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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동료: 섬김의 리듬성경

예림의집 2021. 1. 30. 21:31

제3과 동료: 섬김의 리듬

 

성경 읽기: 마태복음 11장 28~30절

 

주님의 초대

예수님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 35개의 전도단을 파송하신 것은 그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기 6개월 전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돌아오자마자 자신들의 사역으로 인한 놀라운 결과들에 대해 기뻐하면서 보고했습니다. 마귀들조차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예수님 이름의 능력에 굴복했다는 보고였습니다. 그 보고를 들으신 후 예수님은 하늘을 올려다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감사하나이다"(마태복음 11:25). 이어서 주님은 마치 당시의 그 무리를 보고 계시는 듯한 표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복음 11:28-30).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종류의 초대가 들어 있는데, "오라"와 "메라"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도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무거운 짐을 나르느라 수고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쉼을 얻고 난 후 예수님의 멍에를 배우라는 요청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두 종류의 초대 중 첫 번째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예수께로 와서 그분의 손에서 달콤한 쉼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상은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첫 번째 초대의 말이 끝나는 곳에 마침표를 찍고 그곳에서 완전하게 멈춘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이 범주에 속합니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당신에게 좀 더 나아가 나와 함께 그의 두 번째 초대의 말씀, 즉 "나의 멍에를 메라"라는 말씀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예수님은 몇 가지 서로 다른 말씀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자신에게 이끄셨습니다. 첫 번째 말씀을 초대입니다. 즉 "다 내게로 오라."라는 것인데, 이것은 구원과 생명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내게 배우라"라는 제자도 안에서의 훈련을 의미하고, "나와 함께 멍에를 메라"는 가장 긴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런가 하면 "내 안에 거하라"라는 말씀은 우리를 풍성한 삶 속으로 이끌어가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는 가라"라는 것은 세상을 위한 섬김을 의미합니다.

 

삶의 법에 대한 항복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좀 더 검토해봅시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라."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씀일까요? 멍에라는 말의 의미는 어디에서나 같습니다. 그것은 "항복"과 "지배"를 의미합니다. 두 나라 사이의 전쟁에서 약한 나라가 싸움에 져서 굴복할 경우, 우리는 그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의 멍에를 멘다고 말합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붙잡은 전쟁 포로들에게 멍에를 메게 함으로써 그들의 승리를 과시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히브리 사람들은 로마인들이 강요한 고통스러운 멍에를 상처 난 어깨로 짊어진 채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강조점이 "나의"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지금 너희는 멍에를 메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멍에를 벗어던지고 대신 나의 멍에를 메거라." 멍에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가축의 머리나 목에 얹어 짐을 끌도록 하는 나무 막대 또는 나무 틀"을 말합니다.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상호 간의 협정과 자발적 동의를 통해 한 사람이 다른 이에게 굴복할 경우, 그 순종에는 훌륭한 의미가 담겨 있는데 예수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런 종류의 순종입니다. "네 머리를 숙여라, 목을 구부려라, 설령 네 목이 뻣뻣해서 제멋대로일지라도, 그것을 내 멍에에 맞추고 너의 주님인 나에게 순복하라!"라는 단호한 명령을 하십니다. 비록 단호한 명령이지만, 그 안에는 뜨거운 사랑을 품은 명령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순종! 그것은 폭력처럼 보인다. 나의 구원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순종이란 모든 삶의 원리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순종은 군대 생활의 법입니다. 군대에서 모든 이는 그의 상관에게 복종해야 하는데, 여기서 복종이란 그 분대의 우두머리가 부대원의 모든 것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군 병사가 군함에 승선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행동을 비롯한 생명 전체에 대한 통제권을 그 군함의 함장에게 절대적으로 내맡깁니다.

또한, 순종이란 공적이고 정치적인 삶의 법이기도 합니다. 어느 부서의 장관이 되어 대통령의 내각에 들어간 이는 그가 가진 다양한 견해들을 대통령의 의견에 맞춰야 합니다. 강한 개성을 지닌 이들이 모인 곳에는 늘 자유로운 생각들이 교차되기 마련이지만, 강력한 정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지배적인 의지가 있어야만 합니다. 은행이나 공장 혹은 어느 기업에 입사한 사람은 책임자의 뜻에 따라 행해야 하는 것처럼, 어떤 조직이 강력하고 성공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지배적인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제 나는 목소리를 낮춰, 보다 신령한 문제들에 대해 말해보려고 합니다. 순종이란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고상한 삶의 양식에 관한 법입니다. 결혼생활을 예로 들어 봅시다. 결혼생활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순종이란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것이지만, 언제나 두 개의 의지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 둘은 하나입니다. 결혼생활에서는 두 사람이 오직 하나의 목적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선생과 철학자들보다 훨씬 우대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실 때, 그분은 우리에게 삶의 기본 방침을 세워주고 계신 셈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의지를 자신의 의지에 굴복시키라고, 또한 우리의 삶과 계획과 야심과 우정과 재산 모두를 전적으로 자신의 통제 아래 맡기라고 요구하십니다.

 

자유로운 항복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순종"이라는 말을 좋지 않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 단어는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는 거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그 짧은 말씀의 첫 번째 단어인 "메라"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날카롭고 거친 음성으로 "이리로 와서 나에게 굴복하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만약 원한다면, 너 자신의 의지로 기꺼이, 자유롭게, 그리고 쾌활하게 멍에를 메라."라고 요청하십니다. 군대에서의 항복은 강제된 것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순종이란 자유로운 것입니다. 주님에게는 자유로운 항복 외에는 아무것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만을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자유롭게 기쁜 마음으로 바쳐진 것 외에는 아무것도 원치 않으십니다. 자발적인 순종과 자발적인 추종자만을 원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혹시 "자비란 여과되어 나오지 않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는 부드러운 빗물처럼 흘러내립니다."라는 말을 기억합니까? 즉 자비가 여과기를 통해 강제로 나온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비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한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멍에를 메라."에서 "나의"라는 단어를 주목하기 바랍니다. 솔직하게 말하지만, 나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사람 중 그 누구에게도 나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넘겨줄 생각이 없습니다. 또한, 그들 중 누군가의 삶을 주관하는 자가 될 생각도 없습니다. 위대하시고 밝은 빛으로 가득 찬 얼굴을 갖고 계신 주님이 오실 때,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 어떻게 느낄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물론 많은 사람이 그분에게 열정적으로 반응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우리의 의지를 모으고 힘을 합해 아무도 견줄 수 없는 주님께 열정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열정으로 주님이 주신 멍에를 메게 되리라 믿습니다.

 

멍에를 통한 섬김

농장에서 사용하는 멍에는 곧 섬김을 의미합니다. 소들은 주인을 더 잘 섬기기 위해 멍에를 멥니다. 그것은 게으름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섬김을 위한 의지적인 항복입니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항복이란 말은 종종 강제된 게으름과 밀착된 감시하에 묶여 있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경우의 항복, 즉 순종은 훨씬 높은 차원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삶에 대해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나는 이 놀라운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늘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것은 주님이 깊은 사려를 통해 우리 각 사람의 삶을 살피시고 또한 총체적이면서도 상세한 계획을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종종 우리 곁에 다가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안다. 나는 줄곧 너에 대해 생각해왔다." 그러면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의 계획을 위해 네가 필요하구나. 나의 계획을 이룰 수 있도록 너의 삶과 모든 능력에 대한 주권을 내게 넘겨라." 이것이 바로 섬김을 위한 순종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멍에를 통한 삶이고, 멍에를 통한 교제이며, 멍에를 통한 섬김입니다. 이 섬김은 하나님을 위해 사람이 감당하기보다는 주님과 함께 행해집니다. 주님은 결코 누군가를 홀로 보내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거진 덤불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으시면서 가시나무 수풀을 옆으로 밀어내시고, 길을 닦으신 후에 비로소 자신과 함께 길을 갈 사람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함께 가자, 너와 나 둘이서!"

나는 어느 모임에서 한 사내가 일어나서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로드아일랜드에 있었던 일이었는데, 그는 그 지방의 늙은 농부였습니다. 그날 저녁에 그는 자신이 인생의 늦은 시기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심지어는 집 안에 있는 고양이까지도 자기 안에서 발생한 삶의 변화에 대해 알아차렸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내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더욱이나 그 말은 내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그 말이 동물들에게도 앞으로 더욱 좋은 날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 같은 삶의 목적에 변화가 생긴 다음 날 아침에 그는 자기 농장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로 걸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더욱이나 주님에 대해 생각하느라 즐거운 마음이 들어 혼자 흥얼거리며 길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불현듯 앞에 보이는 어느 술집에서 나오는 냄새를 맡았습니다. 아직 그 술집을 육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훈련된 코가 먼저 그 냄새를 맡았던 것입니다. 그 냄새는 아주 강렬해서 그를 강하게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가 그 술집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전에는 그 술집을 그냥 지나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어서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기억해요. 그리고 '주님, 당신이 나와 함께하셔야 합니다. 당신이 내가 그 술집을 그냥 지나칠 수 있도록 도우셔야 합니다. 나는 나 혼자 힘으로는 결코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죠." 이어서 그는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들어오셨고, 우리는 함께 그 술집을 그냥 지나쳤어요. 그때 이후로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함께 있어요."

그 늙은 로드아일랜드의 농부는 참된 삶에 대해 완전하고도 단순한 철학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유혹을 날카롭게 느끼시고 또한 능히 극복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문제, 모든 어려움, 그리고 모든 기회에 대해 알고 계시며, 그것들이 잇는 곳에 그분도 계십니다. 그분은 그곳에서 우리와 함께 리듬에 맞춰 팔을 흔들며 걷고 계십니다. 바로 그것이 멍에를 통한 삶이며, 멍에를 통한 섬김입니다.

 

항복의 흔적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내게 배우라." 나는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늘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조건부 노예제도가 있었는데(출애굽기 21:2-6; 레위기 25:39-43; 신명기 15:12-18). 그것은 노예가 6년간 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나면 노예 신세를 면할 수 있었던 제도였습니다. 그래서 7년째 되는 해 첫날 그는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어, 약간의 곡식과 기름을 얻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아침이 되었는데도 그가 주인의 집을 떠나기를 주저한다면, 그 노예는 주님에게 이런 요청을 했을 것입니다. "저는 주인님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이곳은 저에게 제집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주인님을 사랑합니다. 도 이곳도 사랑합니다. 저의 모든 인연과 애정이 이곳에 있습니다. 저는 영원히 주인님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그러면 주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인가?" 다시 노예가 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영원히 당신께 속하고 싶습니다."

그 후에 주인은 그에 대한 증인으로 마을의 지도자나 이웃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그 종을 문가로 이끌어가 그곳 문설주에 세운 후 그의 귓불을 송곳을 뚫어 문설주에 박았습니다. 나는 그것이 신발 제작자의 송곳이었으리라고 추측합니다. 그러고 나면 그 남자는 영원히 그 주인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주인에 대한 인격적인 항복이었습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순종으로 섬김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시편 40편에서 당신은 예수님에 관한 내용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시편 40:6). 그리고 이사야 50장에도 예수에 관한 유사한 예언의 말씀이 실려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이사야 50:5, 6).

 

진정한 순종의 모습

진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생각이 불타오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항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즉 창조주이시며 인류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분이신 그분이 지금은 그저 평범한 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분은 그보다 훨씬 위대하신 분입니다. 선생으로서의 그분의 지혜, 그분이 조용하게 내리는 판단, 그분의 순결한 삶,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그 놀라운 능력 등을 고려한다면, 분명히 그분은 모든 인류를 능가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위대하신 주님이 지금은 스스로 항복한 사람의 모습으로 서 계십니다.

요한이 쓴 복음을 읽어나가다 보면 주님의 입술을 통해 나온 부정어들, 즉 "아니다"라는 말들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그분 자신의 뜻이 아니다.", "그분 자신의 말씀의 뜻이 아니다.", "그분 자신의 말씀이 아니다.", "그분 자신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분 자신의 일이 아니다." 등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낮추시며 하신 말씀들입니다. 주님은 다른 누군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온갖 놀라운 능력을 갖고 계신 주님은 다른 이가 바라는 일을 하는 데 완전히 몰입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한 것처럼 행하라. 내게 배우라 나는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 완전히 헌신했다. 너희는 나에게 완전히 항복하라. 그러면 우리가 함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나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순종의 모습입니다.

현실적인 성향을 지닌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꽤 괜찮은 소리로 들리기는 해. 하지만 조금은 환상적인 말이 아닌가? 예수님의 귓불은 결코 뚫린 적이 없거든, 안 그래?" 맞습니다. 아주 옳습니다. 주님의 순종의 흔적은 고대 히브리 노예들처럼 그분의 귀에 있지 않습니다. 그 흔적은 그분의 뺨과 이마와 등과, 옆구리와 손과 발에 있습니다. 그분의 얼굴과 모습 전체에 새겨져 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항복하는 자는 누구나 흔적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원칙적으로 죄 대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사역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난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징표라고 표현합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라디아서 6:17).

주님 자신의 흔적이라 할지라도, 흔적은 흔적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순종을 십자가 위에 던져진 자신의 몸으로 말씀하셨고, 여전히 말씀하고 계신 상처 입은 예수님이 지금 우리 안에 계십니다. 넓게 벌린 팔과 사람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가슴을 갖고 계신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제발 나와 함께 멍에를 메거라. 내가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면서 너의 모든 능력을 통제할 수 있게 하라."

 

리듬을 통한 전력투구

그 후에 예수님은 그로 인한 모든 결과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어떤 이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쉼이나 평안의 필요를 그다지 느끼지 않아. 오히려 나는 힘을 원해." 여기서 주님은 상황의 핵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즉 힘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평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평안을 누릴 때, 사람들은 당신에게 진정한 힘을 보게 됩니다. 당신이 내면적으로 평안을 누릴 때, 사람들은 당신의 삶과 섬김과 인격으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힘을 의식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평안과 힘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것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한 강물의 서로 다른 움직임입니다. 하나님의 재가 당신과 훌륭하게 조화를 이룰 때 당신은 평안을 누리게 되고, 삶 속에서도 힘이 솟구치게 됩니다. 그 강의 내적인 흐름은 평안이며, 외적 흐름은 힘입니다. 따라서 평안 없는 힘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불화만큼 힘을 방해하고 지연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기계의 작동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계 바퀴들 사이에 낀 작은 돌로 인해 생긴 마찰이 기계 전체의 작동을 가로막지 않습니까? 제자리에서 빠진 작은 너트 하나가 기계를 완전히 멈춰 서게 하고 그 기계가 가진 모든 힘을 소용없는 것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심장의 기능에서도 같은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심장은 생명의 핵심이자 성채입니다. 심장이 쉬면 다른 모든 것도 쉽니다. 또한, 성채가 점령된다면 성 밖에 있는 것들도 다 점령된 셈입니다. 진정한 쉼은 평범한 삶 속에서 누리게 됩니다. 당신의 존재 속으로 하나님의 위대하고 향기로운 평안의 바람이 불어올 때, 당신은 그 사실을 제일 먼저 알아차립니다. 섬김 안에 진정한 쉼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멍에"와 "쉼"은 서로 마찰을 일으킬 것처럼 보입니다. 그 둘은 절대로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매우 잘 어울립니다. 마찰은 멍에나 쉼 속에 있지 않고,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오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멍에는 일을 의미하고 쉼은 일의 중단, 즉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고 여깁니다. 이 같은 많은 오해가 초래된 것은 우리 내면에 있는 죄의 상처 때문입니다. "쉼은 분주한 일을 그치는 것이 아니다. 쉼은 우리 자신을 더 분주하게 일하도록 활력을 주는 것이다"(존 설리반 드와이트).

참된 쉼은 서둘지 않는 리드미컬한 행동 속에 있습니다. 당신은 심장이 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물론 심장은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쉬는 것입니다. 즉 박동 사이에 쉬는데, 한 번 뛰고 한 번 쉽니다. 힘찬 고동 뒤에 찾아오는 쉼, 몸의 복잡한 조직을 통해 따듯하고 붉은 피를 전달하는 강력한 동작 뒤에 이어지는 차분한 쉼, 우리가 심장이라고 부르는 이 기관이 가진 측량할 수 없는 힘의 비밀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정상적인 인간의 심장에는 견고한 그 무엇도 부숴버릴 수 있을 만한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제대로 집중해서 작동하는 경우 말입니다. 그 힘의 비밀은 움직임과 쉼을 결합시키는 활동의 리듬에 있습니다. 우리는 색깔의 리듬을 아름다움이라고 부릅니다. 소리의 리듬은 음악이고, 활동의 리듬은 힘입니다. 바로 이 리듬이 힘의 원천입니다. 온전한 리듬은 자연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삶의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과 온전히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 사람은 평안이 가져다주는 황홀경과 함께 그 능력의 실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당신은 마음 안에서 오래된 바위만큼이나 안정적인, 꽃들의 오묘한 향기처럼 마음을 유쾌하게 해 주는, 그리고 엄마의 가슴에 안긴 아기처럼 평화로운, 하나님이 주시는 크고 잠잠한 평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평안이시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보다 훨씬 더 훌륭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제공하실 때는 늘 인격적으로 하시기 때문에 늘 인격적인 터치와 임재가 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스페인과의 전쟁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카리브해에서 스페인 상선 하나가 미국의 전함에 의해 나포되었습니다. 미국 전함은 항복을 요구하는 의미로 상선에 총을 몇 발 쏘아 알렸습니다. 그러자 그 상선의 돛대 꼭대기에 걸려 있던 스페인 국기가 내려졌습니다. 항복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 후에 이루어진 절차와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몇 사람의 장교들이 미국 전함에서 내려와 보트를 타고 물길을 가로질러 나포된 배 위에 올라갔습니다. 나포선의 장교들이 그 배에 발을 내딛는 순간 미국의 정부의 이름으로 그 배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그 외국인들의 항복과 이제 그 두 배 사이에 존재하는 강제된 평화를 의미합니다.

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동안 나의 돛대 꼭대기에는 내 얼굴이 커다랗게 그려진 깃발 하나가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다른 누군가에 대한 항복의 의미로 그 깃발을 신속하게 내리자, 상대방이 갑판으로 올라와 나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대표하도록 보내신 성령이십니다. 그분이 즉시 배에 오르십니다.

배의 주인이신 성령께서 갑판으로 천천히 걸어가십니다. 그분의 임재는 평안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에베소서 2:14).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갈라디아서 5:22). 그분이 선장석에 앉아 계시고 배 위에 있는 모든 것이 그분을 향해 온전하고도 즐거운 순종을 바칠 때 그 배의 모든 곳에는 평안과 완전한 능력의 아름다운 향기가 흘러넘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