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①기도의 시작은 주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②기도의 이유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③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십니다.
④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⑤기도의 목적은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9-13),
1. 기도의 시작
기도의 시작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그의 이름이 거룩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기도의 시작은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기도의 가장 심각한 오해는 응답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시작이 응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의 시작은 주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기도에는 응답되지 않을 기도가 없습니다.
"구하였으면 받을 줄로 알라!"는 말씀도 동일합니다. 우리 믿음에 문제가 생긴 것은 우리 기도의 시작이 응답받기 위함을 목적으로 할 때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종교의 기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기도의 시작은 주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모두 응답받게 되어 있습니다. 응답이 목적이 아니면 모든 기도는 100% 응답됩니다.
기도의 시작은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주신 주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영광의 왕, 만유의 주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지으시고, 지금도 그분의 말씀 권세로 이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신실한 계획이 있으신 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로 산을 옮겨 바다에 빠뜨리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산이 옮겨져서 바다에 빠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나님은 저 산도 옮겨 바다에 빠뜨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 주님은 친히 그 일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기도를 한 내가 아닙니다. 내가 기도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간절함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나의 어떠한 행위도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산을 명하사 바다에 빠뜨리게 기도하는 나의 믿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산을 명하사 바다에 빠뜨리게 하실 모든 권세가 있으신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높여드리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도 많이 하는 것으로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단지 기도하는 양이 많아서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주님을 높이는 기도를 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면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2. 기도의 이유
쓰지 않은 창고에 가면, 마치 거미가 주인인 것처럼 있습니다. 그곳에 주인이 가면, 대단한 거미줄이 있든, 심지어 쥐가 있든 상관없습니다. 주인이 정리하면 끝입니다. 기도의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기도의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마치 스지 않는 창고에 거미가 주인인 듯 있었지만, 문을 열고 "주인 오셨다!"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에게 기도의 이유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의 필요가 메말라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어떤 물건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위해서 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간곡하게 부탁하셨습니다. 제발 하나님이 너희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고, 지금도 내 안에 계십니다. 나보다 나의 필요에 대해서 더 분명하게 아십니다. 들의 백합화도 주님이 살피시고, 새 한 마리도 주님의 명하심이 없이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필요해서 기도하는 것보다는 기도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이 유명한 이유는 처음으로 해안가를 벗어나서 중국 땅 안으로 들어가는 선교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 전까지는 해안가에만 있었습니다. 본국에서 후원 물자와 돕는 사람들 때문에 다 해안가에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을 보낸 영국 선교회가 재정으로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후원을 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이 기도 중에 하나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정말 선교회가 아니라 나를 믿느냐?"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이 다시 중국으로 갑니다. "Faith Mission"이라고 외치고 중국 해안가를 벗어나 내륙으로 들어갑니다. 후원 물자와 인력을 의지하지 않고 정말 주님만 의지할 것을 결단하고 믿음으로 선교한다고 외치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들어가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완전한 어둠 가운데 있던 땅에 진리의 빛을 들고 가니 저절로 기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땅을 덮고 있던 어둠의 영을 대적하는 기도였습니다. 그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보혈로 덮고, 악한 영을 몰아내는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의 대부분은 그 땅을 향한 악한 영을 몰아내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후배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의 대부분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선포하고 악한 영을 대적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다스림이 없는 곳에 주의 다스림을 회복하기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학교를 위해서 어떤 기도를 해야 합니까? 그 땅에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은 반드시 기뻐하십니다.
고3들은 가고 싶은 대학을 두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그냥 "나 서울대 가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라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가 아닙니다. 그 대학에 붙여 달라는 기도는 불교에서도 합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하나님! 서울대학교에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을 원합니다. 하나님, 나를 보내 주시길 원합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 일에 여러분이 필요하면 하나님이 그곳에 불러 세우시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할 때, 여러분은 부모님을 묶고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님 안에 있는 다른 것을 의지하게 하는 미혹의 영,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물질의 영, 부모님 관계를 허무는 분열의 영을 대적해야 합니다. 부모님을 붙잡고 큰 소리로 "떠날지어다!"하지 말고 주님을 높여드리는 마음을 가지고 가족 안에 있는 악한 영에 대해서 대적하며, 가정 안에 하나님 나라와 다스림이 회복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에게 실망했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나의 기도만 안 들어 주시냐고 따져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이유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나'였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그 땅에서 하루에 세 번 기도를 했습니다. 여러분, 다니엘이 하루 세 번 하나님과 약속을 정해 놓고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성공하게 해 주세요!", "나 충리시켜 주세요!",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그들이 나를 보고 멘토가 되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을가요? 아닙니다. 분명 다니엘은 아무도 예배하지 않던 그곳에서 하루 세 번 시간을 정하고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노래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가장 큰 관심은 무엇이었을까요?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죄로 인해서 다시 회복될 수 없었던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더럽고도더러운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호복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비전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그 심령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이 열방 곳곳으로 흩어져서 그 땅마다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 예수님의 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분부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중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라!" 여러분의 교회와 가정, 학교에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문을 기록해 봅시다.
3. 기도의 관계
기도의 시작은 주님을 높여 드리는 것이고, 기도의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그러면 나는 뭔가?'라는 마음이 듭니다. 내가 필요한 것도 있고,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생기기도 하고, 내 마음에 상처도 있습니다. 그러면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그러면 나는 뭐죠? 재정이 급하게 필요할 수도 있고, 정말 먹을 것이 필요할 수도 있죠. 주님을 높여드리고, 하나님 나라의 회복도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는 뭘 하시는 거죠?라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것에 대한 말씀이 일용할 양식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에 꼭 있어야 하는 것은 나의 필요를 주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말씀을 듣던 유대인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밥 한 끼를 해결하는 것이 큰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필요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 필요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주기도문 바로 앞에 예수님은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이 이미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했을까요? 주님의 마음은 단지 '오늘 밥 주세요!'라는 것을 기도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진짜 원하셨던 것은 '예수님과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진짜 문제는 예수님 외에 의지할 것이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수련회에서 전도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용돈이 다 떨어지면 누구를 찾나요?", 아이들이 대답합니다. "아빠요!" 전도사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성적이 떨어지면 누구를 찾아요?", 한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엄마요!"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가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어렵습니다. 대부분은 이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의지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보시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우선으로 두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하루의 양식이 없을 때 나는 하나님을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인가? 이것을 보는 것입니다.
한 친구가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가 예수님과 정말 친밀함이 있었는데, 그때의 모습으로 회복이 너무 더딘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과 정말 친했던 때를 생각해 봐라. 그때를 회복해야지. 그래야 너의 삶 가운데 주님의 평강함이 견고하게 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나의 삶이 언제부터 문제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연애를 하면서 인것 같아요. 그전에는 무슨 일만 있으면 하나님부터 의지했는데, 그 이후로는 남자친구를 의지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누가 연애를 한다고 하면 이 경험을 들려주고 싶어요."
여러분은 외로울 때 하나님을 찾습니까? 카톡의 연락처를 뒤적거립니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것은, 단지 배고플 때 예수님을 찾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순간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분이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외로울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죄를 이길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지하는 것이 예수님이 아닙니다. 음란한 생각을 원수가 넣어 주면 많은 친구가 일용할 음식을 구하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방문은 잠겨 있나?', '부모님의 이치는 어디인가?', '어떻게 사후 처리를 완벽하게 할까?', '어떻게 들키지 않고 죄의 즐거움만 느낄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일용할 양식을 구할 만큼의 친밀함을 원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소식입니다. 놀라우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 하늘에 계시고, 그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완벽하게 행하실 주님. 그 하나님이 우리와 친밀히 함께하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을 지으시고, 말씀 하나로 이 땅을 멸하실 수도 있으신 분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에게 듣고 싶은 것이 '매일매일의 양식'이 필요하다는 고백입니다.
4. 기도와 순종
기도를 하면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기도를 막는 실제적인 이유는 미움인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우리에게 낙심이 있어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원망이 있어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도가 딱 막히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하지 않은 마음이 있을 때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을 미워하는 마음이 기도를 가로막습니다.
저는 성격상 누구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가 싫어서 막 분하고, 어렵고 그런 적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빛 가운데서 정확하게 저의 마음을 드러내신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고 늘 생각했었는데, 주님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네가 늘 미워하지 않게, 용서할 수 있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물으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래, 혹시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지는 않니?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니?"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물음 앞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로 그 사람에게 칼을 갖다 댄 분노와 함께하고 싶자 않고, 말하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이나 크기만 다르지 같은 죄라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이것이 나에게 너무나 필요한 기도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매일매일 해야 하고, 매 순간 기도해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용서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기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 안에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 어울리고 싶지 않은 사람의 기준을 다 만들어 놓고, 자기는 문제없다고 합니다. 그것이 기도를 막는 심각한 죄입니다. 그런데 용서하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는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그 놀라운 사명에 한 걸음도 못 가게 하는데, 그래도 용서는 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친밀함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나의 의지로 용서하지 않고 잇개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불의한 재판관에게 오는 한 과부 이야기가 있습니다. 밤낮 부르짖는 과부의 기도를 불의한 재판관도 들어준다는 겁니다. 그것도 너무나 많이, 기도를 많이 하면, 재판관이 귀찮아서 죽을 정도로 기도하면 응답이 있다는 것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원한입니다.
과부가 재판관에게 와서 부탁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과부는 "내가 원수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마음으로는 죽여 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원수에 합당한 벌만 받을 수 있도록 좀 도와주십시오."라는 간구였습니다. 용서를 위한 간구였습니다.
누가복음 18장 7절에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니도 너희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악한 자에게 내가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재판관이어도 재판관이 재판을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왜 용서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될까요?
왜 예수님은 우리 안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마음 중에 유난히 미워하는 마음, 용서하지 않는 마음에 대해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기도도 주님이 하시는 것이고, 기도도 순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만은 안 돼요! 이것만은 싫어요!" 용서할 수 없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여전히 이것만은 안 된다고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용서하라는 것에는 기도에 대한 놀라운 뜻이 담겨 있습니다. 기도는 순종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서 무언가를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기도는 오직 하나님 말씀과 뜻에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믿음이면 그 사람을 통해서는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정성을 들이고, 공로를 드린다 해도 다 거짓입니다.
순종이 없는 기도는 자기 소원을 고백하는 것뿐입니다. 순종이 없는 기도는 결국 자신만을 위한 기도입니다. 다른 종교에서 하는 기도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이것만은 안 돼요, 이것은 제외하고 순종하겠습니다."하는 태도가 점검되어야 합니다. 가장 놀라운 기도는 나의 미워하는 감정까지도 완전히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 말하고도 싶지 않은 사람이 있지는 않습니까? 순종함으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5. 기도의 목적
기도는 하니님을 높여 드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핵심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함, 그리고 하나님에게 어느 것이든 순종하겠다는 분명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정말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고,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친밀함 가운데 살아가고, 하나님에게 전적인 순종을 드리는 삶을 살게 되면 우리의 살이 어떨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해야 할 기도가 다른 것이 아니라,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와 악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곡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정말 삶의 주인으로 모시면서부터 우리 삶에 시험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시험이 없던 때는 내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을 때입니다.
한나 스미스라는 사람은 "원래 예수 믿기 전에는 시험이 없다. 그리고 예수를 믿어도 초기에는 시험이 적을 수 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확신을 갖고 믿음을 굳게 가지고 올바른 경건 생활을 하려고 할 때 시험이 배나 많아진다. 시험은 내가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는 너무나도 분명한 증거가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높여 드리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삶을 살고,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친밀함 가운데 살아가고, 하나님에게 전적인 순종을 드리는 삶을 살면 우리의 삶에는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수많은 시험이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고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이 땅에는 악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출애굽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먹고, 놀고, 마시며 누리기만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와서 일곱 부족과 끊임없이 전투해야 했고, 31개 부족의 왕과 끊임없이 전쟁해야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가장 먼저 겪으신 것은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마지막에 겪으셨던 것도 시험이었습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만 해 달라고 땀이 피가 될 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결국 기도에는 목적이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이 기도의 목적이면 시험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도의 대상이 예수님이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이면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아쉬운 사람이 있다면 그중 한 명은 데마일 것입니다. 빌레몬서에 복음서를 기록한 마가, 누가와 함께 언급된 데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데마복음이 신약성경에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데마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도 다녀온 사람이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종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데마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한 부자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진정한 엄친아였습니다. 주변 사람도 모두 그를 좋아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와서 너무나 감격스러운 말로, 예수님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 자신은 모든 율법을 지켰다고 고백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그 청년을 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도 들어보지 못한 예수님의 극찬이었습니다. 그 청년의 모습이 예수님에게도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사도로 부르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나를 따르라."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이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이 청년은 이 세상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험에서 승리하는 것은 기도하면서 우리의 관심이 이 세상에 있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순종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것이 결국에는 이 땅에서의 삶에서 윤택하고, 누리면서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우리의 관심이 머물 때 우리는 시험에 들게 되어 있습니다. 악이 우리를 삼키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고, 악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는 나의 시선이 주님에게 붙들려 있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향하여 시선이 고정된 사람에게는 시험이 시험일 수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때로 너무 거대한 파도가 옵니다. 바라봐질 수밖에 없는 큰 파도가 올 때가 있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저도 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주니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서 내 평생을 드리겠다고 고백을 하고도, 끊임없이 넘어졌습니다. 죄에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오히려 지를 즐거워했던 것이 저였습니다. 주님의 길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늘 유명해지고 싶고, 사람의 칭찬과 인정에 목말랐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시험이 올 때 그 시험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음란함이 찾아오면 음란함에 무너지고, 미움이 찾아오면 미움을 그대로 품고, 분노가 찾아오면 분노하는 것이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죄를 지을 상황과 조건만 주어지면 죄를 짓는 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는 나의 사명이 나의 역할이 높아지는 것, 나의 위치가 높아지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명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사명은 예수님입니다. 나의 꿈은 예수님입니다. 나의 부르심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입니다. 정말 그것이 믿어지니, 더 이상 사람 때문에 사역하지 않게 되었고, 시험에 오면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시험이 올 때 넉넉히 이기고 있습니까? 실패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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