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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믿으면 사랑하게 됩니다

예림의집 2020. 8. 12. 20:45

제대로 믿으면 사랑하게 됩니다

 

1. 십자가의 복음을 깨달은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2. 사랑의 열매는 이렇게 맺어집니다.

①자기 자신 안에 사랑이 없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②사랑하게 해 달라고 몸부림치며 기도하게 됩니다.

③하나님이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사도 요한은 흔히 '사랑의 사도'라고 불립니다. 그가 쓴 복음서와 서신들 곳곳에 사랑을 강조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한일서 3:14). 우리가 영생을 얻는 조건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영생을 얻는 조건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영생의 조건이라 합니다. 요한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하고 말하는 것은 요한일서에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다"와 동일한 말입니다.

이 두 표현은 모두 '구원에 이른다'라는 뜻인데 왜 요한복음에서는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말하고, 요한일서에서는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라고 말했던 것일까요? 이 두 책 사이에 사도 요한의 생각이 바뀌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말을 한 것인데 그 표현을 다르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나와 같은 죄인'을 사랑하셔서 자녀로 삼아 주신 주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그런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통해 구원하셨다면, 그것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렀다면 그 사람 삶의 모습은 사랑일 수박에 없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한일서 3:16).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으로 참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아들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매우 엄격한 아버지는 거짓말하는 아들에게 매를 들었는데, 매가 열 대가 되고 점점 늘어나 백 대까지 때리게 되었습니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때렸지만 아이도 울고 때린 아버지도 울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목사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항상 잘했니? 네가 잘못했을 때마다 매를 댔다면 너는 어떻게 됐겠니?" 그제야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의 복음이 마음 깊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또 거짓말을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탕자를 위해 잔치를 베푸신 아버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온 집 안을 풍선으로 장식하고 '웰컴'이라고 써 붙이고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아들은 '오늘은 진짝 죽었다.'라고 생각하며 집에 들어왔는데 잔치 분위기에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안고 사랑한다면서 울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알 것 같았습니다. 아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래도 목사님은 계속하여 사랑을 표현하고 고백하며 때린 것에 대해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변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제껏 해보지 않던 농담을 걸어왔습니다. 목사님은 비로소 이 아이가 자신을 아버지로 여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모든 교인에게 적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십자가의 복음을 깨달은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믿었다면, 그 사랑 때문에 자기 역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마땅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믿으므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말을 '사랑함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라는 말로 바꿔 쓴 것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믿음은 사랑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믿음만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인데 사랑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이 아직 그의 삶에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의사였던 제임스 홀과 로제타 홀은 아주 미개한 나라의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이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제임스 홀은 밤낮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그런데 환자를 돌보다가 전염병으로 제임스 홀이 먼저 하나님 품으로 갔습니다. 아내였던 로제타 홀은 큰 슬픔 속에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들과 로제타 홀, 그리고 뱃속의 딸이 있었습니다. 그를 파송한 교회는 큰 슬픔에 빠졌지만 이 교회는 제임스 홀과 함께 그 나라를 가슴에 품고 더 많은 기도와 후원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내였던 로제타 홀이 돌아와 보니 사람들이 더욱 간절하게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또 상당한 금액의 헌금을 준비해 두고 새로운 선교사 파송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로제타 홀의 뱃속에 있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너무나 예쁜 딸, 에디스 홀 이었습니다. 로제타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남편을 보낸 그 나라로 다시 갔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에 들어오자마자 그녀의 아리따운 딸 에디스 홀은 풍토병으로 어머니보다 일찍 천국에 갔습니다. 그 땅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딸을 하나님께 보낸 로제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약 주님이 사랑하는 딸을 데려가시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을 더 잘 의지할 수 있었을 텐데, 이것은 선교사들이 두려워하는 현실이란다. 어쩐지 엄마는 너를 잃은 이 상처를 의지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단다. 불쌍한 바보 같은 이 엄마, 주님은 엄마를 계속 가엾어하시는구나." 그녀는 딸을 잃은 아픔 속에 흔들리기도, 마음 아파하기도 하였지만, 그녀의 딸을 묻으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와 셔우드 홀은 이 땅에서 오래 사역하고 싶습니다. 우리를 사용해 주세요."

그녀는 84세 때가지 그 나라 가운데 하나님이 소개 되도록 일하였습니다. 결핵 환자를 위해 여성들을 위해 일했고, 학교와 병원을 수도 없이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딸 옆에 잠들었고 천국에 갔습니다. 그녀의 기도와 두 선교사의 희생으로 그 땅에 병원과 학교가 세워지고 그 나라는 주님을 아는 나라가 되었고 끊을 수 없던 가난의 나라에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보내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바로, 100여 년 전에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던 '대한민국'에 온 로제타 홀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어 했던 수많은 선교사님의 삶이 이 나라에 심어져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보이셨던 것이 단지 믿음뿐이었다면 복음이 이 땅에 심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선교사님들은 자신의 남편, 아이, 아내까지 이 땅에 묻으면서까지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이 땅의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믿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믿음은 같은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너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40). 우리의 힘으로 사랑하려면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성령님이 우리 안에 사라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데는 다음의 세 단계를 거칩니다.

첫째, 자기 자신 안에 사랑이 없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실제로 우리의 자아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입니다. 우리는 사랑마저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사랑하게 해 달라고 몸부림치며 기도하게 하십니다. 오로지 나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자아의 실상이 감추어져 있다가 그대로 드러나면 큰 좌절을 겪게 됩니다. 그러면 몸부림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자신에 대한 절망의 과정을 거치면 비로소 우리의 옛사람이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온전히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었던 내가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이제 예수님의 새 생명으로 사는 존재임을 인정할 때 하나님이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라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가 사랑입니다.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이며 진짜 예수 믿는 것입니다.

지금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렇게 고백해 봅시다. "주님, 저는 죽었습니다! 주님 맺힌 마음을 풀지 못하는 저는 죽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옹졸한 저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김용의 선교사님이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순회선교단으로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게 복음의 영광을 깨닫고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로 인해 어려움이 생겼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분명한 믿음이 있는데 사랑이 없고, 남을 위한 희생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였습니다.

계속해서 사역들은 늘어나는데, 정작 자신들이 옆에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죽이지 못하고 희생 하나 못하는데 무슨 사역을 하겠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성만찬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주님이 자신의 살과 피를 뜯기시고 흘리셔서 내가 살았다는 사실이 깊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만 하신 것이 아니고, 이 복음을 들은 내가 주님으로 사는 사람이니깐 나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을 뜯기고 피를 흘리면서 살아야 하는 거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한 마디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나 잡아먹고! 너 살아라!" 이 고백을 외치니 아무리 힘들게 하는 사람 앞에서도 아무리 어렵게 하는 사람 앞에서도 사랑으로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나 잡아먹고 너 살아라!"라는 고백이 진짜로 십자가에서 자아가 처리된 사람이 외칠 수 있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말하거나 불평한 적은 없습니까? 혹시 가족이나 친구들 중에 도무지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십자가의 사랑으로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고 실천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