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신학적 관점에서 지금도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대조하여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로마서 10:4)는 해석에 근거합니다. 루터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목표이며 마침이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데에 율법은 더 이상 아무런 쓸모가 없고 예수가 그 자리를 대치했다고 해석합니다. 성령과 자유의 새 시대는 율법이 대체되었기 때문에(로마서 6:4; 고린도후서 3:6;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인은 삶의 법칙으로서 더 이상 유럽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그래서 루터는 항상 율법과 은총을 대조시키면서 기독교인의 행위를 가능케 하는 능격과 동기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행위의 법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평가한 루터의 부정적인 입장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복음과 율법이 날카롭게 대립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율법은 복음의 시대에도 어떤 의미에서건 결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지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율법을 성취하였으며, 성령을 주시는 일은 율법을 확립하는 것입니다(로마서 3:31, 8:24). 율법을 확립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 대한 뜻을 율법 속에 계시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 따라서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 우리가 어떻게 그에게 감사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침서로 삼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이며 복음과 율법은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에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칭의 사역과 더불어 역사한다면 율법의 의문도 복음이 됩니다. 선택의 목적은 성화에 있고,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과 맺은 언약은 거룩함을 나타내어야 할 의무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복음의 시대에도 여전히 '제 3의 사용'으로서의 역하로가 기능을 합니다. 그것은 율법 자체가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임을 얻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율법을 선하고 거룩하며 신령한 하나님의 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로마서 7:12), "우라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로마서 7:12),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롬 7:16),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롬 7:22).
물론 바울은 율법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의문(고린도후서 3:6)이요, 없어질 것(고린도후서 3:11)이며, 죽이는 것(고린도후서 3:6)이고 돌비에 먹으로 새긴 것(고린도후서 3:3)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행위 자체에 대립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칼빈의 말처럼 의롭다 하신 성령께서 역사한다면 율법의 의문도 우리이ㅔ게 복음이 된다는 기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구원을 논할 때 행위가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끼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뿐, 일단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면 도리어 행위는 적극적으로 평가됩니다(데살로니가전서 1:3). 신자의 삼과 행위는 은혜로 값없이 얻는 구원의 결과적 징표이며 산 신앙의 열매로 나타난 것이며, 또한 이러한 삶의 변화와 성화 생활은 선택과 창조, 구원의 근본 목적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약속에 비추어 본 율법은 복음보다 훨신 열등한 것은 사실이나, 그 율법도 결국 한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므로 정죄의 기능은 그리스도 안에서 무효화되고 폐지되었으나, 새로운 메시야 시대에 믿음과 성령의 원리를 좇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본질은 복음의 정신과 모순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하는 말도 율법이 여전히 그의 삶에 타당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에 모순된 관계가 아니라 '성취'의 입장에서 성령에 의한 종말론적 윤리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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