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브리서 5:7-10).
순종의 반대말인 반항은 지나간 인류 역사에 장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들의 실현에 기여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들, 그러니가 어린이의 권리, 여성의 권리, 노동자의 권리, 민중이 사회의 증인이 되는 민주화를 위한 정치적 권리 등이 모두 아름다운 반항을 통해 얻어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개신교를 뜻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말도 "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교황의 폭정에 항거한 아름다운 개혁자들의 반항이 신앙의 자유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연 모든 반항이 다 아름다운 것일까요? 우리가 마땅히 저항해야 할 것들에는 저항해야 하겠지만, 저항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도 습관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과연 우리가 추구해야 할 라이프스타일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화는 문자 그대로 반항의 문화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반항하는 모습은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학원에서도, 거리에서도, 관공서에서도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반항이 가지는 의미 있는 가치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일관성 있게 순종의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날 순종은 가장 인기 없는 교훈이고 학교에서 가르치기를 포기한 구시대의 가치로 취급되지만, 그것은 우리의 주 되신 예수님이 삶으로 몸소 보여 주셨고, 그 제자들이 오늘도 여전히 붙잡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가치입니다.
물론 그렇게 살다가는 바보처럼 남의 말만 따라간다고 똑똑한 이웃들에게 '왕따'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항의할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왕따'의 참 의미를 아시나요? '왕따'는 '왕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여론과 상관없이 성경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왕 되신 주님의 순종의 모습을 배우라고 가르칩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에게 배워야 할 "아름다운 순종"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 순종은 어릴 적부터 익혀야 할 습관입니다.
모든 아름다운 습관들은 어릴 적에 익히지 아니하면, 성인이 되어 익힐 때 훨씬 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온 우리 속담이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입니다. 영국 속담에도 "요람에서 배운 것이 무덤까지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습관을 '제2의 천성'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부모가 되어 자녀들의 부당한 반항을 어려서부터 용납하면 그들은 평생 반항아로 살아갈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반면 어려서부터 순종의 자녀로 키우면 평생 순종의 자녀로 살아갈 것입니다.
예레미야 22장 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을 청종하지 않는다는 책망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하는 이 불순종의 습관 대신 아름다운 순종의 습관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렸을 때 어떠했는지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2장 51절을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 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육신의 부모를 향하여 "순종하며 받드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여기서 "순종하여 받으시더라"를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현재 중간 태 분사"로 예수께서 '스스로 계속하여 순종하고 사셨음'을 말합니다. 즉 지속적 순종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한 번 순종한 것이 아니라 순종이 그의 삶의 방식, 곧 삶의 습관이 순종이었음을 말합니다.
둘째, 순종함으로 모든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0세 되시던 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의 세례는 구약의 제사장들이 30세가 되면 전신 세례로 몸을 깨끗이 하고 제사장직을 시작하듯, 이제 인류 위한 제사장 곧 메시아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받은 순종의 세례였습니다. 예수께서 물속에서 나오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복음 3:17)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들 예수님의 순종이 하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어떠한 아름다운 일들이 순종에 의해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와는 상관없고, 피곤하고, 힘든 일이기에 하기 싫고, 모른 채 하고, 미루어 두는 일들, 그러나 꼭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자꾸 부담감을 주고, 생각나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닌 마음을 다잡고 순종을 해야만 시작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러한 일들이 있지 않나요? 이 시간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순종함으로 시작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는데 되어짐을 목격합니다. 마치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일은 절대 불가능한 것 같았는데 순종하니 배불리 먹고도 남겼던 그 놀라운 기적처럼 없던 힘이 생기고, 없던 길이 생기고, 없던 지혜가 생겨서 큰일들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순종함이 없어서 시작도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일들은 일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님의 도전에 순종함으로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순종은 고난을 통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 결코 쉽자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어렵습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저도 힘이 부칠 때가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이미 나이가 들어 순종의 습관을 터득하기에 너무 때가 늦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물론 성이니 되어 습관을 고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순종이나 반항이 학습되어진 것이라면, 어렵지만 순종도 다시 학습될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우리를 진정 사랑하신다면 그분은 우리를 순종의 자리에 두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순종의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시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의 하나가 바로 "고난"입니다. 시편 119편 6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그렇습니다. 고난이 불순종과 반항을 교정하고 우리를 순종의 자리에 반듯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도 고난이 면제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아직 우리가 배워야 할 순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 "순종의 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학교에서 우리는 여러 유형의 고난을 통해 마침내 순종하는 것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오거든 원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내가 이 고난 속에서 배워야 할 순종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십시오. 오늘 본문 히브리서 5장 8, 9절에서 예수님도 이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고난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하는 대속적인 고난이었지만, 또한 우리로 하여금 고난 당함에 결코 좌절하지 말고 순종함으로 이기라는 본을 보여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이렇게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도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셨다면 그분을 따라가는 우리 또한 얼마나 더 순종을 배워 가야 할까요? 야고보서 1장 2-4절을 읽어봅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고난이 올 때 우리가 결심할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순종의 사람이 될 것을 결심하십시오.
결론, 순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습관입니다.
예수님에게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일은 명백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참혹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앞두고 얼마나 진지하게 기도하셨습니까? 훗날 히브리서 5장 7절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 밤 그분의 기도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복음 22:42). 예수님은 마침내 하나님 아버지의 인류 구속의 뜻을 이루시고자 기꺼이 십자가의 고난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순종의 삶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셨습니까?
히브리서 5장 9-10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인류를 위하여 중보하고 시작도 끝도 없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위하여 기도하던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처럼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끝없이 기도하시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주님의 기도를 힘입어 그분의 기도를 따라, 그리고 그분의 기대를 따라 진정 순종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순종의 삶을 살아갑시다. 부모님께, 아내, 남편에게, 자녀들에게, 친구에게, 직장 상사와 동료들에게.. 예수님처럼 순종하고 받드는 삶을 살아갑시다. 무엇보다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주님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우리가 됩시다. 날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는 기씀의 삶을 살아갑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며 "보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딸이요. 내 기뻐하는 자로다!"라고 칭찬하시는 그러한 일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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