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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사람을 얻고자 하는 열정: 섬김의 원동력

예림의집 2021. 2. 13. 18:28

제4과 사람을 얻고자 하는 열정: 섬김의 원동력

 

성경 읽기: 마가복음 6장 30~34절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마가복음 6:30-34).

하루의 휴가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나갈 무렵의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분주한 일정이 이어지자 예수님도 지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인성을 보여주는 징표 중 하나였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루만 쉬자꾸나." 제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들 역시 지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 한 척을 찾아내서 호수 건너편으로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러는 동안 많은 사람이 호숫가로 내려왔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분을 통해 치유를 얻고, 다양한 방식으로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저런, 예수님이 떠나가고 있어!"라고 말하는 순간 그들의 얼굴은 실망으로 변했습니다. 잠깐 낙심한 채 그곳에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탄 배가 가는 방향을 주시하던 한 사람이 "나는 그분이 가시는 곳을 알 것 같아."라고 말하면서, 호수 건너편의 한 곳의 지명을 언급하며 외쳤습니다. "호숫가를 따라 뜁시다. 그러면 그분이 내리시는 곳에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무리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호숫가를 따라 달렸습니다. 그렇게 달리면서 사람들에게 말을 퍼뜨렸습니다. "주님께서 호수 저편으로 가고 계시다. 우리도 함께 가자!" 그러자 마을과 교차로에서 사람들이 뛰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무리는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호숫가를 돌아가는 길이 거리상으로는 멀지만, 시간상으로는 짧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호수 저편 모래땅에 뱃머리를 대고 주님이 하루의 휴가를 위해 그곳에 내렸을 때, 그곳에는 이미 5천여 명의 사람들(아미도 실제로는 1만여 명의 사람들)이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베드로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음과 같이 불퉁거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저들은 마땅히 주님께 하루의 휴식을 드려야만 해. 그분이 지치신 것을 못 본단 말인가?" 당신은 요한이 베드로의 말에 동의하며 분노에 가득 찬 음성으로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맞아, 저들은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당신도 같은 생각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그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와 너무나도 닮은 사람들이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몹시 지쳐 있었음에도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마가복음 6:34). 그리고 또다시 그날 하루를 그들을 가르치고, 대화를 나누고, 아픈 자들을 고쳐 주면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떠난 후에야 비로소 산으로 올라가셔서 낮 동안에 얻을 수 없었던 조용한 시간을 누리셨습니다.

 

연민에 의한 움직임

주님의 사역에 대한 이 짧은 이야기에서 그분에 대해 그리고 그분 자신에 의해 9번씩이나 쓰였던 단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연민"이라는 단어입니다. 나병 환자나 귀신들린 사람의 모습이 그분을 움직였습니다. 목자 없는 양 떼처럼 가엾게, 또 간절한 마음으로 그분을 뒤쫓던 큰 무리의 사람들이 늘 그분을 깊이 동요시켰던 것입니다. 주님은 죽은 아들의 시신을 뒤따르며 눈으로 피를 흘리듯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던 외로운 여인을 외면하지 못하셨습니다. 마음이 움직일 때면, 주님은 늘 무언가를 하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너무 깊이 열중하느라 자신의 육체적 피로를 깨끗하게 잊으셨습니다. 그래서 즉각 치유의 손길을 내미셨고, 귀신 들린 사람을 그를 묶고 있는 사슬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으며, 굶주림에 허덕이며 먹을 것을 찾는 군중에게 떡을 먹여 주셨습니다. 고통스러운 광경은 늘 그분을 움직였습니다.

특히 고통당하는 군중의 존재는 늘 그분을 자극하고 분발하게 했습니다. 주님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이나 지도자 없이 무력하게 헤매는 군중을 보면서도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당신의 도시 문화 같은 것에 대해서는 결코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그분과 관련해 사용된 "연민"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깊고 부드럽습니다. 실제로 영어에서는 그 단어가 흔히 "감정의 자리"라고 불리는 창자나 심장이 크게 동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그와 유사한 단어인 "동정"은 마음이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 문자적으로 말해 같은 괴로움을 겪는 것, 다시 말해서, 누군가의 고통이나 고난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그와 같은 고통을 자신 안에서 겪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영어 단어인 "공감”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 중 예수님만큼 사람들에 대해 깊은 열정을 지닌 이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그들의 고통스럽고, 죄로 가득 차 있는 곤궁한 삶으로부터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이끌어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얻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처럼 그분의 마지막 행위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마지막 말씀은 "가서 사람들을 얻으라"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세상과의 접촉으로 인해 온갖 상처를 입고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에 행하신 첫 번째 일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동안 자신을 움직였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행위가 사람들을 얻기 위해 죽는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주님이 죽는 과정에서도 육체의 날카로운 고통과 그보다 훨씬 더 날카로운 영혼의 고통을 잊은 채 옆으로 머리를 돌려 자기 곁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천국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분명히 그것은 사람들을 얻고자 하는 그분의 압도적인 열정, 즉 죽는 순간에도 강력하게 표출되었고, 그 죽음을 통해 더 강력해졌던 열정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의지함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발생했을 법한 장면에 대해 상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그분과 관련해 본 마지막 광경은 구름이었습니다.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와 그분을 사람들의 시야에서 감췄고, 그때 이후로 세상은 그분을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언젠가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셨던 방법 그대로 다시 오실 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이들은 그 일이 성경이 말씀하는 방식대로 일어날 거라고 강력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당신은 그 구름의 저편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은 이 세상으로 내려와 30여 년 남짓 사셨는데, 그것은 긴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천상에 있는 이들은 그들의 눈으로 주님의 얼굴을 다시 보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그들이 주님의 얼굴을 다시 보기 위해 몰려 내려오는 것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마와 뺨과 그분의 손과 발에 있는 상처들에 입을 맞추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나는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분명히 그런 일이 있었을 법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엉뚱한 상상을 해 봅시다. 어느 날, 주님께서 가브리엘 천사와 팔짱을 끼고 황금길을 걸으면서 열정적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그때 가브리엘이 묻습니다. "주님, 당신은 저 아래의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지." "당신은 아주 많은 고통을 당하셨어요." 가브리엘은 제거될 수 없는 상흔을 지닌 그 위대한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말합니다. "맞아." 주님은 경이로우면서도 깊은 감정이 실려 있는 음성으로 답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 모두가 그것에 대해 알고 있나요?" "오, 아닐세! 아직은 팔레스타인에 사는 몇 사람들 외에는 알지 못하네." "그렇다면 주님, 당신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당신이 세상을 위해 하신 일, 즉 당신이 그들을 위해 죽으신 일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그에 대한 당신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음, 나는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안드레와 요한 등 몇 사람에게 다른 이들에게 그 일을 널리 알리는 것을 그들의 삶의 목표로 삼으라고 부탁해 두었네. 그러면 그 다른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또 다른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일에 관해 이야기할걸세. 그렇게 되면 가장 먼 곳에 있는 마지막 사람까지 그 일에 대해 알아듣게 될 것이고, 그 이야기가 가진 감동적인 능력에 사로잡히게 될 걸세."

하지만 가브리엘은 이 땅에 사는 이들의 사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여러 번 세상과 접촉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약간 주저하면서 마치 자기가 그 계획을 수행에 따르는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이렇게 답합니다. "예, 좋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실패할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에 요한이 다른 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지 않을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20세기 초반에 그들의 후손들과 후계자들이 그 일을 그만두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자기들 일에 너무 바빠서 다른 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또한, 그들 중 몇 사람은 그런 일에 적합하지만, 어떤 이들은 절대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럴 때는 어쩌시겠어요?" 가브리엘은 자기 생각에 열중하느라 눈을 크게 떴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조용하고 경이로운 음성으로 답하십니다. "가브리엘아, 나는 다른 계획을 세워놓지 않았단다. 나는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단다."

 

매력의 비밀

예수님은 몸소 그런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 외의 다른 계획을 세워놓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재치 있게, 조용하게,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과 관련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실패로 만드는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이런 말이 매우 심각하게 들리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차라리 이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성경에 의지해서 분명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분에게서 계획의 천재성을 볼 수 있습니까? 그분은 자신이 이 땅에 사시는 동안 그분을 움직이셨던 그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또 사람들에 대해 깊은 연민을 지닌 채 사람들을 얻게 하려고 그분이 갖고 계셨던 것과 동일한 사랑의 마음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은 지속적인 연료 공급을 통해 더욱 지속적으로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은 열정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성령이 그런 열정에 미치지 못하는 무언가에 그치고 만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우리 주변을 흐리는 조류에 휩쓸리거나 그 빠른 물살에 잠겨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삶의 조류에 휩쓸리고 삼켜지는 것은 그와 같은 열정이 우리의 삶을 견실하게 몰아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람들을 몰아가거나 끌고 가거나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얻고자 하는 열정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논쟁이나 강요가 아니라 따뜻하고 매력적인 호소여야 합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은 자신에게로 엄청난 양의 물을 끌어들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아무도 물이 태양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소음도 먼지도 없습니다. 하지만 물은 태양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것은 태양이 가진 물을 끌어당기는 힘 때문입니다.

더욱 높은 차원에서도 그와 같은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즉 우리 안에도 사람들을 우리에게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주님께로 이끌어가는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오, 저런."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당신은 나를 제외해야 할 거예요. 나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거든요." 좋습니다. 당신은 성가시게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의 영이 우리를 소유하도록 허락한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자신의 매력을 나눠주실 것입니다. 변화된 삶의 참된 비밀은 "전가된 삶"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통해 바라보시고, 우리 얼굴에 그분 자신의 아름다움을 부여하시고, 우리의 인격에 그분 자신의 매력을 나눠주십니다.

 

별처럼..

성경에서 이런 일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언어를 보면 아주 흥미롭습니다. 얼마 전에 나는 다니엘서를 읽으면서, 사람을 얻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고 있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저 놀라우리만큼 매력적인 오래된 예언서를 새롭게 이해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책의 마지막 장에서 나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 말씀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말씀이 놀랄 만큼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며 내게로 다가온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은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다니엘 12:23). 다니엘서의 마지막 두 장에는 "지혜 있는" 자들이 네 차례나 언급됩니다. 문자적으로 그들은 교사들, 즉 스스로 진리를 배우고 인내하면서, 충실하고도 매력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그 진리를 가르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고 있는 무관심이라는 얼음 코트를 녹이고 그들에게 스며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모두 따스함을 간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낡은 세상은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속으로는 매우 허기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방향 전환을 시켜주는 자들을 많이 필요로 합니다. "그들은 빛날 것이다"라는 성경의 예언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줍니다.

그것은 모든 이들이 빛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야심을 품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직업이나 사회생활을 통해 남보다 더 빛나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어느 정도까지는 자신의 야망이 이루어짐을 보게 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같은 빛남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마음속에는 비통한 괴로움만 남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의 노력으로 빛난 삶을 살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얽혀 살면서 피 터지는 경쟁을 하기 때문입니다.

원한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빛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당신이 바라는 대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짧은 영광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당신 옆에는 타다 남은 막대기만 남게 됩니다. 그것은 당신의 입에 쓴맛만을 남겨 줄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이야기가 끝납니다. 이야기의 마지막 장이 끝나고 책이 덮입니다. 그렇지만 유일한 소망이 다른 이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던 이들은 이 세상의 하늘에서는 그다지 빛나지 않을는지 모릅니다. 사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전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별처럼 밝게 그리고 오랫동안 빛날 것입니다. 그 별들은 놀라운 불꽃들을 흔들면서 사람들의 얼굴 위로 쏟아붓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눈을 어질어질하게 만듭니다. 당신은 밝게 그리고 오랫동안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지혜

예루살렘 교회의 우두머리였던 야고보는 곳곳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다니엘이 했던 것과 같은 말로 마무리했습니다. 편지에서 그는 사람들을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는 자는 자신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뿐 아니라 그들의 허다한 죄를 덮게 된다는 사실을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야고보서 5:19, 20). 세상은 이처럼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돈 버는 면에서는 많은 성과를 이룩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모든 힘과 시간을 돈 버는 일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귀한 일은 바로 영혼을 구원하고 생명을 구출하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명성을 지녔던 솔로몬은 "사람을 얻는 이는 지혜롭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위대한 실험가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누렸으며, 지적 즐거움에 탐닉했고, 복잡한 철학의 온갖 문제들을 철저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개인이든 군중이든 사람들을 능숙하게 다루고 통제하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도 알았고, 아무도 맛보지 못했던 값진 포도주도 즐겼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지혜로운 자는 사람들을 얻는 일에, 즉 사람들이 옛적 에덴의 문을 통과해 생명의 나무까지 이르도록 돕는 일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 사람이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 거둘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결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삶 속에서 열두 가지 열매를 매달 맺게 되고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는 생명 나무(요한계시록 22:2)가 된다고 했는데, 개정역은 이 단어의 순서를 바꿔서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철학자는 바로 여기에 지혜를 위한 실제적 시험이 있다면서, 지혜로운 자는 사람들에게 인격적 영향을 주는 일에 자기 생각과 지혜의 가장 좋은 것을 쏟아붓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일은 심부름이 아닙니다. 최선 중의 최선을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실제로 각국 정부의 지도자 중 가장 강력한 이들은 남다른 예민함과 엄격한 정직성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과 관련해서 자주 언급되는 고기잡이 이야기는 보기 드물 만큼 매력적입니다. 사람들을 고기 잡는 식으로 다루는 것은 결국 지극히 개인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낚이는 사람 자신의 유익을 위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을 낚는 숙련된 고기잡이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즉 우리가 그들이 얻게 될 신선한 공기와 유익을 위해 그들을 낚아 언덕으로 끌어올리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과 활력과 정열로 가득 찬 이들을 그들의 친구이신 주님과의 교제 속으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고기잡이와 관련된 이야기 끝부분에서 주님은 아주 매력적인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누가복음 5:10). 하지만 개정역에는 이런 말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너는 사람들을 산 채로 취할 것이다." 그들은 죽은 고기가 아니라 생기와 생명력으로 가득 찬 살아있는 사람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을 새로운 삶의 고지로 이끌어갈 능력을 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핵심 사항

주님은 온전히 따르고자 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세 가지 핵심 사항이 있는데, 첫째는 그가 자신을 주님께 온전하게 항복하시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그의 모든 삶을 온전히 통제하시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항복이라는 단어는 너무 강해 우리는 그 단어가 의미하는 상황에 이르지 않고서도 더 나아질 수는 없는 것인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항복한 그 사람의 내면을 채워 주신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우리 인간은 오직 성령께서 우리를 가득 채우고 우리에게 영향을 줄 때만 그분처럼 사람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되고 그분이 늘 사용하셨던 것과 같은 훌륭한 책략을 취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매일 예수님과 함께 조용한 시간을 가지면서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모든 문을 닫아걸고 밖에 있는 것들은 그대로 밖에 놔두어야 합니다. 모든 문들을 닫아걸고 밖에 있는 것들은 그대로 밖에 놔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아를 주님과 함께 방 안에 머무르게 하는 것인데 솔직히 나는 이 방법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나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온전히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필수적인 요수인데, 그것은 석탄을 공급하고 타고 남은 재를 거둬내고 밑그림을 제조함으로써 불길에 계속해서 타오르게 하는 일에 시간을 쏟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로 중요한 핵심 사항입니다.

셋째는 어떤 하나의 목적을 다른 모든 일보다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하나씩 이끌어내서 그들이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아가게 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방금 나는 "애써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단어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실수를 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실수는 우리가 목적에서 벗어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더욱더 훌륭한 전문가가 되도록 이끌어가게 됩니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사회에서 활동하는 한 젊은 여인이 있다고 칩니다. 그녀는 한마디로 매우 밝고 매력적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스스로 질문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나의 주님을 위해 소중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 또한, 사회에서 사업을 하는 한 남자가 있는데 그는 사업상 숫자들을 다루고, 계약 조건들을 다룰 때조차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 세상 사람들의 삶 속으로 예수님을 모셔 드리는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