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십자가 전문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이사야 53:1-6; 마태복음 27:11-26; 마가복음 15:21-41
사도신경은 예수님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곧바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에 따르면 예수님의 생애는 받아들이기 힘든 출생과 고난의 죽음분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로 그때 당시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고, 극히 압축된 문장으로 사도신경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긴 하지만 예수님의 삶, 그분의 사랑의 목양과 치유의 사역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것은 저 개인적으로 아쉽습니다.
하기야 예수님의 삶을 출생부터 고난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육체의 한계를 손수 지니시고 인간으로 태어나신 것이나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 애굽으로 피난을 가야 했던 것이 그렇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 헤롯왕을 비롯해셔(3:6),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헤롯당들에게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라고 의논하는 말을 들을 만큼 수모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뿐입니까 예수님은 빌라도뿐 아니라 당시 모든 사람에게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배반으로 마음 아파하셨고 심지어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도 그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마태복음 12:46-50; 마가복음 10:29; 누가복음 2:48-50; 요한복음 2:4, 7:5).
고난받는 사람을 위해 오신 예수님
물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인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동시에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신 분 이기에, 그분의 공생애 동안의 삶은 우리의 신앙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와서 닿은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우산을 뒤집어 놓은 모양ㅇ을 떠올리면서 생각하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산이 하나님 나라이고 우산 꼭지가 예수님이라고 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끄트머리로서 그분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겹쳐졌던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세상에 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 곧 가난한 사람이 부유하게 되고 병든 사람이 치유받으며 억눌리고 고난받는 사람이 해방되는 역사는 하나님 나라에서나 이뤄질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고 살면 늘 세상에 질 수밖에 없고 비참해집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다가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서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동시에 살아가면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이 자신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요점입니다.
역사적 종교인 기독교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습니다"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로마의 역사학자 티투스(Titus)의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는 A.D. 26-36년까지 유대의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또 유대의 역사가 필로(Philo)도 빌라도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예수라는 사람이 민란을 일으켜 빌라도가 A.D. 30년에 그를 십자가형에 처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들보다 몇 십 년 후에 활동했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도 빌라도가 너무 혹정을 해서 시저가 그를 다시 로마로 불러들였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가 철저히 역사적인 종교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신앙고백이 오직 영적이거나 신앙적인 데서 가 아니라 삶의 한복판에서, 역사의 현장을 바탕으로 해서 나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 하나,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에서 깨닫게 되는 사실은 세상의 법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법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으셨는데 그 당시 로마법은 최고의 법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말이 곧 법인 약소국에 살면서 폭정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로마의 지배 아래 놓이면 오히려 로마법에 의해 보호를 받고 목숨을 지킬 수 있어서 환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빌라도 역시 요즘으로 말하면 고시에 합격하고 유대의 총독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를 신문하고 나서 죄가 없는 것을 알고 유대인들에게 공개적으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요한복음 18:38)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뿐입니까? 그래도 민중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자 그는 이미 모진 채찍질로 피투성이가 되어 축 늘어진 예수를 끌고 나가 "보라, 이 사람이로다"(요한복음 19:5) 하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자기 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비참한 사람이 십자가에 달릴 만한 죄를 지었겠느냐는 뜻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지만(요한복음 19:6,12), 민중이 계속해서 십자가에 달라고 외치자 하는 수없이 사형 선고를 내리고 맙니다. 그는 공개적으로 예수에게 죄가 없다고 선고해 놓고도 당시의 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호도된 민중의 힘이 무서워서 판결을 뒤집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입니다.
이해관계 앞에 무너지는 정의
신학자이며 정치사상가인 라인홀드 니버는 그의 유명한 저서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에서 개인은 아무리 악하다고 해도 이성과 양심이 작용해서 악해지는 데 한계가 있지만, 일단 집단이 형성되면 그 속에서는 이성과 양심이 작동하지 않아서 사악함이 끝 간 데 없이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즉 개개인은 큰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지만 그들이 모여 집단행동을 할 때는 무서운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에 행해지고 있는 군중 시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모든 군중 시위는 의로운 것인데 이따금 의롭지 못한 시위도 있을 수 있다는 게 아니라, 모든 시위가 위험한데 이따금 의로운 시위도 있을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 캘빈은 인간은 비록 원죄 가운데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정의인지 알지만 그것을 실현할 때 이해관계가 개입되면 그 정의는 여지없이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받은 고난은 세상의 정의라는 이름 아래 받은 고난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런 뜻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구절은 우리에게 세상의 정의에 대한 자각을 새롭게 해 줍니다.
내가 곧 본디오 빌라도이니
한때 유럽과 미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The Man Born to be King>이라는 라디오 드라마가 있습니다. 도로시 세이어즈라는 작가의 작품인데 마태복음 27장 11-26절까지의 이야기에서 빌라도의 아내가 빌라도에게 하는 말이 기록된 19절에 초점을 맞춰 각색했습니다. 이 구절을 볼까요?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드라마에서 빌라도의 아내는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수백 가지 언어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열두 번씩 외워 대는 꿈을 꾸다 놀라서 깨어납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그 불길한 꿈예기를 하고 예수를 놓아 줄 것을 당부하지만 빌라도는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녀의 꿈대로 오늘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구절이 담긴 사도신경이 세계의 수많은 사람의 입에서 수백 가지 언어로 외워지고 있다는 게 그 드라마의 내용입니다. 참으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어떤 분은 자신도 빌라도 같은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도 "예수냐, 바라바냐?" 하는 갈림길에서 바라바를 선택한 그 군중의 한 사람이며 결국 빌라도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예수 대신 세상의 즐거움과 욕심을 택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도 매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빌라도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도신경을 외울 때 본디오 빌라도라는 이름이 곧 나 자신이라는 고백을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고난에는 두 가지 특별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한 고난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또한 앞으로도 누구든지 고난받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위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받지 않고 있는 사람은 뉘우치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고난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그의 연민과 절규와 호소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가 보면 결국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이기는 길은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고, 그것이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체험하며 사는 길이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분의 마지막 설교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
사라진 사도신경 구절
이어서 조명해 볼 대목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아시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번 우리말 번역과 영문 번역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구절이 영문 번역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영문과 대조해 보면 "장사한 지 사흘 만에"라는 문구가 제대로 문맥을 따라 번역되지 못했으며, 특히 "He descended into hell" 곧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라는 말이 완전히 삭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한국의 기독교인은 유난히 성경의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다고 하여 오래전에 번역돼 오류가 많은 성경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형편인데 문장 하나를 통째로 뺏다니 말입니다.
예수님이 지옥에 가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아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그 문구 자체를 빼 버리고 얼버무렸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을 계기로 제가 평생 성경공부를 인도해 오면서 왜 일직이 사도신경을 공부하지 않았나 하는 자책을 했습니다. 그리고 1,600년 동안 계속되는 이 고귀한 신앙고백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의 신앙이 기본 위에 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참 사람 예수님의 죽음
사도신경 영문 번역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고(crucified), 죽으셨고(dead), 매장되었으며(buried), 지옥에 내려가셨다(descended into hell)는 네 가지 사건이 모두 과거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참 인간으로서 우리와 똑같은 죽음을 겪으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며 그분의 삶이 이 세상에서는 정말로 끝났다는 것을 네 차례나 과거형으로 밝힘으로써 확실히 한 것입니다.
한 번 "장사 지냈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세요. "아무개 어디 있어? 요즘 그 친구 보이질 않네." "그 친구? 죽었지. 벌써 장사 지낸 지 여러 날 되었어." 이쯤 되면 끝난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뒤 장사가 치러졌다고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그분이 분명히 이 세상에서 떠났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라는 구절은 예수님의 미래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리로서(from thence)'는 '거기에서부터'라는 말로서 예수님이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가(descended) 거기에서 올라오셨다(ascended)는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영문 어감은 박자 맞추듯 짝을 지어 느끼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이 지옥에 가셨다고?
사도신경은 분명히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역사신학자는 이 문구가 4세기 후반에 사도신경에 추가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이 말이 첨가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한글 번역에서 빠진 게 차라리 잘 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서구의 기독교인들은 지난 1,400년 동안 변함없이 예수님이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문구가 담긴 사도신경을 고백해 왔습니다. 이는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인간이 말하는 모든 것을 다 체험하셨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처절함, 절망, 죽음의 밑바닥까지 처하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특권이 있어서 지옥 같은 곳은 피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지옥이란 말이 열한 번, 지옥불이란 말이 두 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열한 번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지옥을 말씀하시면서 천국 이야기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천국에 가시기 전에 먼저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지옥에 가셨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뇌리에 박혀 있는 지옥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그곳에 가셨다는 사실은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옥의 신학적 의미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 지옥
지옥은 어디 있습니까?라는 질문보다 지옥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훨씬 유익합니다. 지옥은 지구 땅속 어떤 어둡고 무서운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철저한 단절된 곳,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 사람들의 삶 또한 어떠한 의미에서는 지옥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은 이 세상 속에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사는 것이 바로 지옥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46)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버리시나이까'라고 현재형을 쓰지 않고 '버리셨나이까'라고 과거형을 쓰셨는데, 이것은 그대 이미 하나님이 예수님을 떠나 지옥의 상태에 두실 것을 알고 하신 말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하늘나라가 이 세상에,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옥도 죽고 난 다음에 가는 곳만이 아닙니다. 지옥은 바로 이 세상에, 우리 가운데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믿지 않고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데 지옥은 죄 가운데 있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곳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으면 그 자체가 바로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세상이 하늘나라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이 세상이 지옥이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신 하늘나라와 지옥에 대한 말씀의 해석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천국
우리가 이 세상을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살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고, 그렇게 살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살 때 이 세상은 지옥이 됩니다. 우리가 육체가 살아 있어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고 있으면 그것은 죽은 것과 같고 또한 지옥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한다면 비록 우리의 육체는 죽어도 하나님의 영접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있는 것이고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11:25).
예수님의 고난은 세상의 불의를 깨닫게 합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공개적으로 예수에게 죄가 없다고 선고해 놓고도 당시 여론의 힘이 무서워서 판결을 뒤집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입니다. 이해관계가 개입되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 세상의 정의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 대신 세상의 즐거움과 욕심을 택하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끝까지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도 매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라는 이름이 곧 나 자신이 되지 않기를 다짐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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