한 사찰에는 신라불이나 고려불이나 조선의 범종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 왕자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처형당한 박제상의 순국비, 조선 숙종 때 조난당해 목숨을 잃은 조선역관사(譯官使) 108명을 기리는 역관사비, “왜놈들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고 버틴 면암 최익현의 순국비, 정략결혼으로 대마도주(島主) 가문으로 출가한 덕혜옹주(고종황제의 딸)의 결혼기념비 등등 역사의 현장도 도처에 있다.
 
서울∼부산 간 고속철도(KTX)가 개통되면서 대마도는 서울에서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섬이 됐다. 서울에서 오전 6시에 KTX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 오전 10시반에 여객선으로 갈아탄 뒤 정오쯤 대마도 최북단 히다카스 항에 닿을 수 있다.

 

“대마도라는 섬은 본시 경상도 계림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땅이다. 이것은 문서에도 기록돼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땅이 몹시 좁은 데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관계로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자기들 나라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16세기에 조선 조정이 펴낸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도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쓰여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나라 영토에 포함시켰다.

▲ 2008년 7월 청주의 이대성씨가 공개한 조선 고지도. 이 지도는 1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당시 세계지도 격인 천하총도와 중국 전도, 조선을 8도로 나누어 한지에 인쇄한 10장으로 구성돼 있다.
8도 지도 중
강원도 지도에는 울릉도 바로 아래쪽에 독도를 우산(宇山), 경상도 지도에는 부산 아래에 대마도가 포함돼 있다.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는 ‘(우리 영토는)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對馬)와 호남의 탐라(耽羅)를 양발로 삼는다’고 명기했다.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했다.
 
대마도가 속주(屬州)라는 의식은 고려 때부터 있었다. 고려 중엽 대마도주에게 구당관(勾當官)과 만호(萬戶)라는 관직을 내린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본격적인 속주화 작업은 조선 세종 때 이뤄졌다. 1419년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만7000명의 대군을 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다.
 
1436년 대마도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우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코 도주를 태수로 봉했다. 그래서 18세기 초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한 신유한의 ‘해유록(海游錄)’은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가 조선 왕실로부터 도장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을 청해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藩臣)의 의리가 있다.
 
19세기 후반 일본 메이지 정부는 대마도를 일본에 편입시켰다. 1868년 대마번(藩)이 메이지 정부에 올린 봉답서를 보면 대마번이 조선의 번속국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조선에 대해 번신(藩臣)의 예를 갖추어 수 백 년 간 굴욕을 받았으니 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지금의 서계부터 조선이 주조해 준 도서 대신에 일본 조정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도장을 사용하여…”
 
정부수립 직후인 1949년 1월8일 이승만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해 현해탄에 거센 파도를 불러일으킨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의 요시다 내각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에게 이 대통령의 요구를 막아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이후 공식 문서나 외교채널을 통해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각국의 외교사절을 만날 때마다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와 함께 이 대통령은 바다에도 ‘이승만 라인’이라는 어업구역을 설정해 이를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붙잡도록 했다.
 
재일조선인 거류민단 대마도본부 이신연(李新演) 단장은 “이 대통령의 선언이 나왔을 때 대마도에 살던 일본 주민들은 ‘한국이 독립을 해서 미국의 힘을 업고 대마도를 차지하려고 한다, 이제 곧 일본사람들은 쫓겨나게 생겼다’며 크게 불안해했다”고 회고했다.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증거보다는 대마도가 한국 땅임을 입증할 수 있는 사료가 훨씬 풍부하다. 또한 독도에 대한 일본인의 역사적 인식보다도 대마도에 대한 한국인의 역사적 인식이 훨씬 깊다.
 
우리는 섬을 비워놓는 ‘공도(空島)정책’ 탓에 조선이 대마도를 영토적으로 복속시킬 기회를 놓쳤다. 그러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근거보다 한국의 대마도영유권 주장근거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
 
'대마도는 일본 땅,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말은 옳지않다. 독도도, 대마도도 모두 우리 땅이다.

 

대마도 논쟁  : 역사적 관점


  쓰시마 섬으로 불리는 대마도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 통신사등 외교적 활동이 활발했던 곳 중의 하나이다. 대마도는 남북으로 72km, 동서로 16km인 길쭉한 모습의 두 개 섬이다.
총면적은 714㎢. 이 섬은 일본보다는 한국에 가깝다. 한국 남단에서는 53km, 일본 규슈(九州)에서는 147km 떨어져 있다.


◇ 대마도는 어떤 땅이었을까?


*1642년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지도이다. 이 지도에 보면 동해안의 울릉도는 물론 대마도와 제주도등이 분명하게 우리영토로 표기되어 있다.


 
세종 24년(1442) 신숙주(1417∼1475)는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서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한후 돌아오는길에 대마도에 들리게 된다.   당시 대마도를 경유하는 것은 조선통신사의 주요 경유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종 2년(1471) '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저술했다.

'군(郡)은 8개이고 사람은 모두 바닷가 포구에서 살고 있다. 대마도의 포구는 82개나 된다. 남북은 3일이면 다 돌아볼 수 있고 동서 횡단은 하루나 반나절이면 족하다. 바다와 접한 사면은 모두 돌산이고 땅은 척박하다. 백성은 가난해서 소금을 굽거나 물고기를 잡거나 해산 물을 잡아, 팔아서 살고 있다. 종(宗)씨가 대대로 도주(島主)가 된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인 숙종 45년(1719),
신유한(申維翰)은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기록을 담당하는 관리)으로 일본을 다녀와 '해유록(海遊錄)'을 남겼다.

   '대마주(對馬州)의 별명은 방진(芳津)이라고도 한다. 토지는 척박해서 채 백물(百物·100백 가지 産物)도 생산되지 않는다. 산에는 밭이 없고 들에는 도랑이 없고, 터 안에는 채전(菜田·채소밭)이 없다.
오로지 고기를 잡고 해초를 캐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데, 대마도인들은 서쪽으로는 (조선의) 초량(草梁)에 모이고, 북으로는 일본의 오사카(大阪)와  나라(奈良)에 통한다. 동으로는 나가사키(長崎)에서 장사하니, 바다 가운데의 한 도회(都會)와 같다.'

 이와 같이 대마도를 기록한 이유는,
대마도는 조선의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그 문물이 잘 알려지지 않은탓에 상세하게 기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역사 기록' 대마도

 

▽삼국시대

대마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을 담고 있는 책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이다.

'
대마국은 구야(狗耶·가야)에서 강 건너 1000여 리에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인 대관(大官)은 비구(卑狗)라 하고, 부관(副官)은 비노모리(卑奴毋離)라고 한다. 대마도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절해의 고도다. 넓이는 대략 400여 리에 이른다.'

13세기 말 가마쿠라 막부시절 에는 총 11권으로 된  일종의 사전류인 '진대(塵袋)' 제 2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

반면 신라 실성 이사금때(서기 407년)에는 왜인이 대마도에 진영을 설치하고 신라를 위협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신라는 원정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해상원정이 어려움을 들어 포기하고 말았다. 따라서 5세기를 전후해서 신라는 대마도를 상실하였다고 볼 수 있다.
혹은 5세기 이전까지 대마도가 가야의 영토였다가, 금관가야가 몰락한 후 잠시독립하였다가 5세기에 이르러 일본에 복속되었다고 보는 견혜도 있다
.



▽ 고려시대

그러나 일본에 통일정권이 들어선 것은 이후 천년이나 지난 15세기 말엽이었다. 따라서 대마도는 독립된 지방정권 정도로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과연 역사적으로 일본의 역사에 가깝냐 아니면 우리역사에 가깝냐의 문제가 남는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 7월 기록
대마도 萬戶(만호)가 사자를 보내와 토산물을 진헌하였다. 윤 7월 강구사 이하생을 대마도로 보냈다.

공만왕 17년 11월
대마도 만호 송종경이 사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종경에게 쌀 1,000석을 내렸다.


이와 같은 기록을 단순한 조공관계에 의한 무역행위로 볼 수 도 있다. 하지만 고려의 제국주의적 성향은 그리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토 외의 지역에까지 관리를 파견하거나 관직을 하사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선종 2년(1085) 대마도주를 대마도 구당관이라 불렀고 제주도의 성주를 탐라 구당사로 불르기도 하였다. 즉 고려는 내륙지방은 직접통치하면서 섬지역에는 자치권을 어느 정도 부여하는 정책을 썼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려는 제주도와 대마도를 동등한 지위에서 속령, 혹은 속주로 관할하였던 것이다.


▽ 조선시대

 
태종은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명하여  당시 대마도를 불법점유하고 있던 왜구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항복을 권하는 諭書(유서)를 보냈다.
 '
너히들이 살고 있는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신라)에 예속되었으니, 본시 우리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고, 분명 상고할 수 있다. 만약 항복을 하지 않거나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병선을 동원하여 공격할 수 밖에 없다.'

 또 세종에게 양위한후에도, 대마도를 중심으로 한 왜구들의 피해가 근절되지 않자,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은 출정전의 군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敎諭文(교유문)을 내렸다.
'
대마도는 섬으로서 본래 우리 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어놀기 시작하였다.'

결국 태종(재위 1401∼1418년)은 왜구에 대해 강경책을 펼쳤다. 그는 왕위를 세종에게 양위했으나 군사권은 장악하고 있었음으로, 세종 원년(1419) 6월 17일,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다음은 대마도 정벌 이후 조선 관리인 강권선에게 일기도 영주 대내전(大內殿)의 관반(館伴)인 노라가도로(老羅加都老)가 한 말이다.
'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牧馬地 : 말 기르는 땅)이므로 대내전(大內殿)이 조선과 더불어 협공하여 대마도를 귀국(:조선)에 돌리고자 하다가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의 영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세종 2년(1420) 윤정월 10일 대마도주는 다시 사자를 보내, '만약 우리 섬(대마도)을 귀국 경내의 주군의 예에 의하여 주명을 정하여 주고 인신을 주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다하여 따르겠습니다. 왜적선이 침입이 극심함으로 대마도인을 거제도 등지에 가서 살게 해주고 하루라도 빨리 관원을 파견해 주십시오'라는 내용을 전달해 왔다. 

그에따라  조선은 13일 이후 대외적으로는 외무장관 일을 맡는 예조판서 허조(許稠, 1369∼1439)를 통해 대마도를 다시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그 군관에 대한 관례대로 관인(官印)을 사여하였다. 

  그런데 세종대왕 당시 대마도에 대한 직접 관리는 겨우 1년 3개월만에, 일본막부와 도주 소이전등의 항의로 인해 철회되고 말았다.
 이후 대마도에 관한 영토권은 다소 애매하게 전개된다. 대마도주는 일본막부의 체제에 따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선정부의 통제에도 따르는 이중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세종대왕 이후 조선은 정말로 대마도를 영토적으로 포기한 것일까?
 그것은 절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후기 이후 수없이 제작된 우리나라 지도에서 왜 대마도를 빼놓지 않고 우리영토로 표기 하였겠는가?
 물론 일본이 제작한 지도에는 대마도가 일본영토로 표기된 것도 있지만,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명기한 지도가 압도적으로 많다.

 또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 '팔도 전도'에는, 독도 뿐 아니라 대마도도 조선의 땅으로 나와 있으며, '공격 대상'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도 대마도를 자신의 땅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대마도 논쟁 - 잃어버린 우리 땅
 구한말 시대 일본이 일방적으로 편입

1859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으로 개항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유도에 의해 국내 정세가 크게 변했다. 이에 따라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도 일변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대마도가 대행하고 있던 조선과의 외교와 무역을 직접 관장하려 했다. 1868년 1월 3일 도쿠가와 막부의 조번체제(朝藩體制)가 붕괴하고 왕정복고·왕위 친정체제를 구축하려는 정변이 일어났다.

  이로써 웅번(雄藩)들은 판권봉환(版權奉還·왕정으로 복귀함에 따라 각번의 영주들의 영역권을 천황에게 바치는 것)에 들어가, 도쿠가와 막부의 제15대 장군인 도쿠가와 시게노부(德川慶喜, 1837∼1913년)도 정권을 개혁 조정에 반환하게 되었다.

1871년 8월 29일에는 폐번치현(廢藩置縣·막부 시절의 번을 없애고 근대적 지방 행정기관인 현을 두는 것)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외번부용(外藩附庸)의 대마도주 종의달(宗義達, 1847~1902)도 대마도를 판적봉환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종의달은 조신(朝臣)과 근위소장(近衛小將)이라 칭하고 이스하라(嚴原) 번지사(藩知事)가 되었다. 그러나 1877년 대마도는 나가사키현에 편입되면서, 현에 속한 지방 행정지로 격하되었다.

  


대마도 우리땅으로 표기한 고지도들
‘민족과 영토’ 展에 전시…독도 우리땅 표기 지도 ‘수두룩’

역사적 자료 없이 독도와 대마도가 우리땅이라고 외치는 울림은 공허하다. 서울 신문로에 위치한 화봉책박물관에서는 ‘민족과 영토’전이 열리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 일본, 프랑스, 영국 등에서 제작된 고지도 64점이 전시돼 있다.

이 64점 중
독도를 일본땅으로 표시하고 있는 지도는 단 하나도 없다. 전시된 일본 지도 13점은 모두 독도를 한국땅으로 표시하고 있다.

또한 대마도나 간도 지역을 한국 영토로 표시한 지도도 적지 않아 눈길을 끈다. 독도와 대마도가 우리땅이라는 증거들을 소개한다.


  • 1734년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지도다. 지도 제목은 중국, 중국인(China, Chinese)이다. 이 지도의 제작자는 당빌(D'ANVILLE) 프랑스에서 잘 알려진 권위있는 지도제작자다. 이 지도에서는 대마도를 'TWI-LI-TAU'라고 적고 한국 영토으로 표시했다.

  • 1904년 영국 런던에서 만들어졌다. 지도 제목은 한국지도(Map of Korea)다. 대마도와 두만강 위쪽의 간도 지역을 한국 영토로 소개하고 있다.
 
  • 독일 지도로 추정된다. 동해를 한국해(Mer de COREE, MEER VON KOREA)라고 불어와 독일어로 두번 표기했다. 대마도가 한국령으로 표시돼 있다.
 
  • 1815년 만들어진 지도다. 서양에서 제작된 것을 보이나 정확한 국가는 알 수 없다. 지도 제목은 일본과 한국(Japan & Corea)이다. 서양 고지도에서는 대부분 울릉도나 독도를 찾아 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 지도는 울릉도, 독도, 대마도를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고 모두 한국령으로 표기돼 있다. 또 에도시대, 한국인, 거북선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 삽화가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 1785년에 만들어진 일본지도. '일본 주변국의 국경과 형세를 알아 보기 위해 제작된 소지도'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이 지도는 일본 에도시대의 경제사상가이자 지리학자인 임자평(1738-1793)이 그린 지도다. 울릉도와 독도를 한국령으로 표기했다. 일본에서도 권위있는 지리학자가 울릉도와 독도를 한국의 영토라고 직접 표기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 19세기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지도다. 지도 제목은 일본도(日本圖)다. 한국땅은 노란색, 일본땅은 빨간색으로 표시했는데 울릉도와 독도에는 노란색(한국령)이 칠해져 있다.

 

  • 지도 제목은 중국(China)이다. 1794년 영국 런던에서 만들어진 지도(제작 R. Willkinson)다.
  • 한국을 Corea로, 동해를 Sea Of Corea로 표기했다.

 

  • 징기스칸의 역사와 영토를 나타내고 있는 지도로 프랑스 역사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 동해를 한국해(Mer De Coree)로 표기했다.

 

  • 1748년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중국지도다. 독일어로 번역해 출간한 것으로 보인다.
  • 동해를 한국해 (Mer De Korea)로 표기했다.

 

  • 영국이나 미국지도로 추정된다. 지도의 제목은 아시아(Asia)다.
  • 역시 동해를 한국해(Sea Of Korea)로 표기했다.

 

  •  19세기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지도다. 지도 제목은 여지도(輿地圖)다.  독도뿐 아니라 대마도 지금은 러시아 영토인 녹둔도(鹿屯島)도 우리나라땅으로 표시돼있다.

 

  • 18~19세기에 우리나라에서 만든 지도다. 지도 제목은 해좌전도(海左全圖)다. 독도뿐 뿐 아니라 대마도와 녹둔도가 한국령으로 표기돼있다.

 


해방 이후의 논의  이승만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


 엄격히 말하자면, 대마도는 우리나라의 분명한 영토라기 보다는 우리에게 우선권이 있는 영토 분쟁지역에 더 가깝다. 영토적으로는 우리나라 영토에 가깝다고 하지만, 그곳을 구성한 주민이나 직접적으로 관리한 대상은 일본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쟁의 소지로 인하여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1875∼1965)은 정부 출범 직후인 1948년 8월18일 전격적으로 '대마도 반환요구'를 발표하였다.
 그러자 일본에서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 이하 내각이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9월9일 재차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며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 발표하였다.

   이에 일본의 요시다 총리는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에게 이대통령의 요구를 막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이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를 전후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는 데 방해되는 언사로 받아들이고 이대통령의 발언을 제지했다.
 그 후 이대통령은 공식적으로나 문서상으로는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외교사절을 만날 때마다 대마도 영유권을 역설하였다.

 미 군정 시기인
1948년 2월 17일에 열린 제204차 입법의원 본회의에서 입법의원 허간용(許侃龍·서북도 관선의원) 외 62명은 대마도를 조선영토로 복귀시킬 것을 대일강화조약에 넣자는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정부를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 폭주로 연기되다 회기가 종결됨으로써 실현을 보지 못했다. 
 
 


마산시의회, '대마도의 날' 조례 제정


▷ 경남 마산시의회가 2005년 3월18일 일본 시마네(島根)현 의회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에 대응해 ’대마도의 날’ 조례를 제정, 국내외적으로 파장이 예상된다.
마산시의회는 이날 오후 제109회 임시회 본회의를 열고 ’대마도의 날 조례’안을 상정, 재적 의원 30명 가운데 출석의원 29명 전원 찬성으로 가결했다 이날 제정된 조례는 “
대마도가 우리 영토임을 대내외에 각인시키고 영유권을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조선조 세종 때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 정벌을 위해 마산포를 출발한 6월19일을 ’대마도의 날’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조례는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는 역사적 증거가 있으므로 이를 입증하는데 노력하고 필요시 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자료출처 : http://www.chosun.com]
 


현재의 관점


 그렇다면 대마도 영유권 주장은 과연 가능할까?
 대마도에 대한 영토권 분쟁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 이후 한번도 제기 된 바가 없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대마도 영토 소유권에 대해 최종 합의를 선언한 바도 없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그리고 국제법상으로 충분히 의의 제기가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정부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까? 정말 이런 역사적 사실을 모르거나, 혹은 영토 수복의 인식이 부족하거나, 그렇지도 않다면 친일세력이 여전히 정계와 제계에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일까?

 그러나 전혀 근거없는 음모론이나 정부에 대한 일방적인 불신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그들 중에는 국제법이나 역사에 대해 분명 뛰어난 전문가도 상당 수 있을 것이다.
  영토권 주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지이다. 만약 대마도 주민들이 일본으로부터 분리요구를 꾸준히 주장하고 있다면, 대마도 수복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 봐서 대마도 주민들은 완전히 일본인들이지 한국인들이라고 볼 수 없다. 설령 대마도를 국제분쟁지역화 한다고 하여도, 그들은 일본인임을 그리고 그곳은 일본영토임을 강하게 주장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며로 일본에 비해 외교적 열세에 있는 우리나라가, 그런 승산없는 싸움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 하다.
 

 그렇다면 이대로 대마도를 포기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일본은 우리영토임이 분명한 독도조차 자신들의 영토라고 억지 주장하며 동해를 분쟁지역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대마도가 우리영토로 귀속될 가능성은 없지만, 우리역시 대마도를 분쟁지역화 하여 충분히 일본을 외교적으로 압박할 수 있다.
 그것은 총성없는 전쟁, 외교 전쟁이다.

 물론 소모적인 논쟁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있지만, 대마도 확보는 일본에게 외교적 우위를 점할 수 있음은 물론, 앞으로 해양진출의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영해나 영공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지 않다.

 반면 일본은 일제시절 확보하였던 유구열도등을 자신들의 영토로 일방편입하여, 세계적인 해양강국으로 부상하였다. 일본이 확보한 배타적 경제수역이 중국의 몇배나 된다는 것은 매우 눈여겨 볼 만한 일이다.
 기껏해야 한 두평 밖에 안되는 암초를 섬이라고 억지 주장하여 수백km의 바다를 확보한 일본인들의 철저한  국수주의 정신은 기분나쁜 것이긴 하지만, 분명 참고 할만한 것이다 .
 
 우리는 대마도를 최소한 분쟁지역화 함으로써, 현재로도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배타적 경제수역 문제에 대해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나라는 대해양 진출의 발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