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현대신학

목회자의 온전한 헌신③

예림의집 2018. 5. 21. 22:06

목회자의 온전한 헌신③


둘째, 온전한 헌신은 이 세대를 본 받지 않는 생활이다.


물론 헌신자들도 이 세상 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신문을 읽고 텔레비전을 보고, 백화점에도 자유로이 드나듭니다. 그러나 헌신자는 이 세상에 속해 버리면 안 됩니다. 세상에 속해 버린다는 말은 세상에 동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헌신자는 세상에서 부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헌신자로 자처하면서 아직도 이런 부르심에 대한 인식이 분명치 못한 지도자는 온전한 헌신자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성직자들이 본받아서는 안될 '세대'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세대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세계를 말하기도 하고,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고, 이 세상에 가득한 죄악과 정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이 지적한 '세대'란 말은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대립하는 세대요. 또 하나는 지나가는 세대를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은 '세대'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렸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한일서 2:15, 16). "이는 진리에 대항하는 세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한일서 2:17)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지나가는 세대'를 말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저으이한 대로 이 세상의 특징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소유에 대한 자랑'을 내세우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육신의 정욕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영혼보다 육신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육체를 기초로 하는 부패한 욕망과 그 생활입니다. 부정과 향락 그리고 방탕을 위주로 하는 생활입니다. 육을 중심으로 하는 모든 생활, 즉 물질의 실재만 인식하는 유물주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을 기초로 하는 모든 문화, 즉 감각문화(Sensational Culture). 또는 과학주의(Scientism)입니다.

'안목의 정욕'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집으로 말하면 보이지 않는 하층 구조인 기초보다 눈에 보이는 상층 구조를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눈의 만족만 일삼은 사상과 생활을 의미합니다. 가시적인 것에만 관심을 쏟는 외관주의입니다. 이생의 자랑은 생명보다 물질을 더 중히 여기는 생활 태도입니다.

물론 육신, 안목, 소유 어느 것도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영혼을 무시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외면하고 그것을 생명보다 더 중히 여길 때 인간은 타락과 세속과 그리고 죄악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날 모든 매스컴을 통해서 듣고 보는 것이 어떻게 하면 육신을 배부르게 하고 소유욕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고 그 이상의 하나님 문제, 영혼의 문제, 영원의 문제 등은 완전히 배제해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