ε♡з성경공부반...♡з/사도신경 12주

성령 총정리

예림의집 2020. 8. 1. 16:50

성령 총정리

 

에스겔 37:1-14, 요한복음 3:1-15

 

"성령을 믿사오며(I believe in the Holy Spirit;)"

 

사도신경에는 세 가지의 "믿는다"라는 고백이 나오는데 그 첫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에 나 같은 존재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둘째는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오늘의 나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기에 나는 그분을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제부터 다루려고 하는 "성령"을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를 그분의 아들과 그리스도로, 그리고 그분의 영을 성령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 삼위일체론이라고 하는데 교리로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놓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유일신 하나님이라면서 어떻게 삼위(三位)냐"라고 묻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논쟁을 하게 됩니다. 교회사 속에서 '니케아 신조'와 '아타나시아 신조' 등이 생겨난 이유가 바로 그런 교리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교리나 이론으로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역사적으로 이해해 나가야 합니다.

인류가 하니님을 믿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소개하셨던 것은 역사적인 일입니다. 아울러 성령은 인간의 영적 차원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는 현제적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 가지 경우를 하나로 믿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다시 살아나다

성령님이 아시는 일은 새 생명과 사랑의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그 사례를 먼저 구약에서 보면 에스겔서에 대표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산골짜기로 데리고 가시더니 다음과 같이 그분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에스겔 37:4,5).

이 말씀은 하나님이 골짜기에 즐비한 마른 뼈들에게 성령을 부어 살아나게 하실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뼈들 위에 덮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전해지고 난 뒤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면 그 뼈들이 살아나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생기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르아흐(ruach)'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영, 숨, 성령이 모두 같은 단어를 씁니다. 그러니까 '생기'는 '성령'과 같은 뜻입니다. 곧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고 그 이에 성령(생기)이 쏟아지면 그 말씀과 성령이 같이 작용해서 죽은뼈에 새 생명을 주어 살아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 마른 뼈들의 이야기를 우리와는 상관없는 성경 속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받아야 할 주인공은 바로 우리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우리가 그 마른 뼈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교인들과 '자연 심방'(등산)을 할 때마다 실감합니다. 산에 올라가 보면 우리나라는 그 어디나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골짜기가 많고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되어 바싹 말라 버린 뼈다귀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저는 거기서 수긍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 자신을 들여다볼 때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해서 정말 산 사람일까요?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는 살아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죽었기에 하나님의 안목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인은 사물을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진리를 꿰뚫다

사람은 물질적인 존재이기에 물질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또 사람은 육체적인 존재이기에 육체적으로도 건강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은 정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건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가 다 충족하고 건강하다 해도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에스겔 37:12). 이것은 바로 부활을 말합니다. 성령이 함께하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사람을 다시 살게 해 주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종종(?) 세상에 역사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에 성령을 부어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이때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아하!' 하는 감탄을 하시는데, 그 이유는 성령이 역사하면 진리를 한꺼번에 꿰뚫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성령을 받아 무덤을 열고 나오게 되면 자연히 여호와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하!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구나'라고 깨닫게 된다는 것이지요.

누구든지 성령을 받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겉모양만 살았을 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성령을 받고 나면 그 능력으로 부활을 체험하고 제2, 제3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믿으십시오. 그러면 성령님께서 당신에게 임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다

신약에도 성령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요한복음의 기사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요한복음의 기사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느 날 밤, 율법학자이며 살헤드린 의원인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이미 머리로는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요한복음 3:2). 

그런데 이 말에 대해 예수님은 엉뚱하게 이렇게 대꾸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3). 이른바 유대인의 최고 지도자라는 니고데모에게 이 말씀은 빅뱅 사건처럼 충격을 줬습니다. 당시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그가 그 말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대문입니다. 그 말을 이해할 만한 체험이 없었거든요.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가 정신적으로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지식인이지만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참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가 유대인에게는 지도자 노릇을 하며 자부심을 갖고 살지 몰라도 예수님의 눈에는 다시 태어나야 할 안타까운 존재로 보인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니고데모가 영적으로는 죽어 버린 안타까운 존재라는 것은 다음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에 이렇게 묻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요한복음 3:4). 이 발언으로 우리는 정신적인 차원의 한계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 그에게 2차(3:5-7), 3차(3:8), 4차(3:11-16) 시도를 해지만 그가 끝내 이해했다는 구절은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도 답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요한복음 3:11).

예수님은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라 체험한 것을 말씀하시는데 니고데모에게는 도무지 그것을 믿으려고 하는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이해할 뿐 심령을 열지 않으니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체험의 차원에서 영접하기를 바라시지 그분을 아는 지식을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그렇게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던 니고데모는 영영 거듭나지 못했을까요? 끝내 성령 체험을 하지 못해 구원받지 못했을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간 재물이 많은 한 청년 권력자의 이야기(마가복음 10:17-22)와 앞의 이야기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 그런지 흔히 니고데모를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에 대한 평가는 그 다름에 두 차례나 다시 나오는 내용을 종합해 입체적이고 구조적으로 관찰해 보면 결과가 달라집니다. 요한복음 7장 45-51절을 읽어 보십시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했다고 아랫사람들을 힐책하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면서 주님을 변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니고데모 같은 신분의 사람이 예수님을 옹호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적어도 그가 그동안 쌓아 올린 공적과 명예를 단번에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쓴 행동이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찾아와 내 편에 서 주는 사람이 나의 진정한 친구라면, 니고데모야말로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였습니다.

어디 이것뿐입니까? 19장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난 뒤 시신을 인수받아 장례 지낼 때 그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이나 가져가 주님의 영전에 바쳤습니다. 이것 역시 목숨을 건 행동이었습니다. 누가 감히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따르던 제자들조차 주님을 부인하고 모두 도망쳤는데 말입니다.

이런 사실에 비춰 볼 때 그가 비록 단번에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성령 체험을 하지는 못했지만, 후에 조금씩 예수님을 영적으로 알게 되고 결국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 중에는 성령 체험을 했다고 큰소리치면서 성령 받은 열매는 도무지 나타나지 않는, 실천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비록 그 체험은 점진적이었으나 결단과 행동은 남달랐던 니고데모 같은 신앙인이 훨씬 귀하게 느껴집니다.

 

생명의 신비와 사랑의 비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한복음 20: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다른 게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체험하면서 생명의 신비와 사랑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 체험은 하나님 체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 곧 성령 체험입니다. 또한 성령 체험은 하나님의 말씀 체험이며,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는 체험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체험하면 삶 속에서 시시때때로 작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사랑에 감동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받아서 매일 힘차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의외로 그것이 성령 체험인 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세상에 역사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에 성령을 부어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성령 체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체험하면서 생명의 신비와 사랑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성열을 체험하면서 시시때때로 작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사랑에 감동합니다. 돌같이 굳은 마음이, 분노로 닫힌 마음이 사랑으로 열리는 인생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