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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부터 있는..

예림의집 2020. 2. 29. 19:33

태초부터 있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한일서 1:1-3).


생명의 주님이 오셔서 죽은 나를 살리셨다. 나는 가난하나 주님은 부요하시고 나는 약하나 주님은 강하시다. 부요하신 주께서 가난한 나를 부요하게 하시고 강하신 주께서 약한 나를 강하게 하셨다. 주 안에서 나는 산 자, 부요한 자, 강한 자이다. 주와 나는 하나이다.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

그러나 내가 과연 산 자인가? 여전히 죽은 자 같지 않은가? 나는 부요하고 강한 자인가? 여전히 가난하고 약하지 않은가? 주의 말씀과 나의 현실이 얼마나 다른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인정할만한 무엇이 내게 얼마나 있는가? 주의 말씀을 오래 붙들고 선포해 왔지만 나의 삶을 통해 보여 준 것이 없지 않은가? 주가 생명이시라는 사실이 우리 삶에 얼마나 실제적인가?

말씀을 믿는 것과 현실적인 경험의 거리, 이것이 믿음의 시련이다. 나는 부요한 자라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자인 것을 보면서 나의 믿음의 고백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잃는다. 믿음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부요한 것을 보여달라는 이들에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임을 어떻게 믿게 할 것인가? 믿음의 말씀이 현실에 들어가 힘을 잃게 되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생명의 말씀에 대한 기대를 접고 실질적인 행복을 약속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영생의 말씀은 오늘의 교회 강단에서조차 듣기 어렵게 되었다.

정말 복음의 진리는 현실 앞에서 무력한가? 복음이 말하는 것이 현실을 거슬러 말하나 여전히 현실이 바뀌지 않았다고 해서 그 말씀이 공허한가? 아니다. 이 말씀은 신실하다! 주께서 임하셨고,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 주의 생명의 능력이 나의 가난함보다 나의 약함보다 더 분명한 실재이다. 주께서 일하시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은 달라졌다. 생명의 주가 임하셔서 모든 죽음의 세력을 파하셨다. 주의 생명의 통치가 사람들에게 움직일 수 없어 보이는 사망의 지배를 깨뜨렸다. 우리는 그 생명의 통치 아래 산다.

더 이상 가난과 질병과 상처와 약함은 주님의 생명의 적수가 아니다. 주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그의 생명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 산 자의 반열에 들게 하셨다. 우리는 생명의 주와 연합하여 주님과 생명의 사귐을 누린다. 어떤 죽음의 세력이 우리 안에 일하는 생명의 능력에 맞서며 생명의 교제를 막을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미 승리는 결정됐고 우리는 더 큰 생명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현실을 보면 의심이 들고 낙심이 공격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시다라는 주의 진리를 붙든다. 주는 실질적인 삶의 능력이시다. 주는 슬픔을 춤으로,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신다. 주가 임하셔서 비천하고 가난한 우리를 부요하고 존귀케 하신다. 우리를 짓누르는 불안, 지속해서 밀려오는 두려움은 우리로 더욱 주의 말씀을 향하도록 재촉한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를 어디로 가오리이까? 의심이 몰려들 때, 베드로처럼 주께 고백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