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역사신학

지성인들의 사도: 알렉산드리아

예림의집 2018. 6. 5. 17:40

지성인들의 사도: 알렉산드리아


사도들 사후 이교도들의 논리에 대항하여 복음을 변호하고 논적들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에 기독교 지도자들은 헬라철학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변호하기 위해 철학과 복음을 조화시키고자 하였다.    


①세상의 빛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동시에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정통신학자들은 헬라철학과 기독교 신앙을 조화시켜보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는데 일부 신자들은 이것을 반대하였다. 헬라철학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이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기독교와 헬라철학을 조화해 보고자 하는 노력을 가장 맹렬하게 반대한 이는 터툴리안이었다. 이단들은 다름 아닌  철학들에 의해 조장되었다고 외쳤고 “믿기 위해 탐구하고 그리고는 멈추어라”고 하였다. 

3세기말 황제들의 박해 아래 신앙을 지키고자 투쟁하는 가운데 신자들은 복음을 헬라사상의 용어와 방법을 사용하여 제시하는 길이 있음을 발견해내었다. 신앙과 헬라철학이 모두 그리스도께 경배한다면 이 둘이 평화스럽게 공존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던 교사들에 의해 닦여진 것이었다. 

이런 연합을 처음 이끈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이 주도했던 소위 교리 문답학파였다. 이들은 헬라철학에 정통하고 사랑하면서도 그리스도의 교훈에 충성을 잃지 않았던 학자였다. 이들은 헬라문화의 정수들, 플라톤주의와 스토아학파의 사상을 기독교 속으로 합류시켜 보려고 하였다. 

180년 경 판타이누스는 기독교적 영지주의 학당을 설립하고 기독교를 진정한 철학으로 교수하였다. 기독교 신앙의 우수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교들의 사상체계로 파고 들었다. 그는 의미에 관하 근본 질문을 다루었으므로 영지주의적이었으나 정통적인 해답들을 제시하였으므로 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많은 이교도들을 기독교로 이끌었다.  


②철학자들을 위한 목자

판티아누스의 제자로 20년 동안 있으면서 배웠고 “이교도들에의 권면”, “교사”, “잡록(사후 완성)”을 기록하였다. 그는 성경 뿐 아니라 철학과 고전 문학에 정통하였다. 그는 영지주의의 형식과 언어로 그들의 오류를 지적하고 창조에 관한 문제나 악의 근원, 그리스도 속에서의 구원 등에 관해 궁극적인 답변을 주려고 하였다. 헬라지성을 위한 사도가 되고자 하였다. 토론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회적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그리고 그를 통하여 구원으로 이끌고자 하였다. 

클레멘트는 철학이 기독교를 위한 예비단계라고 주장하였다.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철학의 형식을 통해 기독교를 제시하면서도 베드로와 바울의 메시지에 충실하였다. 

영지주의자들과 달리 성품 계발에 관심을 가졌다. 영적 통찰력은 심령이 순수한 자들에게만, 상벌의 기대를 초월하여 선  그 자체를 사랑하는 자에게만 임한다고 하며 축복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됨을 말한 것이다.  

영지주의와 클레멘트의 차이점은 발렌티누스가 창조는 악한 신들의 장난으로 치부하여 그 가치를 부인한 것과 달리 창조를 그 교훈의 중심에 두었으며 하나님께서 모든 합리적인 피조물 위에 진리의 선한 씨앗들을 심어두셨다고 생각하였다. 기독 신자들이 헬라인들에게도 배울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진리와 선은 어디에서 발견되든지 창조주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클레멘트 이후 기독교는 헬라 사상과 연합하여 교리의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③오리겐과 진리에의 갈구

박해로 클레멘트는 도시를 떠나면서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였던 18세의 오리겐에게 학당 지도의 책임을 맡겼다. 아버지가 순교한 후 그의 감독 데미트리우스와의 불화로 아테네로 처청받아 가는 도중 가이사랴에 에 성직을 위한 안수를 받고 거기서 거주하였다. 

오리겐은 처음부터 진정한 철학의 목표로서 흠이 없는 착한 생활을 제시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철학은 인격을 형성해가는 통로였다. 그 자신이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기독 신자들과 이교도들을 위하여 많은 책들을 저술하였으나 성경 해석을 가장 중대한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 성경을 영적 계시의 보고라고 생각하였다. 성경 구절에서 도덕적 확신이나 하나님의 속성에 어긋나면 반드시 표면적 의미보다 더 오묘한 진리가 있다고 보아 풍유적 해석으로 나아갔다. 오리겐은 어떤 특정한 구절의 의미보다 성경 전체가 스스로 의미를 말하게 하고자 했다.

  

④생각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

가르침의 기초는 가톨릭교회에서 전파한 복음이었다. 성경에서 명백하게 정의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사색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탄 자신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이 언젠가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것을 교리로 정립시키고자 한 것이 당시는 물론 후세인에게 이단으로 정죄당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 결과를 부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후에 오리겐은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69세를 일기로 소천받았다.

클레멘트나 오리겐이 헬라적 환경에 기독교를 접목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복음의 변질을 가져온 것인가? 아니었다. 오리겐은 헬라인들을 구하기 위해서 헬라인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이 익숙한 지혜의 세계로 뛰어들어 그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지혜를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기독교 인문주의를 간직해 준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