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란 어떤 곳인가?
1. 지옥
성경에는 하늘나라에 대해서 보다는 지옥에 대해서 더 많이 언급하고 있다. 지옥은 하나의 구체적인 장소이다. 지옥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며 상상력의 산물도 아니다. 지옥은 장차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있는 것으로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이 영적(영과 혼)으로만 고통을 당하는 장소이다. "영적으로만"이라고 하는 것은 믿지 아니하고 죽은 사람들의 육체가 지금은 무덤 속에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되느니라"(잠 15:24)
믿지 않는 사람들도 사후(死後)에 그 존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당한 상태로 하나님과의 분리를 느끼는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7-9)
"멸망"(destruction)이라는 말은 '그 존재가 없어짐' (annihilation)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장의 종이를 찢어버릴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종이를 태워서 재를 날려 버린다고 해도 그 종이의 화학원소들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사람을 포함해서 어떤 것이라도 그 존재가 멸절될 수는 없다. 『파괴한다』라는 말은 "원래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게 됨, 즉 못쓰게 됨"을 의미한다.
"지옥 꺼지지 않는 불…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3,48)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구더기"(worm)라는 단어는 고대 영어에서 "생균(germ of life) 혹은 "혼"(soul)을 언급하는 표현이다. "영원한 멸망"이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고통을 당해야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지옥의 형벌에 관계되어 언급되는 불이 실제로 문자적인 의미의 불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성경은 종종 불을 어떤 시련이나 환란, 시험(testing) 등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상징적으로 사용될 때는 언제나 그에 대한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지옥에 대하여 언급되고 있는 경우에 불이 문자적인 의미 이외의 뜻으로 해석이 제시되고 있는 경우는 전혀 없다.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
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그분이 영원한 지옥과 같이 그렇게나 끔찍한 것을 만드실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지옥은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곳은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곳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단을 따르는 사람들은 앞으로 언젠가는 마귀와 함께 지옥에 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구주를 보내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 흘리신 보혈을 발아래 짓밟는 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면할 길이 없는 것이며 또 그래야 마땅한 것이다.
2. 불 못
이 시대의 사후 세계의 지옥이 영원한 세계의 지옥(불 못)과 같은 것은 아니다. 지옥에 가있는 사람들의 육체가 지금은 무덤에 묻혀있기 때문에 그들이 당하는 고통도 영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둘째 부활 이후에는 믿지 않던 사람들의 육체도 부활하며 죽지도 않고 썩어 없어지지도 않을 육체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영원토록 불 못에서 육체적인 그리고 영적인 고통 중에 처하게 된다. 성경은 불 못이 꼭 어느 곳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그곳이 지구의 중심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義)의 거하는 바"벧후 3:13) 새 땅을 만드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 못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던지 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0:10,14/21:8)
위와 같은 구절들은 우리로 하여금 지옥에 대한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해주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간다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쨌든 그곳에도 친구들도 많이 있을 테니 말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가! 지옥에는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가 되어줄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곳에는 울며 이를 갊이 있을 뿐이다. 모든 사람이 각각 다 이를 갈고 있을 경우에는 좋은 친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지옥은 사랑도, 평화도, 희망도, 빛도, 불쌍히 여기는 것도, 우정도 없는 곳이다. 지옥에서는 엄마라든가 부부간의‘여보, 당신' 같은 소리도 듣지 못하게 되며 심지어는 물 한 방울도 나지 않는다. 지옥은 결코 웃어넘길 문제가 아니다.
내가 어떤 부인에게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라고 권고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남편은 종교란 것을 모르고 세상을 떠났답니다. 그이가 지옥에 있다면 나도 구원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이와 함께 있을 뿐입니다!" 이 얼마나 헛된 자위(自慰) 인가! 지옥에서는 그 여인과 남편이 서로를 사랑해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남자분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내 사업을 포기해야 할 테니 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을 것 같군요!"라고 말했다. 『당신이 경영하는 사업이 무엇인가요?』 "술을 취급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얼마나 많은 돈을 벌고 싶으신가요?』 그는 한참 계산을 해보더니 상당한 거액의 총액을 말했다. 『당신이 지금 당장에 계산한 총 액수의 수표를 갖게 된다면 당신은 영원을 지옥에서 보내게 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는 망설이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내 영혼의 값으로 그 액수는 너무나 적습니다." 바로 그날 그 사람은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영접하고 사업내용을 바꾸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막 8:36)
3. 지옥의 실상은 이것이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지옥이 어떤 곳인가를 우리에게 잘 설명해주고 있다. 지옥은 무서운 고통이 연속되는 곳이다. 부자는 지옥의 불꽃 가운데서 고민한다고 했는데 그가 말한 불꽃은 지옥의 현장을 가리킨다. 이 불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물질이 타는 불꽃일까? 그렇지 않다. 지옥은 영계이다. 물질이란 있을 수 없다. 단지 예수님께서 이 불꽃이라는 용어를 쓰신 것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인간의 언어를 빌린 데에 지나지 않다.
1880년 <까라마죠프카의 형제들>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도스토에프스키는 그의 작품 속에서 지옥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보여주었다. "만일 지옥에서 물질이 타는 불이 있다면 사람들이 참 좋아할 거야. 왜냐하면 뜨거운 불 때문에 당하는 육체의 고통으로 인해 지옥에서 정말 더 느껴야 될 마음의 고뇌를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야."
지옥의 불은 육신을 태우는 불이 아니다! 마음속에 숯덩이처럼 가득한 죄악에서 지펴 오르는 영계(靈界)의 불꽃이며 죄를 도무지 참지 못하여 쏟으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의 혹독함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당하는 고통 가운데 화상을 입은 것만큼 참기 힘든 고통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시대에 예수 믿다가 잡혀 들어가면 화형을 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순교자들이 화형을 당할 때에 연기 때문에 뜨거움을 미처 느끼지 못하고 질식해버리면 평안히 죽을 수 있지만 장작더미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열기를 받으며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극한 몸부림이었다고 한다. 그 무서운 형극을 부자가 지옥에서 당하고 있는 것이다.
지옥은 하나님의 자비가 완전히 거두어진 곳이다. 부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두 가지 기도를 지옥에서 했다. 일생 동안 한 번도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하는 사람을 멸시하고 우습게 여기던 사람이 지금 지옥에 떨어져서야 기도하는 것이다. 처음 기도는 "오! 주여, 저 나사로의 손가락에 물 한 방울만 찍어서 떨어뜨려 주세요" 하는 것이다. 한 바가지도 아니고 한 숟가락도 아니다. 한 방울만…. 이것은 심한 갈증에 허덕이는 자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울부짖는 절규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돼!" 하시며 고개를 흔드신다. 그러나 또 부자는 기도한다. "주여, 세상에 있는 내 형제 다섯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증거하게 하여 그들이 이 고통을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안돼! 세상에서 목사들이 전하는 성경 말씀이나 이웃 사람들이 예수 믿으라고 전하는 복음을 듣지 아니하는 사람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외친다고 해도 믿지는 않으리라." 하시며 단호히 거절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지만 부자가 지옥에서 본 하나님은 달랐다. 회개하고 돌아와야 할 때를 놓쳐버린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대하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도 산천초목 위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알맞게 골고루 내리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지만 기회를 놓치고 하나님을 멸시한 자에게는 손가락에 묻은 물 한 방울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진노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
지옥은 이처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밀러는 "지옥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완전히 두절된 곳이다."라고까지 표현했다. 만약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면 그제서야 지옥에서 입이 부르트도록 기도하며 여러 사람들을 전도할 생각이 나겠지만 그와 같은 때늦은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로만 돌아올 뿐일 것이다.
지옥은 천국을 보면서도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다. 괴롭던 지난날들을 꿈에 본 듯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천국에 사는 나사로는 지옥의 비극을 보지 못했다. 반면에 지옥은 천국이 환히 보이는 곳이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요, 설교자인 틸리케는 "지옥은 천국을 보면서도 가까이 가지 못하는 곳"이라고 했다. 얼마나 기막힌 노릇일까 천국을 보며 자신이 묶여있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비교하는 데에서 오는 고통을 알고 있는가? 저 달동네에서 따닥따닥 붙어사는 수천 세대의 사람들은 몹시 가난하고 어렵게 살고 있지만 주변 이웃 사람들의 형편이 모두 비슷하여 소위 말하는 상대적 빈곤을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런대로 참고 견디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큰 호화 아파트 근처에 사는 서민아파트 사람들은 눈만 뜨면 비교가 되는 냉혹한 현실 때문에 가난이 주는 체감온도가 훨씬 더 차가울 수밖에 없다.
비교하는 데에서 오는 고통!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실상이 아닐까? 간혹 이런 실험을 지옥이라고 표현하는 자들이 있는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골 사람들이 도시 사람들을 볼 때 참으로 괴로운 심정일 것이다. 한창 바쁜 농사철에 정신없이 진땀 흘리며 일하는데 그 사이로 자가용을 염치없이 몰고 다니며 그저 자기만 배부르면 된다는 식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광경을 바라볼 때 농민들의 심정은 어떨까?
지옥은 천국을 눈앞에 두고 비교를 하는 곳이다. 눈에는 보이지만 가슴에는 채워지지 않는 곳이다. 왜 하나님이 지옥의 창문을 천국을 향해 열어 놓았을까? 결코 이유가 없는 일이 아닐 것이다. 지옥에 들어간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 지옥이나 천당은 아주 우스운 미신 이야기로 간주하고 멸시했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지 무슨 지옥이고 천당이냐?" 하며 비웃었다. 이러한 무리들에게 대하여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지옥은 기억력이 예민하게 되살아나는 곳이다. 간혹 며칠이나 몇 시간씩 죽었다 되살아난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의 일들이 한순간 모두 기억되는 것을 체험했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맞다. 기억이 되살아 난다. 비명 지르는 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얘, 너는 살아있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생을 했지 않니? 너는 이것을 기억해야만 해." 하고 말씀하셨다. 한편, 부자는 나사로를 보는 순간 자신의 대문 앞에서 구걸하던 거지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으며 자신의 형제 다섯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도 기억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고 흘러간 세월과 함께 까맣게 잊혀진 줄로 알았던 모든 죄들이 하나하나 되살아 났다. 그럴 때 지옥은 그의 자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 안에 있는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리차드Ⅲ세>에서 지옥의 현실을 이렇게 묘사했다. "내 양심은 수천 개 혓바닥을 가졌구나 수천 개의 혓바닥이 제각기 갖가지 책망을 나에게 늘어놓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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