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나를 만나고, 버리러 가다
"여보, 우리 이탈리아 가요." 지난 겨울이 시작되기 전 우리 집의 첫째 '춘녀'가 뜬금없이 이탈리아 여행을 제안했습니다. 어리둥절 놀란 나는 "웬 이탈리아?"하고 뚱하게 대꾸했습니다. 철없는 사춘기 딸의 객기로 치부하려는 아빠의 눈빛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돌한 춘녀가 한마디 더 본탰습니다. "나중에 디자인하려면 이탈리아 정도는 보고 가야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속으로 꽤나 놀랐습니다. 디자인을 전공하고 싶어서 그림을 배우는 딸을 나는 여전히 사춘기 철부지로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춘녀는 어느새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수도자'로 크는 중이었습니다. 이미 자기 길을 찾아가는 아이가 아직도 낡은 사고에 갇혀 있는 아빠를 불러냅니다. "그래, 가자. 빚을 내서라도 간다."
출발 당일, 날마다 바꿔 입을 옷으로 꽉 찬 어마 무시한 짐가방을 끌고 춘녀가 자기 방을 나섭니다. 그 순간, 안전한 여정 완수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짐꾼'으로서 감당해야 할 수고로움이 온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내 짐은 가벼운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딸의 짐을 보는 순간, 예상되는 수고로움에 대한 귀찮음이 내 마음에 '완악함'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울퉁불퉁한 로마의 골목골목을 저 무거운 짐가방을 끌고 제대로 다닐 수나 있을지.. '그래, 네 가방이니까 네가 한번 들고 다녀 봐라' 하는 고약한 심리가 일었습니다. 갑자기 쾌청한 여행길이 우중충한 고행길로 변해 버렸습니다. 이탈리아행 기내에서 「매일성경」을 폈더니, 본문이 애굽 왕 바로의 완악한 마음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출애굽기 7:13,14). 헉!
"여행은 낡은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것을 짊어지고 오는 것입니다. 낡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내가 되는 것이 여행의 본질이다." 인물 학자 강신주의 말처럼, 여행은 낡은 나를 직면하고, 버리고, 새로워지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여행처럼 묵상은 나에게 낡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묵상을 통해 나는 내 마음속에 있는 낡음을 발견하고 부대끼며 놀랍니다. 내 안의 어둠을 보며, 거친 목소리를 듣고, 완악한 나 자신을 만납니다. 날마다 낡은 나를 만나는 묵상 여행은 대체로 고통스럽고, 더러는 낯설고 그렇습니다. '낡은 나'를 처음 만나는 것, 누가복음 5:1-11의 게네사렛 호수에서였습니다. 나는 자라면서 호수나 바다를 본 적은 없지만,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고도 헛수고한 베드로에게서 피곤함만 보였습니다. 밤새 일한 그에게 쉼이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몸의 피로가 다음의 완악함을 불러오는 나와 달랐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라 다시 배를 끌고 가 그물을 던졌습니다. 만선! 잡힌 고기가 너무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어부에게 만선의 기쁨은 육신의 피로를 깨끗이 씻어 내고도 남을 만합니다. 인간은 돈을 못 벌면 시들시들하다가도 돔만 생기면 화색이 돕니다. '베드로라고 별다를 게 있겠나, 내 그럴 줄 알았다' 섣부르게 단정 지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나와 같은 인간인 줄 알았던 베드로가 나를 뒤흔들었습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누가복음 5:8, 새 번역).
내 시선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힌 고기에만 온통 집중되어 있는데, 베드로는 엉뚱한(?) 고백을 합니다. 풍요로운 소득에만 집중하는 나는 스스로 결코 죄인이라 생각지 않는데, 베드로는 자기가 죄인이랍니다. 갈릴리의 베드로를 만난 그날의 경험이 낡은 나를 만나는 첫 경험이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베드로는 내게 마음의 완악함이 죄로부터 오늘 낡은 열매임을 알게 했습니다. 내 안의 낡음이 죄임을 알게 했습니다.
김병년 지음 「묵상과 일상」(성서유니온). 37~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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