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후원 사역†/교회개척 가이드북

우리 시대의 복음 전도, 무엇이 문제인가?

예림의집 2019. 1. 25. 13:00

우리 시대의 복음 전도, 무엇이 문제인가?


진리인가 연합인가?

복음 전도자들은 그들의 교회와 선교 기관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휘황찬란한 선교 보고서와 엄청난 통계자료 뒤에는 교회가 복음 전도에 대해서 무력하다는 깊은 자각이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기쁨과 승리의 광채를 뿜어내려고 용감하게 노력하지만, 그들의 경험과 노력의 결과는 그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며 몹시 불만스럽게 합니다.

교회는 전도에 대한 질문과 부흥에 대한 기대로 떠들썩합니다. 이보다 더 선교사가 많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보다 더 선교 행사가 많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보다 더 많은 그리스도인이 개인 전도를 위해 노력하였던 적은 없었습니다. 복음 전파 사업이 쩔뚝거리고 있는 이유를 심각하게 검토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하여 이보다 더 큰 규모의 회의가 열린 적도 없었습니다.

1966년에는 165개 선교 단체와 55개 학교가 미국 일리노이 주(州) 휘튼 시(市)에 모여서 세계를 향한 교회의 임무에 대해 토론하였습니다. 그들은 세계 복음화를 추진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에 대해 의논하였습니다. 그 바로 후에는 100개국에서 1300명이 베를린에서 모였습니다. 그들은 이 선교 회의가 도화선이 되어 “전(全)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전도가 이루어지기를” 열망하였습니다. 1969년에는 세인트루이스에서 전도에 대해 연구하고 격려하기 위한 큰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음은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 단체와 교회의 당혹감은 깊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석과 평가와 기도와 소망에도 불구하고 선교 사업이 부흥되지 않고 있으며, 죄인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전도 방식이 잘못되었는가? 온 세계에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무엇이 빠졌는가? 에드워즈(Edwards)와 휫필드(Whitefield)의 능력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아직도 묻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날의 전도 활동에 되살아나기를 간절히 구하는 중에 복음 전도자들이 저지른 중대한 착오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그들도 진보주의자들이 택한 것과 같은 피상적인 해결책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약해진 교회를 되살리기 소망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적절성과 (사회적이거나 지적인) 품위와 그리고 특히 연합을 목표로 해 왔습니다.

교회는 “성경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뜻을 모으기만 한다면 이 세상이 그 말을 들을 것이다. 우리의 선교 기관을 합쳐서 자금과 인력을 공동 운영하자. 대규모의 전도대회를 함께 하자. 모든 복음 전도자들이 공공 기관을 만들면 더 깊이 있는 선교를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기관들의 연합이 복음주의 교회의 목표가 됩니다.

세계를 향한 선교를 위하여 연합이 제일 중요하다는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교회나 개인은 자기들의 진리에 대한 가치 기준을 낮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많은 복음 전도자들이 모인 모임에서, 다른 어떠한 복음 전도자 형제라도 다른 이들을 기분 나쁘게 할 진리를 고집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태어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일만한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찾아야만 됩니다. 성경 안에서 그 외의 부분들은 선교상 “필수가 아님”이란 딱지가 붙게 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이 교회의 정확함보다 더 중요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선교 단체들은 전도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문제를 자세히 검토하기를 꺼려 왔습니다. 선교 부서들은 “무엇이 복음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를 망설입니다. 그 질문에 대하여 철저히 대답한다면, 그 대답은 바로 그들의 선교사가 가르친 내용을 비판하게 됩니다. 여러 다른 대답을 가진 교회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선교 기관은 와해될 것입니다. 한 교회의 의견을 지지한다면 다른 다섯 교회의 지지를 잃게 될 것입니다. 연합과 일반론에 기초를 둔 전체 체제가 무너질 것입니다.

지역 교회도 진리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교회가 속한 교파 또는 연고 단체와의 불협화음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복음을 정확히 규정지을 경우 다른 청소년 단체와의 마찰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선교 부서나 또는 수년간 재정 지원을 해 왔던 선교사들과의 사이에 민감한 문제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또는 주일학교 과정 전체가 비판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에 세밀한 주의를 기울인다면 다른 복음 전도자들과 마찰이 있게 됩니다. 그래선 연합이 성공의 열쇠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의 전통

복음 전도자들은 종교개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소중히 여깁니다. 우리는 교황에 대한 미신을 부숴버린 루터와 같은 사람들의 계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인 성경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인간적인 권위에 절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올바른 정신은 물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에서 연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는 실제보다는 희망 사항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개신교 교회의 선교부는 아무런 성경적인 근거도 없는 교리와 관례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많은 가르침과 습관들이 테첼(Tetzel)의 면죄부만큼이나 인간의 발명이요 인간의 관습인 것입니다. 우리들 사이에 있는 어떤 교리들은 분명히 그만큼이나 위험합니다. 구원받는 길에 대한 중심되는 문제에 있어서 개신교의 대부분이 새로운 관습 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비성경적인 전도 체계를 물려받았습니다.

이러한 관행이 오래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메시지와 복음 전도 방법은 종교 개혁자들과 그들의 신조에서 유래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치근에 생각해 낸 것입니다. 더 고약한 것은 그것들이 성경에서 유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해석하여 조심성 없이 20세기의 이성(理性)과 함께 섞어 낸 것입니다.

그 산물은 위험스러운 혼합물, 즉 사탄이 죄인의 영혼을 속이기 위하여 쓰는 종류의 혼합물입니다. 도대체 성경 구절과 반쪽 진리로 자기들의 거짓말을 숨기지 않은 사교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태초로부터 있어 왔던 사탄의 전략이었습니다(창 3:5). 사탄은 우리 세대에게 또 다른 복음을 팔아서, 많은 진지한 사람들에게 왕좌에서 끌어내려진 그리스도를 가르치게 하였던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만 세심히 주의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종들에게조차 숨겨지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복음 전도의 산물은 기독교에 슬픈 이야기를 남기곤 합니다. 신앙을 고백한 후 계속하여 세상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결단”은 별 뜻이 없습니다. (著者 註 :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죄인은 반드시 죄로부터 돌아서서 구주를 믿기로 결단하여야 합니다. 회개와 믿음은 인간 의지가 내적으로 취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걸어 나간다든지 말로써 죄를 고백한다든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공개 석상에서 영접한다든지 하는 따위의 외적인 절차와는 세심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 글에서 “결단”이라는 말은 부흥회와 관련된 형식적인 절차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전도자들은 외적인 절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미 내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는 근거 없는 가정 하에 이런 형식이 “결단”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단”을 하는 사람들 중에 소수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변화된 삶으로써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있었던 전도대회의 흥분이 가라앉았을 때, 성가대가 더 이상 멋진 합창을 부르지 않을 때, 많은 군중들이 더 이상 모여들지 않을 때, “구원 초청”에 대한 감동적인 희망을 주던 부흥사가 다른 도시로 가버렸을 때, 우리에게 실체로서 남아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선교 대상 지역을 집집마다 방문함으로써 실제로 행해진 것은 무엇입니까? 정직한 대답은 “거의 없다”입니다. 요란스럽고도 극적인 흥분으로 떠들썩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놀라우신 권능과 사람을 개심시키는 은혜와 함께 오시지 않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비성경적인 전도 메시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생명을 위해 필요한 진리가 사람이 고안해 낸 연막에 의해 가려져 버린 것입니다. 얄팍한 인간적인 논리에 의거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영생의 권리를 얻었다고 믿도록 이끌었으며, 그들에게는 적용되지도 않는 구원의 확신을 주었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은 도착적(倒錯的)인 복음으로 속는 사람들의 수(數)를 늘리는 것입니다. 요즈음의 교회에서 “결단을 하고” 상담실에서 그들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테첼의 고객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라는 말씀을 듣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마 7:23).

이 글을 일는 독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전도의 올바른 방법이라고 믿고 물려받은 관습이나 가르침이 있을 것입니다. 활동적인 교회가 다른 방법으로 전도하는 것을 본 적이 없기에 당신도 그것을 의심하여 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전도에 대해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죄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전도에의 열의가 없는 것은 두려운 병폐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이해가 결여된 열의도 위험한 것입니다. 당신이 영혼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거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을 헛수고로 돌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의 메시지와 방법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세히 검토해 보았습니까?

목회자들이여, 이것은 가벼운 질문이 아닙니다. 당신은 여전히 세속적인 “개심자”들에 대해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까?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결단”을 했다는데 도무지 무슨 결단을 했는지 알지 못할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자신이 고백하는 구주처럼 거룩하지도 않고, 그분의 뜻을 받들 열의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으며 설교를 경청하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즉, 당신은 그들이 진정으로 개심하였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전혀 복음을 알지 못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의 전도 방법과 가르침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음 편히 있도록 이끌지는 않았습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찾아서 구원의 길을 다시 생각하지 않는 한, 복음주의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이 오래전에 그랬듯이 인간적인 관습의 늪에 빠져 질식할 것입니다. 이미 그들의 신도들 중 많은 수(數)가 교황의 무지한 추종자들만큼이나 통탄스러운 속박 상태에 있습니다. 복음을 희생시켜 가면서 연합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정의함에 있어서 우리 주님께서 직접 전도하셨던 사례와 사도의 설교가 아주 유용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유한 청년 관원과 나누신 대화를 고른 이유는, 여기에는 신약성경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복음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17-27의 말씀과 오늘날 복음 전도에 관한 대다수의 교리는 극심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복음과 예수님의 복음은 하찮은 세부 사항에서 다른 것이 아니고, 그 핵심에서부터 다릅니다. 이 변화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빈 그물을 초래할 만큼이나 심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을 영원히 그릇되게 인도할 만큼 위험한 것입니다.

어떠한 분들은 곧 상대론이라는 편리한 방패 뒤로 퇴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어떤 점을 강조하는가에 달린 문제야”라고 핑계를 대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기 자신을 심각히 검토해야 하는 의무를 회피할 것입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복음과 오늘날 인기를 끌고 있는 “복음”과의 차이는 말초적인 것이 아니고 결정적인 것입니다. 이 차이점 속에 영혼이 사느냐 죽느냐, 교회가 생동하느냐 메마르느냐 하는 문제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진지한 그리스도인이 남을 속이고자 할 리는 없습니다.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복음전도자들은 뜻깊은 진리들을 변함없이 증거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복음의 기본적인 면을 빠뜨림으로써 그들이 전하고자 원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분조차 전달하지 못합니다. 반쪽 진리가 온전한 진리로서 전해질 때 그것은 거짓말이 되고 맙니다.

비록 그 대답이 고통스럽더라도, 여러분은 자신의 교회와 선교사들과 주일 학교 선생님들과 여러분 자신이 과연 우리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물어보아야만 합니다. 그 대답이 불편함과 마찰과 오해를 가져오고 친구를 잃게 하더라도, 당신은 하나님의 진리를 무시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복음의 내용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기꺼이 취할 수 없다면, 더 이상 열성이나 희생이나 활동에 대해 말하지 마십시오. 만약 당신이 “온 열방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정확하게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도대체 왜 “전도”니 “선교” 따위를 계속하여야 하겠습니까?

이제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전도자를 자세히 보십시오. 그분의 메시지를 듣고 그분이 가지신 동기와 그분이 사용하신 방법을 관찰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당신의 전도 방식에 반영하십시오. 서기 30년대의 이 젊은 청년에게서 우리 시대(譯者 註 : 저자가 이 글을 쓴 연대는 1970년입니다) 청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그리스도께서 일하신 것처럼 일해야 됩니다. 물려받은 잘못된 전도 방식의 족쇄를 벗어던지십시오! 기본적인 진리를 희생하여 외적인 연합을 이루기를 거부하십시오. 성경에서 보여 주신 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전도하기를 배우십시오. 진짜 복음을 붙들고 가짜 복음을 버리십시오.


- 윌터 챈트리 著 “우리 시대의 복음 전도, 무엇이 문제인가”(생명의 말씀사) 서론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