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공의회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사도행전 15장 22-29절).
우리는 지난 세 개의 장에서 사탄이 어떻게 복음 사역을 방해했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적들의 방해로 인해 큰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선교여행 동안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렇게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무사히 돌아온 그들에게는 또다시 새로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일을 계속 방해하고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의 충돌은 한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탄의 계략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일을 파괴하기 위해서라면 조그마한 일이라도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적들의 공격이 유대교 교사들을 통해 안디옥 교회에 가해졌습니다. 그들은 남자가 모세의 율법을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은 안디옥의 성도들 사이에서 큰 동요를 일으켰으며, 그 결과 성도들이 많은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의구심은 이렇습니다. "첫째, 할례받지 않은 헬라인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 둘재, 모세의 율법은 성도들의 생활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셋째, 헬라 기독교인들은 유대인 기독교인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는가?"입니다. 이 같은 갈등이 교회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지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교리적 자만과 갈등을 통해 악의 씨앗을 교회에 뿌렸습니다. 그 씨앗들은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 사이를 분열시킬 것이고 언젠가는 교회 전체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었습니다. 사탄은 안디옥 교회가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전력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교회를 분열시켜 복음 사역 자체를 중단시키려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거짓 교사들에게 단호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2절은 그들이 거짓 교사들과 논쟁을 벌였지만, 결론을 얻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논쟁의 양편에 서서 서로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 이 문제를 논의하도록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00킬로미터를 여행해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거짓 교사들이 안디옥 교회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다가 베니게와 사마리아 지역에서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만난 바울과 바나바는 주님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을 어떻게 열어주셨는지를 그들에게 설명했습니다. 복음이 전파된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 관한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에 바리새파에 속한 성도들은 주님을 영접했지만 여전히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임했음을 확인했으면서도 유대인 교회에서는 여전히 바울과 바나바가 제기한 신학적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문제에 관해 토론을 벌였지만 쉽게 결론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7절은 그들이 오랫동안 토론했다고 기록하는데, 그럼에도 유대 기독교인들은 도무지 의견의 일치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서부터 율법을 지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나타나신다는 믿음을 버릴 수 없었으며, 또한 율법을 어겼을 때 받게 될 처벌도 두려웠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루아침에 율법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교회가 지닌 이 같은 의문점들에 대해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가 행한 증언들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됐습니다. 베드로는 모임에서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증언했습니다. 그는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서 일아난 성령의 역사를 다시 언급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에 이 사건은 오직 한 가지를 의미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그들을 인정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율법을 지키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에게 똑같이 임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도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기 전에 아무런 전제 조건이나 제한을 두지 않으셨기 때문에 교회도 그들에게 율법을 강요할 수 없음을 의미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이지 율법을 지킴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역설했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주어집니다. 구원은 그것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보이고,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와 상관없으며, 우리가 어떤 민족이고 어떤 인종 인가 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구원은 우리가 교회에 얼마나 자주 가는지 와도 상관이 없고, 우리가 주님을 위해 행한 일이나 이웃에게 행한 일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구원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구원에 관한 한 하나님은 우리의 기질과 업적은 고려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경건한 유대인이나 이교도로서의 삶을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우리에 대한 구원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실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 인정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의존할 뿐입니다. 이렇게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행한 베드로의 증언은 매우 급진적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조용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대 바울과 바나바도 그들의 경험을 공의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야기했고, 하나님이 이적과 기사를 통해 어떻게 구원을 이방인들에게 허락하셨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성령님은 조용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이 주제는 공동체를 분열시킬 만한 난해한 내용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그 모임은 분노로 휩싸이고 몸싸움도 벌일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화를 내고 서로 욕을 하는 상황도 벌어질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상대방을 흉보며 뛰쳐나가고, 어떤 이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들먹이며 아브라함에게 선한 것이 곧 자신들에게 선한 것이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만약 전통이 변해야 한다면 사신들이 교회를 떠날 것이라고 위협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모든 교회들이 부러워할 만한 서로가 연합하는 마음들이 그 모임을 이끌었습니다.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은 오직 성령님이 가장 중요한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주장하셨다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13절, 야고보가 일어나 아모스 9장 11, 12절을 인용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예언자 아모스를 통해 자신이 언젠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 즉,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세우실 것임을 백성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모두 주님을 찾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성경 말씀을 통해 베드로와 바울이 사역에서 경험한 내용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임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야고보는 또한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멍에를 지워주지 말라고 제안했습니다. 이 제안은 이방인들이 구원받고 삶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됨을 의미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방인들과 함께 교회 생활을 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일까요? 이 문제가 큰 혼란을 야기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율법을 의무감으로 지켜왔던 사람들에게 야고보의 제안은 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야고보는 특정한 기준들을 설정했습니다. 그것은 이방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우상에 바쳐진 고기나 목을 매어 죽은 고기와 피를 먹지 말도록 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이 음식들을 먹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5-2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이방 기독교인들은 특정한 음식을 먹을 때 조심함으로써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방 기독교인들은 비록 그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과 상관이 없다 할지라도 그들의 형제, 자매들의 관습을 인정해 줘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야고보는 이방 기독교인들이 비윤리적인 성 관습을 자제하도록 원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의 시대에 주님께 돌아온 이방 기독교인들이 매우 문란한 성문화 속에서 살았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헬라의 최고의 신인 제우스가 많은 여신과 여인들로부터 자녀들을 낳았다고 배웠습니다. 제우스는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아내들을 속이곤 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살아온 삶의 규범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서 주어진 규범과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이미 헬라 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방 기독교인들이 윤리적 규범에 있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랐습니다. 21절에서 야고보가 이 특정한 주제들을 언급한 이유는 공의회가 이방 성도들에게 율법의 멍에를 지우기 휘함이 아니라, 그들 중에 있는 유대인 성도들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알려 줍니다. 아직도 유대인 성도들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모세의 율법을 읽고 배우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모세의 율법에 관한 유대인의 관심을 인정해 줌으로써 관계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었으며, 그들은 율법 때문이 아니라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야고보의 제안은 사람들에게 인정되었습니다. 그래서 22절은 온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사람들을 안디옥 교회에 보내 공의회의 결론을 전달하기로 했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온 교회"가 이 결정에 동의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연합하는 마음들이 있었고 성령님의 사역은 결코 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다와 실라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 가서 공의회의 결정을 담은 사도들의 편지를 전하도록 선택되었습니다. 28절은 특히 흥미로운 구절인데, 이 편지에서 사도와 장로들은 이방인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는 것이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공의회는 모임에서 성령님의 사역을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공의회의 결론은 성령님이 역사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세 가지 방법으로 공의회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첫째, 공의회의 결정은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의 경험을 중시해서 내려진 것입니다. 이방인을 향한 문들이 열리고 성령님의 충만함이 그들에게 부어졌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위대한 일들이 일어났으며, 기사와 이적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런 일들은 성령의 역사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경험들을 통해 장로와 제자들은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시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 그렇다고 공의회가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의 증언과 경험에만 의존해서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는 모임을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가져갔습니다. 즉, 말씀을 통해 지금까지 벌어진 일이 아모스 선지자에 의해 예언될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들의 모든 경험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만약 성경이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의 경험들과 맞지 않았다면 공의회는 그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방인들 중에 일어난 사건들이 다 타당한 것임을 명백히 증명해 주었습니다.
셋째, 그들 중에는 성령의 임재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임을 통해 성령님이 역사하고 인도하신다는 느낌을 공유했습니다. 그날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된 것은 성령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날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된 것은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험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방인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는 것이 곧 성령님의 뜻임을 밝힘으로써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이들의 결정은 사람이 성과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31절, 안디옥 교회는 공의회로부터 온 편지를 기쁘게 읽었습니다. 공의회의 결정을 보면서 그들은 성령이 안디옥 교회에 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공의회의 결정에 대해 아무런 불평이나 다툼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거봐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라고 말하는 교만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방인이나 율법과 상관없이 주님 앞에 부름받았음을 알고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실라와 유다는 안디옥에 어느 정도 머물면서 성도들의 신앙을 북돋아 준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계속 남아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사탄의 공격이 실패했음을 보았습니다. 그 공격은 성도들 사이의 불화를 일으킬 만한 내용이었으며, 모든 교회를 잘못된 교리 속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패한 뒤 안디옥 교회는 우리 모두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습니다. 안디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서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관습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모든 일에 항상 의견의 일치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사탄은 또 그 상황을 가지고 성도들의 불화를 조장하려 했지만, 성령님은 성도들 사이의 조화와 배려를 이끌어 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교회 안에서 일하시는지를 알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 다름에도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는지를 스스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이 우리의 삶에서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 일 수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첫째, 충분히 의견을 나누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셋째, 서로를 배려하며 사랑하는 가운데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것입니다. 넷째, 결정된 사항에 대해 감사함으로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성경의 율법은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정표를 세워 주신 것입니다. 그 기준으로 우리는 율법을 삶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지 율법에 매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 안에 삶으로 자연스레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보았듯이 사탄은 어떻게 하든지 성도들을 분열시키고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늘 무장해야 합니다. 매일매일의 기도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기도를 꼭 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주님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심을 찬양합시다. 둘째, 성령님께서 교회 공동체 가운데 연합과 조화의 은혜를 풍성히 내려달라고 기도합시다. 셋째, 우리의 개인적 취향과 선입견을 제거하도록 성령님께서 이끌어 주시길 기도합시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분명한 뜻과 목적을 우리가 기꺼이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성령님의 충분하신 은혜와 인도로 교회 공동체를 이끄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든지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주시며 교회 공동체로 인도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예루살렘 공의회의 본을 따라 우리도 연합과 조화를 추구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개인 취향과 선입견들을 허물게 해 주시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고,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영적 무장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하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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