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를 받아주는 것
예수님이 우물가에 앉아 계실 때에는 그곳에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물을 긷기에는 햇볕이 너무 뜨거운 정오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정오에 우물로 가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새벽 세 시에 장을 보러 가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한마디로, 그 시간에는 마무도 우물에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앉아 계시는데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나타났습니다. 이 여인은 다섯 번이나 결혼을 했고, 지금 사는 남자는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경멸의 눈빛과 수군거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녀가 스스로 원해서 이 남성들과 이혼을 했을까요?
저는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당시 여성들은 마음대로 이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남편들은 어떤 이유로도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사연이 무엇이었든 그녀는 다섯 번 결혼했고, 그 모든 결혼은 실망스럽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모든 남편은 평생 사랑으로 돌봐 주겠노라 약속했지만 하나같이 그녀에게 상처만 입히고 떠나갔습니다. 그때마다 그녀는 지독한 외로움에 빠졌습니다. 혹시 당신이 새벽 세 시에 장을 보러 간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보지 않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여인도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마주쳤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의 흑역사를 몰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무조건 자신을 깔보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분은 남자고 그녀는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분이 그녀에게 말조차 걸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을 건네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절, "물을 좀 달라" 여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남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억양에서 유대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사마리아인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분은 그녀를 정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그녀를 받아 준다는 뜻이었습니다. 받아 주는 것은 영향을 미치는 첫걸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사람들을 보내 주실 때 그들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나 그들의 과거에 관한 무언가 때문에 그들을 경멸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경멸해서는 그를 예수님께로 이끌 수 없습니다. 자고로 경멸당하고 정죄를 받아 믿음에 이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로마서 15장 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수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신 것같이 우리도 남들을 받아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수 있습니다!
'ε♡з예림의집으로ε♡з > 단장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상적 대화에서 영적 대화로 (0) | 2023.06.26 |
---|---|
질문으로 대화의 물꼬를 트라 (0) | 2023.06.22 |
대화할 기회 찾기 (0) | 2023.06.19 |
다채로운 변명들② (0) | 2023.05.30 |
다채로운 변명들① (0) | 2023.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