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현대신학

자연인(불신자)의 특성

예림의집 2018. 8. 13. 15:41

자연인(불신자)의 특성


반틸은 다음과 같이 자연인(불신자)의 특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자연인이 자기가 보기에 전혀 합리적인 이성으로 파악될 수 없는 ‘실재’나 ‘사실’세계에 대하여 어떤 납득할 만한 주장을 펴고자 한다면 그는 그 반이성적인 것을 사실상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어야만 합니다. 사실들을 분간하기 위해서 자연인은 시간 내의 모든 존재와 모든 사실성을 무시간적인 부동의 존재로 제한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 놓았을 경우 그는 그의 전제에 입각하여 인식되는 모든 특수성과 사실성들을 말살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자연인은 한편으로 모든 실재가 자연 안에 있어서는 비구조적이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실재가 자연 안에서 체계적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자연인은 한편으로 모든 실재가 자연 안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될 수 없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신이 자연 내의 모든 실재를 체계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질상 그의 자연인의 모든 서술은 자가당착적입니다. 

이러한 자연인(불신자)의 모습은 고대 철학자들에게서부터 발견된다. 예를 들어, 탈레스는 만물의 최초 원인을 물이라고 주장했고, 아낙시만더는 공기라고 주장했고, 데모크리토스는 모든 것은 원자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했고,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은 아페이론(apeiron)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헤라클리투스는 ‘흐르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하면서 만물의 최초 원인은 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파르메니데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고 존재하는 것을 사유하는 이성만이 진리이며 이에 반해 다자, 생성, 소멸, 변화를 믿게 하는 감각은 모두가 유류의 근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 고대철학자들은 실재의 ‘일자(一者)와 다자(多者) 문제를 나름대로 풀고자 한 것이다. 분명히 만물의 최초원인이 있을 터인데 그 원인을 인격적 존재에 돌리지 않고 궁극적 요소에 돌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당시 인간과 같은 차원으로 여겨졌던 신과 같은 인격적 존재보다는 궁극적 요소들이 철학적으로는 더 최초원인으로 비쳐졌을 것입니다. 


반틸에 따르면 고대철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이성주의적 특성을 지녔고 근대 시대는 반이성주의 특성이 강했지만 이성주의와 반이성주의는 결코 서로 독립적이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탈레스가 모든 것이 물이라고 했을 때, “모든 것이 물이다.”라고 한 탈레스의 생각도 물이 됩니다. 모든 것이 물이라는 주장은 탈레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이성주의적 발상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도 물이 되는 경우에는 ‘생각’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 됩니다. 생각도 물처럼 무작위로, 즉 우연 가운데 발생되는 것이 됩니다. 즉 생각에 질서가 없고 본질도 없어져 일관성이 없게 되어 반이성적이 된다. 또한 자신의 생각이 물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도 물이 됩니다. 결국 아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 반이성주의적 특성이 나타납니다. 

또한 아낙시만드로스가 모든 것은 아페이론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는데 아페이론은 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의미합니다. 양적으로 질적으로 무한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반이성주의적 발상입니다. 무한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알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나무가 아페이론으로 되어 있다고 하면 그 나무 역시 무한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무를 우리의 정해진 지식의 범주에 넣을 수 없게 됩니다. 즉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아페이론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낙시만드로스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는 이성주의적 기준을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한 헤라클리투스는 대표적인 반이성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어떤 항구성(constancy)을 의존하지 않고서 모든 것이 일관적으로 변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변화가 일관적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어떤 항구성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반이성적인 것을 주장하면 몰래 이성적인 것을 의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대표적 이성주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변화라는 것은 없다면서 실재에는 무(無 , nothingness)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이유는 변화라는 것은 유에서 무, 혹은 무에서 유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변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는 없고 오직 유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환상(illusion)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없다고 하면 ‘없다’라는 무(無)이기 때문에 무를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비이성주의적 신비를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틸은 헤라클리투스의 반이성주의와 파르메니데스의 이성주의는 둘 다 설명하고 단정 짓는 빈술(賓述, predication)이 불가능하게 된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변하면 빈술이 불가능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뭔가 서술하려면 항구적 의미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항구적 의미가 없으며 빈술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또한 모든 것이 변하지 않아도 빈술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빈술의 서술적 흐름은 변화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고대철학자들은 이성주의와 반이성주의를 오가며 우주를 규명하고 인간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어떤 때는 안다고 했다가 어떤 때는 모른다고 하는 모습, 즉 이성주의와 반이성주의를 오가는 모습은 자가당착적인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자가당착적 모습은 불신자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지 못한 기독교 신학자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철저히 계시의존적이 아니면 자칫 이성주의와 반이성주의의 이원론에 빠지기 쉽다. 반틸은 철저하지 못한 신학자들과 사상가들을 비판하는 가운데 특히 로마 천주교의 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강하게 비판했다. 반틸의 비판을 통해 아퀴나스 신학이 어떻게 이성주의와 반이성주의를 오갔는지 살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퀴나스는 이성과 믿음의 관계에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다고 가르치며, 죄로 인해 사람의 지식을 얻는 능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비록 믿음은 이성에 근거하지 않지만 신자들은 그들의 믿음에 관해서 또한 믿음을 위한 추론(reason)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다섯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①움직임으로부터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를 추론하는 것. ②결과로부터 원인을 찾는 것. ③우연한 것으로부터 필요한 존재를 추론하는 것. ④완전하려는 정도에서 가장 완전한 존재를 추론하는 것. ⑤설계에서 설계자를 추론하는 것입니다.

지식론에 있어서 아퀴나스는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시작한다고 주장합니다. 마음 자체만 빼놓고 마음에 주어지는 지식은 모두 감각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 마음 자체란 우리가 갖고 태어나는 내재적인 지식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모든 지식은 원초적 원리에 의존한다며 그 원리를 다섯 가지로 설명합니다. 

①동일(identity)의 원리 “존재는 존재한다.” ②비-모순(non-contradiction)의 원리 “존재는 비존재가 아니다.”③중간 배제의 원리 “존재 아니면 비존재이다.” ④인과 원리 “비존재는 존재를 일으킬 수 없다.” ⑤종국(finality)의 원리 “모든 존재는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이러한 원리들이 바로 알려진다면 그 지식들은 자명적(self-evident)인 것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아퀴나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님만이 순수 질재(pure existence)이며 순수 현실성(pure actuality)인 반면에 모든 피조물은 현실성과 가능성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에게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는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인간은 형상(영혼)과 질료(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이고 그 외 모든 것은 ‘존재를 지니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개념의 하나님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원동자”로 설명했습니다. 즉 신은 유일하게 질료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순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아퀴나스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서의 신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단의성(單意性 univocism)’과 ‘다의성(多意性 equivocism)입니다. 즉 근느 헬라 철학에서 신과 인간을 연속선상에 놓고 논리로서 신을 해석하려는 원리를 답습하고, 다른 한편 인간의 경험과 감각을 강조하며 어떤 일반적인 것보다는 개인적인 신과 인간 사이의 불연속성을 강조합니다. 

아퀴나스에 따르자면 “하나님의 실체(substance)를 논할 때 우리는 특별히 ‘분리 방법(method of remotion)을 써야만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실체는 인간의 지성이 알 수 있는 모든 형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실체에 관한 지식을 통해서 그 실체를 알 수 있는 모든 현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실체에 관한 지식을 통해서 그 실체를 알 수 없다.” 이성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 수 있고 하나님에 관해서는 어떤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