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의 공식
성화의 공식이란 선화를 이루는 방법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 놀랍고도 위대한 변화를 마치 전력 발생 공식처럼 딱 떨어지는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과학 실험도 틀림없이 자연법칙대로 결과를 산출해내게 되어있다면, 인류에게 가장 중대한 이 성화의 과정도 같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법칙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공식과 법칙들이 쓰여있는 곳, 바로 교과서입니다. 기독교의 교과서인 성경을 읽어보면 어떤 과학적 법칙보다도 더 확실하게 작용하는 성화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간단한 법칙을 망설임 없이 따른다면, 자연법칙에 의해 이뤄지는 일처럼 온전한 성품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구절 중에서, 아니 세상 모든 문헌 중에서 이 원칙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해 낸 구절은 바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느 곳보다도 타락과 부패와 음란이 만연한 이 도시에서 하늘에 속한 삶을 추구하던 이들에게 이 서신서를 써 보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듯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면 점점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를 받아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 영광은 영이신 주님께로부터 나옵니다"(ERV). 여기서 "변화하여, 변화를 받아"라는 문구에 집중해봅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노력형 방법들과 시작부터 완전히 다르게 보이지 않습니까? 여기서 '변화하다'라는 동사가 '변화를 받아'라는 수동태로 사용되었음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즉 우리는 변화를 '당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변화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신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십시오. 도덕적이고 영적인 변화를 이야기하는 구절들은 하나같이 수동태로 서술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곧 설명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수동태 표현을 인간의 모든 노력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거나 이성적 논리를 무시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이 우리 영혼에게 촉구하는 원리는 사실 우리 몸이 따르고 있는 원리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생리학에서 생물의 성장 과정을 묘사할 대는 수동태 형태의 동사를 사용합니다. 성장은 생물의 주체적인 의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장은 그 생물에게서 일어나고, 생겨나고, 발생하는 일입니다.
다음 구절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한복음 3:7). 우리는 스스로 탄생하거나 스스로 거듭날 수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로마서 12:2). 이 구절에서도 우리는 변화시키는 영향력 아래 놓인 존재이지, 혼자서 변화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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