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의 최우선 순위
본문에 보면 소년 예수님이 유월절이라는 이스라엘 최대의 명절을 맞이하여 그 부모인 요셉,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의 에피소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주간의 명절을 잘 마치고 다시 고향 나사렛으로 떠날 무렵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행방이 모연해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그 친척들과 함게 있으려니 생각했지만 그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직 예수님은 12세의 소년이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니 어떻게 부모 된 입장에서 근심이 안 되었겠습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 교외 시골 마을을 거리거리, 골작 구석구석 다 뒤졌지만 그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 시내로 돌아가기로 작정합니다. 이번에는 시내 골목골목을 뒤지며 12살 소년이 있음직한 곳을 뒤졌습니다. 오락실, 게임방, PC방, 볼링장을 다 뒤졌지만 여전히 그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찾고 또 찾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습니다. 어디에서 찾았습니까? 바로 성전에서 찾아낸 것입니다. 이제 어머니 마리아가 묻습니다. 누가복음 2장 48절입니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바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불과 12살의 소년이었던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4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성전학자들은 이 대목에서 두 가지의 놀랄 만한 사실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이고, 또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칭하신 것입니다. 이것는 그당시 유대 문화에서 결코 익숙하지 못한 표현이었습니다. 구약 39권 가운데 하나님을 "아저지"로 표기한 것은 불과 14회 정도이고, 이것도 문서상의 표기일 뿐 언어로는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불과 12살 난 소년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고, 예비하는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신약학자인 데럴 보크는 여기 이 대목에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 'dei'를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이 단어의 뉘앙스를 살려 다시 번역하면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필요한 우선숭위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뜻이 됩니다. 큰 성전이든 작은 회당이든 예수님에게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집은 모두 어버지의 집이었고, 그 아버진의 집에 삶의 중심을 두는 것은 당연히 최우선적 습관이요 실천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성전이라는 건물이 특별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셨던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어디에나 계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무소부재하시다 혹은 편재하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은 또한 특별하게 어떤 장소를 구별하시어 그곳에 자신의 거룩한 영광을 집중적으로 계시하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 성전이 갖는 중요성이고, 신약에서 예배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예배의 장에서 구약시대에서처럼 아버지의 특별한 임재를 경험합니다.
요한복음 2장 17절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는 일을 보며 그분에게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을 보았다고 증거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과연 주의 전을 사모하는 예배의 열심이 있습니까? 아버지의 집에 대한 거룩한 갈망을 안고 매 주일 예배의 장소로 나아오는 거룩한 습관이 있습니까? 혹시 이 습관이 우선순위에서 다른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일에 빈번하게 밀려나는 일은 없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집을 찾아 그분을 예배하는 일, 이 일이 평생에 양보할 수 없는 최우선 습관이 되게 하십시오. 예배는 성도의 기본 동작입니다. 이 기본 자세가 흔들리면 우리의 인생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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